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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이식만 해주면 뭐든 해줄게

  • 문효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어떻게 이런 일이! 이건 현실이 아니야!’
  • 백은경은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 평소 그녀는 항상 온화하게 사람을 대했다.
  • ‘하느님, 저랑 장난해요?’
  • “저 기증 안 해요.”
  • 백은경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 “내 가정을 파탄 내고 내 남편을 빼앗아 간 여자한테는 기증 못해요.”
  • 사실 이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 가장 중요한 건, 그녀는 임신 중이었고 아기를 위해서라도 이식 수술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 하지만 이 사실을 문효준에게 알릴 수는 없었다.
  • 문효준이 임신 사실을 알면 분명 아이를 지우라고 강요할 것이다.
  • 그래서 절대 말할 수 없었다!
  • “기증만 해주면 어떤 조건이든 들어줄게.”
  • 문효준이 선심 쓰듯 말했다.
  • “이혼을 안 하겠다는 요구도 포함인가요?”
  • 백은경이 고개를 떨어뜨린 채 물었다.
  • 문효준에게 상처받은 눈빛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 문효준은 대답이 없었다.
  • ‘역시 윤시아를 포기하지 못하는구나.’
  • 그가 허락했다고 해도 그건 윤시아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행복을 희생한 것이었다.
  • ‘참 위대한 사랑이네.’
  • “백은경, 사람은 너무 욕심을 부리면 안 돼.”
  • 이때, 문효준이 차갑게 말했다.
  • “시아를 구하려고 그 조건에 동의한다고 해도 내 마음이 당신한테 없는 건 당신도 알잖아.”
  • 백은경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비수가 되어 그녀의 가슴을 찔렀다.
  • 심장에서 피가 솟구치고 숨쉬기조차 힘이 들었다.
  • “그래도 제가 이 가정을 지키겠다면요?”
  • 백은경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 맑은 눈동자로 그를 응시하며 물었다.
  • “당신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할 거야.”
  • 문효준이 차갑게 그녀를 쏘아보며 말했다.
  • “오히려 모든 걸 잃게 되겠지.”
  • “문효준 씨, 당신 처음으로 재수 없네요.”
  • 백은경은 수저를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 “제 욕심이 과하다고요? 그럼 당신은요? 저랑 이혼하고 윤시아랑 함께하겠다고 해서 싫지만 동의했어요. 그런데 지금 와서 저한테 그녀를 위해 골수를 내놓으라는 건 너무 잔인한 요구 아닌가요?”
  • ‘나도 당신을 사랑하는데 정말 모르나요? 어떻게 이렇게 잔인한 방식으로 날 괴롭힐 수 있어요?’
  • “문효준 씨, 사람은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는 거예요.”
  • 백은경은 마음을 굳힌 듯, 단호하게 말했다.
  • “우리처럼요.”
  • 10년을 사랑한 남자였다. 그런데 그 사랑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녀를 난도질하고 있었다.
  • “정말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군.”
  • 문효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 백은경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 “그래요. 제가 욕심이 과해서 모든 걸 가지고 싶어 하네요. 당신의 몸을 소유했으면서 마음까지 원해서 미안해요.”
  • 말을 마친 그녀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 입맛이 떨어져서 먹고 싶지 않았다.
  • 죽집을 나온 백은경은 문씨 본가에 들렀다.
  • 얼마 전 뇌혈전으로 쓰러졌던 노부인은 최근에야 조금 호전이 되었다.
  • 백은경은 한없이 자상한 이 노인을 보고 있자니 문효준과 이혼하겠다는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 “할머니.”
  • 백은경이 침대에 다가가며 노인을 불렀다.
  • 노부인은 그녀를 보자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우리 은경이 왔구나.”
  • 문씨 가문에서 백은경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의심할 여지없이 노부인이었다.
  • 부모님이 목숨 바쳐 구한 사람이라서가 아니었다.
  • 사실 그날 노부인을 구조한 인원에는 백은경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 그날 노부인이 갑자기 뇌혈전으로 쓰러졌을 때, 백은경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응급조치를 취했다.
  • 의사는 만약 그녀가 빠른 대처를 하지 않았더라면 노부인은 여태 살아남지 못했을 거라고 말했다.
  • 하지만 이 사실은 노부인, 백은경 그리고 의사 세 사람만 알고 있었다.
  • 노부인은 백은경의 부드러운 손을 만지며 탄식했다.
  • “어린 녀석이 이렇게 많은 재주가 있을 줄은 몰랐구나.”
  • 백은경은 쑥스러워하며 다급히 말했다.
  • “할머니, 사실 그건 집안이 의사 가문이라서 그래요. 우리 부모님은 서의학을 전공하셨지만 외할아버지는 유명한 한의사셨거든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옆에서 보고 배웠어요. 그게 효과가 있을 줄은 저도 몰랐는걸요.”
