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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백혈병

  • 백은경은 고개를 돌리고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 “정인 이모, 이모한테 폐 끼치고 싶지 않아요.”
  • 말을 마친 그녀는 밖으로 나갔다.
  • 왕정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 백은경의 모친은 왕정인의 스승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은사의 딸을 보호할 능력조차 없었다.
  • ‘선생님 얼굴을 어떻게 보지….’
  • 산부인과에서 나온 백은경은 손에 든 진단서를 조은택에게 내밀었다.
  • “잘 봐요. 임신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대로 돌아가서 보고하면 돼요.”
  • 조은택이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 “사모님, 어디 가세요? 말씀만 해주시면 모셔다드리겠습니다.”
  • 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겁니다.”
  • “어디 나갈 때 누가 따라다니는 거 질색이에요. 돌아가서 문효준 씨한테 전해요. 조만간 할머니 찾아뵐 거라고요. 그런데 지금은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어요.”
  • 백은경은 무척 짜증이 난 표정이었다.
  • “네, 알겠습니다.”
  • 조은택이 고개를 끄덕이자 백은경은 바로 밖으로 향했다.
  • 한참 가던 그녀는 핸드폰을 안 챙긴 것을 잊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
  •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나오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그녀를 불렀다.
  • “백은경 씨.”
  • 윤시아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 백은경은 순간 온몸이 경직됐다.
  • ‘이런 곳에서 다 만나다니!’
  • 그녀는 조용히 뒤돌아서서 윤시아를 바라보았다.
  • 환자복을 입고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윤시아가 눈에 들어왔다.
  • 하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 두 사람은 이목구비가 무척 닮았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 백은경은 여성스럽고 청순한 이미지인 반면, 윤시아는 차도녀 느낌이 강했다.
  • 서로 상반되는 분위기였다.
  • 백은경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 “왜 여기 있어요?”
  • 윤시아는 냉랭하고 질투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 “백혈병으로 입원 중이에요.”
  • 백은경이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 “백혈병이요?”
  • “효준이가 이 병원이 좋다고 해서 왔어요.”
  • 윤시아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 “참, 이곳 백혈병 치료법을 처음 개발하고 완성시킨 분이 은경 씨 부모님이라면서요?”
  • 백은경은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 그녀의 부모님이 완성한 치료법으로 라이벌을 치료한다니, 이런 황당한 경우가 있을까?
  • “그럼 치료 잘 받으세요.”
  • 차갑게 대꾸한 백은경은 바로 걸음을 돌렸다.
  • “백은경 씨.”
  • 윤시아가 유유히 그녀를 불렀다.
  • “효준이를 돌려주세요.”
  • 백은경은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 “백은경 씨가 중간에 끼어들지 않았으면 3년 전 효준이의 신부는 저였겠죠. 백은경 씨 때문에 나랑 효준이는 사랑하면서도 헤어질 수밖에 없었어요. 제가 이 지경이 됐는데 아직도 효준이를 잡고 있을 건가요? 효준이가 누굴 사랑하는지 알잖아요!”
  • 윤시아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
  • 백은경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 “참 우습네요. 그렇게 이혼이 하고 싶었으면 그 사람한테 저랑 직접 얘기하라고 해요. 제가 윤시아 씨한테 이런 얘기 들을 필요는 없잖아요? 그 사람 겁쟁이라서 뒷감당이 두렵대요?”
  • 사실 윤시아가 고의적이라는 건 백은경도 느끼고 있었다.
  • 그저 문효준이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는 말로 백은경을 자극하려는 얕은수였다.
  • 그걸 알면서도 백은경은 가슴이 아팠다.
  • 누가 뭐라고 해도 그 남자는 그녀가 몇 년을 짝사랑한 사람이었다.
  • “효준이는 그냥 입이 안 떨어질 뿐이에요.”
  • 윤시아가 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었다.
  • “백은경 씨는 부모님이 안 계시고 노부인의 사랑을 받는다는 점으로 효준이를 잡고 있잖아요. 하지만 효준이는 전혀 당신 사랑하지 않아요!”
  • 백은경도 맞서서 비아냥거렸다.
  • “전혀 사랑하지 않는지, 아니면 애정이 있는지 그걸 윤시아 씨가 어떻게 알아요?”
  • 윤시아가 멈칫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 “날 사랑하지도 않는데 왜 나랑 잠자리를 했을까요?”
  • 백은경이 차갑게 물었다.
  • 흠칫하던 윤시아가 백은경의 등 뒤를 바라보더니 비명을 질렀다.
  • “효준아?!”
  • 백은경은 그 모습을 보고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 ‘또 속았네.’
