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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내가 믿을만한 사람은 너밖에 없어

  • 더 팰리스.
  • 고민서가 떠나간 뒤, 박태훈은 집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 이른 아침부터 식사도 하지 않은 채 그는 술을 한 잔 따라 벌컥벌컥 몇 모금 들이켰다.
  • 귓가에는 온통 고민서의 그 차갑던 목소리와 그의 아이가 아니라던 한마디가 계속해서 맴돌고 있었다.
  • 그녀는 일곱 살이던 때부터 그를 따랐었고 그 이후로 감히 그녀에게 접근했던 남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 ‘내 아이가 아니라고?’
  • “허…”
  • 그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 그는 실소를 터트리며 술잔을 들어 올려 한입에 다 털어 넣었다.
  • 그러던 그때, 문밖에서 자동차의 엔진소리가 들려왔다.
  • 그리고 잠시 뒤, 진성희가 다급한 걸음으로 집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 그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거실을 빠르게 훑어보더니 곧이어 박태훈을 바라보며 노발대발하기 시작했다.
  • “그 계집애 어딨어? 정연이 말로는 그 계집애가 돌아왔다던데, 사실이니?”
  • 이에 박대훈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담담하게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을 뿐이었다.
  • 그런 그의 모습에 진성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 “사실인가 보네! 대체 무슨 낯짝으로 다시 돌아온 거야?”
  • 그녀의 목소리는 화가 잔뜩 나 있었다. 5년이나 지났지만 고민서에 대한 증오는 여전히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상태였다.
  • 하지만 박태훈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기뻐하는 것인지 화가 난 것인지조차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 진성희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엄한 표정으로 경고했다.
  • “내 말 잘 들어, 태훈아. 넌 이미 정연이랑 약혼하기로 되어있어. 설사 그 계집애가 정말 돌아왔다고 해도 너랑은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야! 난 그년이 우리 박씨 가문에 다시 발을 들이는 꼴은 절대 용납 못 해!”
  • 그 말에 박태훈은 왜인지 모르게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 그는 다시는 이 집 대문 안으로는 발을 들이고 싶어 하지 않던 그녀의 모습이 다시금 머릿속에 떠올랐다.
  • 이에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괜한 걱정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 지금의 고민서는 설령 들어오라고 권하더라도 절대 미동도 하지 않을 것이다.
  • 그러니 발을 들이는 일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 더는 진성희의 잔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던 그는 아침 식사도 거른 채 그대로 집을 나섰다.
  • 안은호가 차를 몰고 그런 그를 회사로 데려다주었다.
  • 회사로 향하는 길에 박태훈은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안은호에게 한 마디 지시했다.
  • “고민서가 어디서 지내는지 알아봐. 계속 지켜보다가 출국하려는 낌새가 보이면 당장 나한테 보고하고. 그리고… 그 여자 옆에 있던 남자에 대해서 조사해 봐.”
  • “알겠습니다.”
  • 안은호가 공손하게 답했다.
  • ……
  • 고민서와 일행들은 호텔로 돌아갔다. 그녀는 호텔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오늘 밤 바로 D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녀는 한번 결정한 일은 절대 번복하지 않았다.
  • 이에 준이는 남몰래 조급해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그녀를 이곳에 남게 할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 고민서는 그런 아이의 마음을 알고 있음에도 일부러 모른 척하며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는 곧바로 침대 위에 쓰러져 잠을 청했다.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오후 2시였다. 그녀를 깨운 것은 휴대폰 벨소리였다. 이에 휴대폰 화면을 확인한 그녀는 전화를 받았다.
  • “King, 무슨 일이세요?”
  • 이내 수화기 너머에서 잔잔하면서도 매력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귀국했다며?”
  • “네, 급하게 오느라 말씀도 못 드렸네요. 일에 지장이 생긴 건 돌아가서 다시 처리해 놓을게요.”
  • 고민서는 침대 위에 일어나 앉으며 머리가 아픈 듯 미간을 주물렀다.
  • 잘 잤다고는 할 수 없는 낮잠이었다. 꿈만 계속해서 꾸다가 잠에서 깬 것이었다. 그렇게 잠에서 깬 그녀의 목소리마저 조금 갈라져 있었다.
  • “잠을 설친 거야?”
  • King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고민서는 미간을 주무르던 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 “괜찮아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 이에 King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 “회사에서 서울에 지사를 설립하려 하는데 아직 마땅한 사람이 없네. 마침 네가 거기 가 있는 김에 겸사겸사 반년만 수고 좀 해줘. 반년 뒤에 다시 D국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줄게.”
  • 그 말에 고민서는 깜짝 놀라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King이 그녀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 “민서야,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은 너밖에 없어.”
  • 그 말에 고민서는 하려던 말을 그대로 다시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King의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오늘날의 성취를 거둘 수 있었던 건 King이 준 기회 덕분이었다.
  • “알겠어요.”
  • 고민서는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 전화를 끊은 뒤, 그녀는 침대 끄트머리에 한참을 앉아 있다 몸을 일으켜 옆방에 있는 임준형과 장건우를 찾아갔다. 그곳에는 준이도 함께 있었다.
  • 아이는 고민서를 보자 곧바로 달려와 그녀를 끌어안으며 귀여운 목소리로 물었다.
  • “엄마, 깼어? 잘 잤어?”
  • “잘 잤어.”
  • 고민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하며 아이를 안아 올렸다. 임준형이 그런 그녀에게 다가와 보고했다.
  • “누님, D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표는 이미 예매해 뒀습니다. 오늘 밤 8시 출발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