‘윤시아만 나타나면 정신이 혼미해져서는…. 도대체 걔가 뭐가 그렇게 좋다는 건지 모르겠네.’
사실 심민희는 윤시아의 출신을 비하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행한 일들과 행동거지는 격에 맞지 않은 것들이었다.
“일단 방으로 돌아가서 쉬고 있어. 내가 효준이한테 전화해서 돌아오라고 할게.”
심민희가 담담히 말했다.
백은경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님.”
말을 마친 그녀는 걸음을 돌렸다.
심민희는 멀어지는 백은경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까지 모든 걸 이해해 주려고 하지 않아도 되는데….’
백은경이 울며 고자질하면 심민희는 분명 그녀를 위해 나섰을 것이다.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문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무슨 급한 용건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당장 집으로 기어들어 와!”
말을 마친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문효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평소 욕이라고는 입에 담지도 않는 심민희 성격에 이는 화가 많이 났다는 것을 표현한다.
‘설마 백은경이 할머니한테 다 얘기했나?’
문효준은 어쩐지 기분이 상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윤시아는 그의 음침한 눈빛을 보고 등 뒤에 소름이 돋았다.
“효준아, 왜 그래?”
윤시아가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백은경 씨가 이혼하기 싫어서 할머니한테 고자질한 거야?”
“잘 모르겠어.”
문효준은 외투를 챙기며 말했다.
“일단 나갔다 올게.”
“저녁에 돌아올 거지?”
윤시아가 그의 옷깃을 잡으며 애원하듯 물었다.
“그럼.”
문효준은 다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윤시아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올 때까지 기다릴게.”
‘효준아, 나 절대 널 안 놓아줄 거야.’
문효준은 그런 그녀를 부드럽게 바라보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가 사라지자 윤시아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심민희는 입구에서 문효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 무슨 일이에요?”
문효준이 냉랭하게 물었다.
“소독약 냄새가 진동하네. 애가 안 생기는 게 네 문제인 것 같아서 병원에 검사라도 다녀온 거냐?”
심민희가 차갑게 물었다.
문효준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
“엄마, 지금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저 건강해요.”
“건강한데 아이는 왜 안 가져?”
심민희가 불쾌한 기색으로 물었다.
“은경이가 아이는 싫다고 했어요.”
문효준이 담담히 대꾸했다.
“허튼소리.”
심민희의 표정이 차갑게 일그러졌다.
“문효준, 어떻게 이런 일도 여자인 은경이 탓을 하는 거야? 이건 그냥 남자가 제구실 못하면서 모든 문제가 와이프한테 있다면서 책임을 전가하는 거잖아? 내가 어떻게 너 같은 아들을 낳았는지 모르겠다!”
문효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거짓말 아니에요.”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백은경을 시험한 적 있었다.
그는 매번 뜨거운 사랑이 끝나면 이따가 뭐할 거냐고 물었다.
그때마다 백은경은 미술학원에 등록해서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답했다.
문효준은 심심하면 아이 하나 낳아서 기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하지만 백은경은 고민도 없이 바로 거절했다.
심민희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애 낳자고 했니?”
“네.”
문효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말 다했네. 걔가 당장 아이 낳자고 했으면 네가 가만히 있었겠어?”
심민희는 말할수록 분노가 치밀었다.
“네가 항상 은경이한테 주제넘은 기대는 하지도 말라고 주의를 줬겠지. 너희한테 애가 생기면 윤시아가 돌아왔을 때 자리가 없을 테니까!”
문효준은 굳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백은경이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면 애 낳고 시아랑 둘이 그 아이를 같이 기를 생각이었어요. 그 여자는 아직 어리니까 더 좋은 남자를 만날 수도 있잖아요.”
심민희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왔다.
“넌 내 아들도 아니야. 가서 애가 바뀌지 않았는지 유전자 검사라도 해야겠어!”
문효준은 할 말을 잃었다.
“너랑 은경이 사이의 일은 간섭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너희가 알아서 해.”
심민희는 차갑게 말을 이었다.
