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5화 난 당신에게 뭐였나요

  • 백은경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 하지만 심민희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 그녀가 낳은 아들인데 그 속을 모를까?
  • ‘윤시아만 나타나면 정신이 혼미해져서는…. 도대체 걔가 뭐가 그렇게 좋다는 건지 모르겠네.’
  • 사실 심민희는 윤시아의 출신을 비하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행한 일들과 행동거지는 격에 맞지 않은 것들이었다.
  • “일단 방으로 돌아가서 쉬고 있어. 내가 효준이한테 전화해서 돌아오라고 할게.”
  • 심민희가 담담히 말했다.
  • 백은경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 “네, 어머님.”
  • 말을 마친 그녀는 걸음을 돌렸다.
  • 심민희는 멀어지는 백은경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이렇게까지 모든 걸 이해해 주려고 하지 않아도 되는데….’
  • 백은경이 울며 고자질하면 심민희는 분명 그녀를 위해 나섰을 것이다.
  •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문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 “지금 무슨 급한 용건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당장 집으로 기어들어 와!”
  • 말을 마친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 문효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 평소 욕이라고는 입에 담지도 않는 심민희 성격에 이는 화가 많이 났다는 것을 표현한다.
  • ‘설마 백은경이 할머니한테 다 얘기했나?’
  • 문효준은 어쩐지 기분이 상했다.
  • 옆에서 지켜보던 윤시아는 그의 음침한 눈빛을 보고 등 뒤에 소름이 돋았다.
  • “효준아, 왜 그래?”
  • 윤시아가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 “백은경 씨가 이혼하기 싫어서 할머니한테 고자질한 거야?”
  • “잘 모르겠어.”
  • 문효준은 외투를 챙기며 말했다.
  • “일단 나갔다 올게.”
  • “저녁에 돌아올 거지?”
  • 윤시아가 그의 옷깃을 잡으며 애원하듯 물었다.
  • “그럼.”
  • 문효준은 다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제야 윤시아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 “그럼 올 때까지 기다릴게.”
  • ‘효준아, 나 절대 널 안 놓아줄 거야.’
  • 문효준은 그런 그녀를 부드럽게 바라보고는 밖으로 나갔다.
  • 그가 사라지자 윤시아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 심민희는 입구에서 문효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 “엄마, 무슨 일이에요?”
  • 문효준이 냉랭하게 물었다.
  • “소독약 냄새가 진동하네. 애가 안 생기는 게 네 문제인 것 같아서 병원에 검사라도 다녀온 거냐?”
  • 심민희가 차갑게 물었다.
  • 문효준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
  • “엄마, 지금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저 건강해요.”
  • “건강한데 아이는 왜 안 가져?”
  • 심민희가 불쾌한 기색으로 물었다.
  • “은경이가 아이는 싫다고 했어요.”
  • 문효준이 담담히 대꾸했다.
  • “허튼소리.”
  • 심민희의 표정이 차갑게 일그러졌다.
  • “문효준, 어떻게 이런 일도 여자인 은경이 탓을 하는 거야? 이건 그냥 남자가 제구실 못하면서 모든 문제가 와이프한테 있다면서 책임을 전가하는 거잖아? 내가 어떻게 너 같은 아들을 낳았는지 모르겠다!”
  • 문효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 “거짓말 아니에요.”
  •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백은경을 시험한 적 있었다.
  • 그는 매번 뜨거운 사랑이 끝나면 이따가 뭐할 거냐고 물었다.
  • 그때마다 백은경은 미술학원에 등록해서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답했다.
  • 문효준은 심심하면 아이 하나 낳아서 기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 하지만 백은경은 고민도 없이 바로 거절했다.
  • 심민희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 “네가 애 낳자고 했니?”
  • “네.”
  • 문효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말 다했네. 걔가 당장 아이 낳자고 했으면 네가 가만히 있었겠어?”
  • 심민희는 말할수록 분노가 치밀었다.
  • “네가 항상 은경이한테 주제넘은 기대는 하지도 말라고 주의를 줬겠지. 너희한테 애가 생기면 윤시아가 돌아왔을 때 자리가 없을 테니까!”
  • 문효준은 굳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 “백은경이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면 애 낳고 시아랑 둘이 그 아이를 같이 기를 생각이었어요. 그 여자는 아직 어리니까 더 좋은 남자를 만날 수도 있잖아요.”
  • 심민희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왔다.
  • “넌 내 아들도 아니야. 가서 애가 바뀌지 않았는지 유전자 검사라도 해야겠어!”
  • 문효준은 할 말을 잃었다.
  • “너랑 은경이 사이의 일은 간섭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너희가 알아서 해.”
  • 심민희는 차갑게 말을 이었다.
