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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만남

  • 이곳에서 신정연을 마주칠 줄은 고민서 역시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 그녀는 꽤 성숙해져 있었다. 여전히 고급스럽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지만, 또한 더욱 기고만장해져 있었다.
  • 그리고 깔보듯 말하는 그 모습은 그때와 전혀 다름이 없었다.
  • 이에 그녀는 반감이 생겼다.
  • 그녀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고민서는 뒤로 두 걸음 물러서며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 “저와 그렇게 친한 것도 아니면서 너무 가까이 오지 마시죠!”
  • “너…”
  • 말문이 막힌 신정연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동시에 그녀는 눈앞에 있는 고민서가 전과는 꽤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 예전의 고민서는 박씨 가문에서는 고개도 못 드는 고용인이었고, 늘 후줄근한 옷차림에 더러운 일을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 하지만 현재의 그녀는 깔끔하고 우아한 차림이었고, 아름다움 속에 고귀함을 머금고 있었으며, 깊은 곳에서부터 자신감과 기개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마치 신데렐라가 고고한 여왕이 된 것처럼 말이다!
  • 심지어 신정연은 고민서의 눈빛에 약간의 압박감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 그녀는 고민서의 변화가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분이 나빴다. 이에 내뱉는 말도 점점 더 각박해지기 시작했다.
  • “이런, 이제는 허세까지 부려? 5년 못 본 사이에 꽤 많이 변했네. 예전에는 내 앞에서는 말 한마디 꺼낼 자격도 없었는데 말이야. 이제는 고상한 척까지 하는 걸 보니 지난 몇 년간 살기 편했나 봐…“
  • 그녀는 말을 함과 동시에 손을 뻗어 고민서의 옷자락을 집어 들었다.
  • “이 옷 좀 봐. 질감부터 전이랑 다르잖아!”
  • 그러자 고민서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이더니 단숨에 신정연의 손목을 붙잡았다. 자칫하면 뼈까지 부러뜨릴 수 있을 만한 힘이었다.
  • “질감부터 다른 걸 안다면 만지지 마시죠. 당신 능력으론 배상하지 못할 물건이니!”
  • 말을 마친 그녀는 신정연의 팔을 마치 더러운 물건이라도 되는 듯 뿌리쳐냈다.
  • 이에 신정연은 화가 나다 못해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 그녀는 신씨 가문의 아가씨였고 미래의 박씨 가문 사모님이 될 몸이었다. 이제껏 원하는 것은 뭐든 가질 수 있는 삶을 살아온 그녀였는데, 지금 한 궁상스러운 고용인에게 옷 따위를 배상하지 못할 것이라며 조롱을 당했다는 사실이 신정연은 기가 막혔다.
  • 하지만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고민서가 입고 있는 옷은 전부 그녀가 직접 디자인한 것으로 전 세계를 통틀어 단 한 벌밖에 없는 옷이라는 것을 말이다.
  • 이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신정연은 더 듣기 거북한 말들을 내뱉기 시작했다.
  • “보아하니 스폰서라도 하나 물었나 보네… 설마 네 옆에 있는 이 사람이니?”
  • 그녀의 시선이 옆에 있는 임준형을 훑었다.
  • 임준형은 말끔하고 기품 있는 생김새의 남자였다. 고민서의 곁에 서있는 그 모습 또한 훤칠하고 흔들림 없었으며 그 어떤 기백이 느껴졌다.
  • 신정연은 아까부터 그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고, 지금은 당연하게도 그를 고민서의 스폰서라 생각하고 있었다.
  • 이에 임준형은 눈썹을 추켜올렸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 그저 신정연의 이런 식의 무차별적인 공격에는 대응할 가치조차 없다고 느낄 뿐이었다.
  • ‘멍청한 여자군.’
  • 그의 두 눈에 경멸과 멸시가 드러났다.
  • 고민서가 직설적으로 물었다.
  •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죠?”
  • 이에 신정연은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고 생각하고는 더욱더 고민서를 깔보기 시작했다.
  • “하긴, 나랑 너 같은 사람 사이에 딱히 할 이야기가 없긴 하지. 다만 한 가지, 네가 알았으면 하는 게 있어. 박씨 가문에서 쫓겨났으면 주제 파악 좀 하고 다시는 가까이 오지 말았어야지! 나 태훈 씨랑 다음 달에 약혼해. 아무나 찾아와서 우리 기분을 망치지 않길 바라.”
  • 마지막 한마디를 내뱉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더 힘이 실려 있었고, 표정 또한 자랑하듯 득의양양했다.
  • 이에 고민서는 멈칫하더니 웃긴 말이라도 들은 듯 입을 열었다.
  • “그런 것까지 신경 쓰기에는 제가 너무 바빠서요. 그래도 신정연 씨가 그렇게 말하셨으니 축하는 해드릴게요!”
  • 신정연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고민서가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그러던 그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저택의 대문이 열렸다.
  • 이에 고민서와 신정연은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정원 안에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인영 하나가 서있었다. 남자는 깔끔한 정장 차림에 셔츠 단추는 끝까지 잠그고 있었다.
  • 금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긴 다리는 세계적인 모델 못지않았고, 조각 같은 얼굴은 얼음장같이 차가웠으며, 꾹 다문 입술은 각박하고 매정해 보였다.
  • 새까만 두 눈은 마치 구천에서 불어오는 한류처럼 그 어떤 온기도 담겨있지 않았고,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는 몸이 떨려올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