“어차피 너 같은 쓰레기한테 은경이가 아까워. 우리 사무실에 능력 좋고 인물 좋은 청년들이 많아. 너보다 은경이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많다고!”
말을 마친 심민희는 뒤돌아서서 방으로 돌아갔다.
문효준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
할머니가 백은경을 좋아하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심민희까지 백은경의 편을 드는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세상에 어떤 시어머니가 자기 며느리한테 남자를 소개하겠다고 말할까!
문효준은 어쩐지 가슴이 아팠다.
사랑스러운 토끼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길 거라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문효준은 묵묵히 위층으로 올라갔다.
백은경은 침대에 누워 단잠을 자고 있었다.
비록 기분 안 좋게 헤어졌지만 그녀를 향한 문효준의 분노는 항상 오래가지 않았다.
그냥 욱하는 기분에 괘씸하다가 사랑스러운 그녀의 얼굴만 보면 눈 녹듯이 사라졌다.
백은경은 잠잘 때 불편하다며 옷을 많이 입지 않는 버릇이 있었다.
지금 그녀는 진줏빛이 도는 나시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이불을 끌어안고 자면서 하얀 다리가 밖으로 드러났다. 무척 섹시한 모습이었다.
“백은경.”
문효준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낮은 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피곤했던 백은경은 눈도 뜨지 않고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끄러워요, 저 졸려요.”
임신한 뒤, 그녀는 잠이 많아졌다.
문효준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물었다.
“같이 잘까?”
그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매끄럽고 부드러운 볼을 쓰다듬었다.
‘피부관리를 어떻게 하길래 이렇게 깨끗할까.’
“싫어요, 무겁단 말이에요….”
백은경은 잠결에 하마터면 배 속의 아이가 숨 막혀 할 거라는 말을 할 뻔했다.
문효준의 얼굴이 음침하게 변했다.
“우리 아직 이혼 안 했어. 벌써 날 거절하는 거야?”
그녀는 특별히 컨디션이 안 좋은 며칠을 제외하고 한 번도 그를 거절한 적 없었다.
‘아직 날짜도 아닌데….’
백은경은 갑자기 몸이 무거워지더니 남자의 단단한 품이 그녀를 확 끌어안았다.
순간 그녀는 놀라서 눈을 떴다.
그녀는 자신을 안고 있는 문효준을 멍하니 바라보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문효준 씨?!”
문효준은 기분이 나빴다.
그녀는 이렇게 성까지 붙여서 그의 이름을 부른 적이 거의 없었다!
평소에는 항상 준이 씨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애칭은 자신만 부를 수 있는 것이라며 단호하게 말했었다.
백은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껴안고는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항상 욕구불만인 문효준을 알기에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임신 초반이라 각별히 조심해야 했다.
예전의 그녀였다면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고 그의 뜨거운 손길을 좋아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문효준은 자신을 피하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엄마랑 무슨 얘기 했어?”
백은경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어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는데 엄마가 어떻게 시아가 돌아온 사실을 아셨지?”
문효준이 불쾌한 표정으로 물었다.
“문효준 씨, 윤시아 씨는 투명 인간이 아니에요. 서울에 윤시아 씨 얼굴을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당신이 윤시아 씨를 인화 병원에 입원시켰잖아요. 서울 재벌들이 거의 그 병원을 이용한다는 거 몰랐어요? 병원에서 윤시아 씨를 본 그 사람들이 입 다물고 가만히 있었을까요? 당연히 소식이 어머니 귀까지 전해졌겠죠!”
한 번도 문효준에게 짜증을 부리지 않았던 백은경이었다.
그녀는 줄곧 현숙한 아내가 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오늘 와서 깨달은 게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완벽해도 문효준은 그녀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그는 그녀에게 윤시아를 위해 골수 이식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문효준은 처음 보는 그녀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냥 해본 소리였어.”
“저를 의심하고 계시잖아요. 제가 이혼하기 싫어서 할머니랑 어머니한테 가서 고자질했다고요.”
백은경은 생각할수록 억울했다.
그녀는 고자질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문효준과 결혼하고 서러운 일도 많았지만 아무에게도 고충을 털어놓은 적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