  • “어차피 너 같은 쓰레기한테 은경이가 아까워. 우리 사무실에 능력 좋고 인물 좋은 청년들이 많아. 너보다 은경이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많다고!”
  • 말을 마친 심민희는 뒤돌아서서 방으로 돌아갔다.
  • 문효준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
  • 할머니가 백은경을 좋아하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심민희까지 백은경의 편을 드는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 세상에 어떤 시어머니가 자기 며느리한테 남자를 소개하겠다고 말할까!
  • 문효준은 어쩐지 가슴이 아팠다.
  • 사랑스러운 토끼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길 거라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 문효준은 묵묵히 위층으로 올라갔다.
  • 백은경은 침대에 누워 단잠을 자고 있었다.
  • 비록 기분 안 좋게 헤어졌지만 그녀를 향한 문효준의 분노는 항상 오래가지 않았다.
  • 그냥 욱하는 기분에 괘씸하다가 사랑스러운 그녀의 얼굴만 보면 눈 녹듯이 사라졌다.
  • 백은경은 잠잘 때 불편하다며 옷을 많이 입지 않는 버릇이 있었다.
  • 지금 그녀는 진줏빛이 도는 나시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이불을 끌어안고 자면서 하얀 다리가 밖으로 드러났다. 무척 섹시한 모습이었다.
  • “백은경.”
  • 문효준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낮은 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 피곤했던 백은경은 눈도 뜨지 않고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 “시끄러워요, 저 졸려요.”
  • 임신한 뒤, 그녀는 잠이 많아졌다.
  • 문효준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물었다.
  • “같이 잘까?”
  • 그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매끄럽고 부드러운 볼을 쓰다듬었다.
  • ‘피부관리를 어떻게 하길래 이렇게 깨끗할까.’
  • “싫어요, 무겁단 말이에요….”
  • 백은경은 잠결에 하마터면 배 속의 아이가 숨 막혀 할 거라는 말을 할 뻔했다.
  • 문효준의 얼굴이 음침하게 변했다.
  • “우리 아직 이혼 안 했어. 벌써 날 거절하는 거야?”
  • 그녀는 특별히 컨디션이 안 좋은 며칠을 제외하고 한 번도 그를 거절한 적 없었다.
  • ‘아직 날짜도 아닌데….’
  • 백은경은 갑자기 몸이 무거워지더니 남자의 단단한 품이 그녀를 확 끌어안았다.
  • 순간 그녀는 놀라서 눈을 떴다.
  • 그녀는 자신을 안고 있는 문효준을 멍하니 바라보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 “문효준 씨?!”
  • 문효준은 기분이 나빴다.
  • 그녀는 이렇게 성까지 붙여서 그의 이름을 부른 적이 거의 없었다!
  • 평소에는 항상 준이 씨라고 불렀다.
  • 그리고 그 애칭은 자신만 부를 수 있는 것이라며 단호하게 말했었다.
  • 백은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껴안고는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 항상 욕구불만인 문효준을 알기에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임신 초반이라 각별히 조심해야 했다.
  • 예전의 그녀였다면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고 그의 뜨거운 손길을 좋아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 문효준은 자신을 피하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 “엄마랑 무슨 얘기 했어?”
  • 백은경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어요.”
  •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는데 엄마가 어떻게 시아가 돌아온 사실을 아셨지?”
  • 문효준이 불쾌한 표정으로 물었다.
  • “문효준 씨, 윤시아 씨는 투명 인간이 아니에요. 서울에 윤시아 씨 얼굴을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당신이 윤시아 씨를 인화 병원에 입원시켰잖아요. 서울 재벌들이 거의 그 병원을 이용한다는 거 몰랐어요? 병원에서 윤시아 씨를 본 그 사람들이 입 다물고 가만히 있었을까요? 당연히 소식이 어머니 귀까지 전해졌겠죠!”
  • 한 번도 문효준에게 짜증을 부리지 않았던 백은경이었다.
  • 그녀는 줄곧 현숙한 아내가 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오늘 와서 깨달은 게 있었다.
  • 그녀가 아무리 완벽해도 문효준은 그녀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 심지어 그는 그녀에게 윤시아를 위해 골수 이식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 문효준은 처음 보는 그녀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렸다.
  • “그냥 해본 소리였어.”
  • “저를 의심하고 계시잖아요. 제가 이혼하기 싫어서 할머니랑 어머니한테 가서 고자질했다고요.”
  • 백은경은 생각할수록 억울했다.
  • 그녀는 고자질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문효준과 결혼하고 서러운 일도 많았지만 아무에게도 고충을 털어놓은 적 없었다.
  • 그런데 이런 오해를 받으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 ‘사랑하지 않아도 최소한의 신뢰는 줄 수 있잖아요? 저는 도대체 당신에게 뭐였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