  • 그녀가 뒤돌아서자 차가운 표정을 한 남자가 서 있었다.
  • “산부인과 검사하러 온 거예요. 두 사람 말씀 나누세요.”
  • 백은경은 바로 발길을 돌렸다.
  • “결과는?”
  • 그가 차갑게 물었다.
  • 백은경은 진단서를 꺼내 그의 셔츠 주머니에 찔러넣으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 “걱정하지 마세요. 임신 아니니까.”
  • 문효준은 진단서를 확인한 순간 기분이 좋지 않았다.
  • 사실 아니라고 했지만 그도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 하지만 잠깐일 뿐, 이런 감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임신 아니면 추후의 일을 상의하지.”
  • 문효준이 차갑게 말했다.
  • “여기서요?”
  • 백은경이 서러운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 “검사 때문에 아침도 못 먹었단 말이에요.”
  • “그럼 밥 먹으러 가.”
  • 그가 냉랭하게 말했다.
  • “같이 가요.”
  • 백은경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 “먹으면서 이야기해요.”
  • 문효준은 온기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경고했다.
  • “허튼수작 부리지 마!”
  • “호호.”
  • 백은경은 간드러진 웃음을 터뜨리며 애교스럽게 말했다.
  • “제가 정말 허튼수작을 부릴 작정이었으면 당신은 아마 지금쯤 할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있겠죠? 저는 그냥 같이 밥이나 먹고 싶을 뿐이에요.”
  • 문효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 “효준아, 어서 가봐. 병실에서 기다릴게.”
  • 윤시아는 짐짓 선심을 쓰듯이 말했다.
  • 백은경은 입꼬리를 올리며 문효준의 팔짱을 꼈다.
  • “윤시아 씨도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우리 이제 가죠? 근처에 죽집이 있는데 맛집이라고 하더라고요.”
  • 당당하게 문효준의 팔짱을 끼는 백은경을 바라보는 윤시아의 눈빛에 살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 문효준이 윤시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 “병실로 돌아가서 쉬고 있어. 이따가 다시 올게.”
  • “그래.”
  • 윤시아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 “일찍 돌아오면 같이 저녁 먹자.”
  • “알았어.”
  • 문효준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 백은경은 문효준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 그들은 근처의 한 영양죽집에 도착했다.
  • 백은경은 메뉴판을 들고 여유롭게 물었다.
  • “준이 씨는 뭐 먹을래요?”
  • “난 안 먹어.”
  • 문효준이 냉랭하게 대꾸했다.
  • “배불러서 윤시아 씨랑 같이 저녁을 못 먹을까 봐 그러는 거죠? 이해해요.”
  • 말을 마친 백은경은 직원을 불러 주문을 했다.
  • “전복죽 하나랑 고기만두 한 접시 주세요.”
  • “네.”
  • 직원은 고개를 끄덕인 뒤, 주방으로 갔다.
  • 문효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 “이렇게 많이 다 먹을 수 있어?”
  • 그는 백은경의 식량을 잘 알고 있었다.
  • 소문난 소식가인 그녀는 평소 조금만 먹어도 배불렀다.
  • “준이 씨, 겨우 전복죽 하나랑 고기만두 한 접시 시켰는데 아까워서 그러는 거 아니죠?”
  • 백은경이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 “혹시 회사가 망해서 돈이 없어요?”
  • “어서 먹기나 해.”
  • 문효준이 냉랭하게 대꾸했다.
  • 가끔 그녀는 이렇게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 하지만 그와 반면 사람 짜증 나게 굴 때도 많았다.
  • 하지만 3년 동안 백은경이 옆에 있어서 윤시아를 기다리는 나날이 그렇게 괴롭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 잠시 후, 메뉴가 올라오자 백은경은 수저를 들고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 임신을 한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오늘따라 허기가 졌다.
  • 그녀는 볼을 부풀리고 죽을 후후 불며 입안으로 가져갔다. 그 모습은 마치 아기 다람쥐처럼 귀여웠다.
  • “저랑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 백은경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 “아까 시아랑 무슨 얘기 했어?”
  • 문효준이 차갑게 물었다.
  • 백은경은 순간 미간을 확 찌푸렸다.
  • ‘내가 윤시아 기분 나쁘게 했을까 봐?’
  •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 백은경이 말했다.
  • “그래.”
  • 문효준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 “아까 골수 검사를 했는데 이 병원 기증자 후보 중에 시아에게 맞는 골수가 있더군. 그 기증 후보가 누구일 것 같아?”
  • 백은경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 “설마… 그 기증 후보가 저는 아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