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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임신 사실을 속이다

  • 문효준은 그녀가 보는 앞에서 윤시아의 전화를 받았다.
  • 그것도 아주 부드럽고 따뜻한 표정이었다.
  • 물론 문효준이 그녀에게 부드럽지 않은 건 아니었다.
  • 하지만 그의 따뜻한 눈빛은 그녀를 통해 다른 여자를 보고 있었다.
  • 그것이 백은경이 아파한 이유였다.
  • 처음부터 그는 한 번도 백은경을 똑바로 보지 않았다.
  • 그는 항상 그녀를 누군가의 대체품으로 생각했다.
  • 가끔 백은경은 윤시아와 닮은 자신의 얼굴이 너무 싫었다.
  •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는 두 사람이 왜 이렇게까지 닮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 “울지 마. 지금 바로 갈게.”
  • 문효준은 부드러운 말로 상대를 달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백은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 “이따가 조 비서 보낼 테니까 같이 병원에 다녀와.”
  • 백은경은 흠칫하며 불만을 토했다.
  • “정말 저를 못 믿으시는군요.”
  • “그래. 안 믿어.”
  • 문효준이 매정하게 말했다.
  • 백은경은 예쁜 입술을 힘주어 깨물며 공허한 표정으로 말했다.
  • “알았어요.”
  • “할머니한테 최대한 빨리 말씀드려.”
  • 문효준이 재촉하듯 말했다.
  • “요즘 할머니 컨디션이 많이 안 좋으신데 지금 꼭 말해야 하나요?”
  • 백은경은 그의 차가운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 “그래. 시아가 더 기다리기 힘들대.”
  • 그가 차갑게 대꾸했다.
  • ‘윤시아가 기다리기 힘들다고 할머니 생사도 신경 쓰지 않겠다는 건가?’
  • 역시 사랑에 눈먼 사람은 물불 안 가린다는 말이 그른 것 하나 없었다.
  • 백은경은 자신이 패배자라는 것을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비참하게 패배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
  • “그래요.”
  • 백은경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런데 아무리 급해도 저한테 3일 정도의 시간은 줄 수 있죠?”
  • “그래.”
  • 문효준이 차갑게 대꾸했다.
  • “날 실망 시키지 않기를 바라지.”
  • “그럴 리가 있겠어요?”
  • 백은경이 가슴 시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3년 동안 당신 아내로 살면서 제가 한 번이라도 실망 시킨 적 있었나요?”
  • 문효준은 흠칫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 그녀의 말이 틀린 것 하나 없었다.
  • 3년 동안 그녀는 한 번도 그를 실망 시킨 적 없었다.
  • 그녀는 모든 방면에서 완벽했다.
  • 특히 잠자리할 때는 더 그랬다.
  • 그녀는 그의 모든 것을 포용하고 이상한 요구까지도 만족시켜 주었다.
  • 그래서 조금은 보내기 아쉽다는 생각도 있었다.
  • “그러면 가장 좋지.”
  • 문효준은 뒤돌아서 옷방으로 갔다.
  • 백은경은 침대에서 그 모습을 멍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 이제 끝인 걸까?
  • 조금 억울했지만 그녀가 변화시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 문효준이 떠난 뒤, 백은경도 침대에서 일어났다.
  • 그녀는 씻은 뒤, 예쁜 원피스를 갈아입고 노부인을 만나러 길에 나섰다.
  • 하지만 문밖을 나가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조은택과 마주쳤다.
  • 백은경은 팔짱을 끼고 약간 불쾌한 기색으로 조은택을 바라보며 물었다.
  • “무슨 일이죠?”
  • 조은택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 그는 지금도 이 사모님이 어떤 사람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 문효준 앞에서 그녀는 온순하고 사랑스러운 토끼였지만 그와 단둘이 있을 때는 성격 사나운 치와와 같았다.
  • “같이 병원 검진을 가라는 대표님 지시가 있었습니다.”
  • 조은택이 말했다.
  • “흥!”
  • 백은경이 잔뜩 불쾌한 기색으로 말했다.
  • “어떻게 나를 이렇게까지 못 믿을 수 있죠?”
  • 조은택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어색한 표정만 지었다.
  • “인화 병원으로 가죠.”
  • 백은경은 아예 병원을 지목했다.
  • 이곳은 서울 최고의 의료 조건과 의료진을 갖춘 사립 병원이었다.
  • 하지만 그럼에도 조은택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 “왜요? 비쌀 것 같아서 부담돼요?”
  • 백은경이 차갑게 물었다.
  • “아… 아닙니다.”
  • 조은택이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 “사모님, 어서 타시죠.”
  • 백은경은 화장기 없지만 아름다운 얼굴을 빳빳이 쳐들고 밖으로 향했다.