  • “긴장 풀어. 너 의심하는 거 아니야.”
  • 노부인이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 “그냥 효준이 그놈한테 네가 너무 아까워서 그래. 네 재능으로 더 높게 날아오를 수도 있었을 텐데.”
  • 백은경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 문씨 가문에서 그녀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노부인이었다.
  • “네가 효준이를 사랑하지 않았어도 이렇게 많은 걸 희생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야.”
  • 노부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 “그런데 효준이 그 녀석은 아무것도 몰라.”
  • “할머니, 절대 얘기하지 마세요. 그 사람한테 부담 주기 싫어요.”
  • 백은경은 애원하듯 말했다.
  • “그래, 네가 말하지 말라면 하지 말아야지.”
  • 노부인은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 “그런데 은경아, 너희 결혼한지도 3년이 넘었는데 왜 아직도 감감무소식이야?”
  • 백은경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 “할머니, 저희는….”
  • “그 녀석 말은 듣지 마. 그 녀석이 아이를 거부한다고 될 일이야?”
  • 노부인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 “일찍 아이를 낳으면 효준이도 마음을 돌릴 거야. 그래야 윤시아가 돌아와도 네 상대가 안 되지.”
  • 백은경의 표정이 암담해졌다.
  • ‘사실 윤시아는 이미 돌아왔어요, 할머니. 그리고 임신했는데도 저는 윤시아의 상대가 안 돼요. 문효준 씨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매정한 사람이에요.’
  • 하지만 이런 말을 노부인에게 전할 수는 없었다.
  • 백은경은 노부인의 진맥을 마친 뒤, 예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할머니, 전보다 많이 좋아지셨네요.”
  • “그래? 잘됐구나. 나도 우리 은경이가 애 낳는 것까지 보고 싶단다.”
  • 노부인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백은경도 미소로 답했다.
  • “당연히 그래야죠.”
  • 그녀는 노부인과 잠시 담화를 나눈 뒤, 일어서서 작별 인사를 했다.
  • 노부인의 방을 나선 백은경은 마침 마주 오는 심민희와 마주쳤다.
  • “어머님.”
  • 백은경이 공손히 인사했다.
  • 심민희는 여느 시어머니랑은 조금 달랐다.
  • 그녀는 까다로운 시어머니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그녀를 아주 예뻐하는 것도 아니었다.
  • 그녀는 항상 담담하고 차가운 표정을 유지했다.
  • 하지만 그렇다고 백은경을 곤란하게 하거나 깔보지도 않았다.
  • 백은경은 이런 관계도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
  • 그래서 그녀도 속으로 심민희를 무척 존경했다.
  • “그래.”
  • 심민희는 40대 후반의 커리어 우먼이었다. 그녀는 항상 깔끔한 오피스룩과 하이힐을 신고 자신의 변호사 사무실에 출근했다.
  • “할머니 보러 왔어요.”
  • 백은경은 온화한 표정으로 말했다.
  • 사실 심민희는 백은경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직업 특성상 감정을 잘 드러내지 못할 뿐이었다.
  • 어쩌면 문효준의 성격은 그녀를 많이 닮았는지도 모른다.
  • 심민희는 백은경을 무척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 그녀의 눈에 백은경은 온순하고 순진하며 유리알처럼 맑은 아이였다.
  • “꽃게 좀 사 왔는데 저녁 먹고 가.”
  • 심민희가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 그녀가 사건을 맡았던 의뢰인이 선물한 것이었다. 사실 받고 싶지 않았는데 며느리인 백은경이 게를 좋아했던 것이 떠올라서 냉큼 받았다.
  • 집에 돌아오기 전, 그녀는 문효준에게 전화해서 같이 본가로 오라고 하려던 참이었다.
  • 백은경은 예전에 혼자 꽃게 다섯 마리를 거뜬히 해치울 정도로 꽃게 마니아였다.
  • 그때마다 문효준은 게살을 손질해서 그녀에게 주었다. 자세히 생각하면 그들에게도 따뜻하고 가슴이 뭉클하던 순간이 있었다.
  • 하지만 사랑이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 꽃게의 비린내가 풍기자 백은경은 구역질이 올라왔다.
  • 그녀는 다급히 화장실로 뛰어가 변기를 끌어안고 토하기 시작했다.
  • 뒤따라온 심민희는 입구에 서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백은경은 간단히 양치를 마친 뒤, 티슈로 입가에 묻은 물기를 닦으며 말했다.
  • “어머니, 사실 요즘 속이 좀 안 좋아요.”
  • 심민희가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 “검사는 해봤어?”
  • “네. 의사가 휴식에 주의하라고 하셨어요.”
  • 백은경이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 잠시 머뭇거리던 심민희가 입을 열었다.
  • “윤시아가 돌아온 거, 넌 알고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