  • 차에 오른 그녀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 그녀가 인화 병원을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돌아가신 그녀의 부모님이 이 병원 출신이었다.
  • 그녀 역시 이 병원에서 태어났다.
  • 인화 병원 원장, 간호사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녀를 가족처럼 극진히 아꼈다.
  • 백은경이 그들에게 도움을 청한다면 그들은 절대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 얼마나 지났을까, 조은택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 “사모님, 도착했습니다.”
  • 백은경이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병원에 도착해 있었다.
  • 그녀는 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갔다.
  • 조은택은 뭔가 할 말이 있는 표정으로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 산부인과 앞에 도착한 백은경이 뒤돌아서며 말했다.
  • “조 비서님, 여기서 기다리시죠. 남자가 들어갈 곳은 아니니까요.”
  • 조은택은 눈앞의 간판을 보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 “네, 알겠습니다.”
  • 그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대표님도 참. 직접 오시는 게 좋았을 텐데. 왜 나를 보내서는….’
  • 백은경은 차분한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가서 의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 “정인 이모.”
  • 왕정인은 그녀를 반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맞아 주었다.
  • “은경아, 정말 너였구나. 너랑 동명이인인 줄 알았어.”
  • “저 맞아요.”
  • 백은경이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 “그러니까 임신 검사를 하러 왔다고?”
  • 왕정인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 백은경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 “정인 이모, 아마 임신이 맞을 거예요. 하지만 이 사실을 숨겨줬으면 좋겠어요.”
  • 왕정인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 “아니, 왜?”
  • “이모, 저 이혼하게 될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 아이를 낳고 싶어요. 그런데 남편이 이 아이를 지우고 싶어 해요. 그러니까 이모가 저 좀 도와주세요.”
  • 백은경은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 “너 이거 멍청한 짓이야!”
  • 왕정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 “이혼한 여자 혼자 애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
  • 백은경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 “이모, 저도 잘 알아요. 하지만 돈이 있으니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 거예요.”
  • “돈이랑 상관없는 문제야.”
  • 조급해진 왕정인이 말했다.
  • “남편이 도대체 누구야? 전에 너 결혼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상대가 누구냐고 물어도 대답도 안 해주고. 도대체 누구인데 널 이렇게 괴롭히는 거야? 네 부모님이 안 계신다고 사람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거야?”
  • “이모, 그냥 모르시는 게 좋아요.”
  • 백은경은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히 말했다.
  • “그 사람과 결혼할 때,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건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혼에 대해 원망할 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정인 이모, 저 한 번만 도와주세요. 그 사람과 이혼하면 아이를 데리고 멀리 떠날 거예요.”
  • 떠날 수밖에 없었다. 여기 계속 있었다가는 언젠가는 문효준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 왕정인은 가슴이 아팠다.
  • 든든한 부모님이 안 계셔서 백은경이 시댁에서 무시당하는 것 같았다.
  • “은경아, 그냥 노부인 찾아가서 사정하면 안 돼? 그분은 너 손녀처럼 아끼시잖아.”
  • 자초지종을 모르는 왕정인이 말했다.
  • “그 문효준이라는 사람도 널 동생처럼 아낀다며? 분명 너 대신 그놈을 혼내줄 거야.”
  • 백은경은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 “이모, 이 일은 문씨 가문 도움을 받을 수 없어요. 그러니까 저 좀 도와주세요. 네?”
  • 왕정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복잡한 표정으로 물었다.
  • “그래, 알았어. 검사해야 하니까 일단 누워.”
  • “네.”
  • 일련의 검사가 끝난 뒤, 왕정인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 “이미 8주나 지났구나. 그런데 빈혈기가 좀 있어. 영양 보충에 신경 좀 써야겠어.”
  • “제가 조산으로 태어나서 몸이 허약해서 그래요.”
  • 백은경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 “설마 남편은 그거 알아?”
  • 왕정인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 “아니요. 한 번도 물은 적 없었고 저도 얘기하지 않았으니까요.”
  • 백은경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 문효준은 그녀가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게 해주었지만 한 번도 그녀를 위해 직접 무언가를 해준 적 없었다. 결국 전부 비서와 가정부에게 시켰을 뿐이다.
  • 그는 그저 돈을 지불하는 사람이었다.
  • 왕정인은 한숨을 쉬며 진단서를 건넸다.
  • “네가 원한 거야. 그래도 나는 네가 다시 생각했으면 좋겠어.”
  • 백은경은 진단서를 바라보며 생긋 미소를 지었다.
  • “다시 생각할 것도 없어요. 저랑 그 사람 사이에서 처음부터 제 의지대로 되는 건 없었으니까요.”
  • 말을 마친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 왕정인이 그녀를 불러세웠다.
  • “은경아, 설마 네 남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