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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살아있어선 안 되는

  • 고민서는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 꿈속에서 수도 없이 들었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번번이 자신의 이름을 그토록 차갑고도 매정하게 불렀었다.
  • 그 목소리를 실제로 듣게 된 지금, 그녀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 한참이 지나고서야 그녀는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 “내 아이이고, 데려갈 권리도 당연히 나한테 있어요. 이야기하고 말고 할 것도 없죠!”
  • “허, 그래?”
  • 박태훈의 말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 “그럼 준이를 다시 볼 것도 없겠네. 필경… 준이는 내 아이기도 하니까.”
  • 이 한마디를 마친 뒤, 그는 장건우에게서 전화기를 가져가 그대로 끊어버렸다.
  •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신호음에 고민서는 손발이 다 저려올 지경이었다.
  • 그녀는 박태훈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준이를 빌미로 그녀를 압박하고 있었다.
  • ‘날 끝까지 가만 놔두지 않겠다는 뜻인가?’
  •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그녀의 부모님을 증오했고, 그녀를 증오했다.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그녀는 항상 박씨 가문에 큰 빚을 지고 있다 느꼈었다.
  • 하지만 당시의 그녀는 고작 7살이었다. 부모님을 잃었고, 모든 친척들에게 미움 당하고, 버림받았으며, 심지어 그런 그녀에게 박씨 가문 사람들은 살인자의 딸이라는 치욕스러운 꼬리표까지 달았었다.
  • 그때부터 그녀는 고아가 되었고, 죄인이 되었고, 살아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되었다.
  • 그리고 5년 전 그토록 매정하게 쫓겨난 뒤, 고민서는 죽음의 문턱을 수도 없이 넘나들었었고, 그녀는 이로써 더는 박씨 가문에게 그 어떤 빚도 없다고 생각했었다.
  • 그렇기에 현재 박태훈이 자신의 사랑스러운 아들을 빼앗아 가려 하는 상황에 그녀가 가만히 앉아 지켜보기만 할 리가 없었다.
  • 고민서의 눈빛은 어딘가 차가웠다. 오르락내리락하던 기분도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 그녀가 임준형에게 지시했다.
  • “가자.”
  • ‘직접 오라면 직접 가면 되는 거야. 두려워할 건 없어!’
  • 이내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더 팰리스로 향했다.
  •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40분이 지난 뒤였다.
  • 이곳은 박대훈의 개인 거처였다. 번화한 도심 속 고즈넉한 동네인 이곳은 명문 재벌들이 모여 사는 곳답게 땅값이 거의 금값이었고, 매 한 채가 단독으로 떨어져 있어 극한으로 프라이버시가 지켜지는 곳이었다.
  • 차에서 내린 고민서의 눈앞에 복잡하고 정교하게 조각된, 족히 4, 5미터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철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 그 안으로는 널찍한 정원이 있었고, 거대한 분수대에서는 맑은 물보라가 일고 있었으며, 주위의 꽃과 초목들 역시 원예 장인이 공들여 가꾼 것이었다.
  • 거기에서 더 안으로 들어가면 그 호화로운 궁궐 형식의 건물이 있었다.
  • 이곳의 모든 구석구석이 뼈에 새겨진 듯 익숙했다.
  • 고민서는 온몸의 피가 갑자기 멈추는 것만 같았다.
  • 커다란 손 하나가 심장을 움켜쥔 듯 호흡마저도 서서히 힘겨워져 갔다.
  •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어찌할 새도 없이 5년 전 그날 밤의 장면이 다시금 재생되고 있었다.
  • 비가 오던 밤, 그 욕설과 처량함, 애원, 그리고… 남자의 매정한 뒷모습.
  • 그 모든 것들이 심장을 엉망진창으로 두드려대는 통에 그녀는 초인종을 누르는 것도 잊은 채 한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 있었다.
  • 또한 그때, 검은색 벤틀리 한 대가 갑자기 천천히 다가오더니 그녀의 옆에 멈춰 섰다.
  • 찾아온 사람은 바로 신정연이었다.
  • 그녀는 박태훈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것이었다.
  • 먼 곳에서부터 박씨 가문 저택 문 앞에 서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고, 그중 하나가 왜인지 낯에 익은 것 같기도 했지만 그녀는 그저 손님일 것이라 생각하고는 더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차를 세운 것이었다.
  • 그녀가 차 창문을 내리고 두 사람을 향해 물었다.
  • “두 분은 태훈 씨를 찾아오신 건가요?”
  •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고민서는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다 그대로 신정연과 눈이 마주쳤다.
  • 그리고 그 순간 신정연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 그녀는 단번에 고민서를 알아보았다.
  • 하지만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 “넌… 고민서?”
  • 그녀가 확인하려는 듯 물었다.
  • 질문이 끝나자, 그녀의 마음속에는 형용할 수 없는 당혹감이 스쳤다.
  • ‘고민서가 돌아왔잖아! 실종된 거 아니었어?!!’
  • 그해 그녀가 사주했던 그 교통사고 이후로 고민서는 사라져 버렸었다.
  • 그렇게 5년이 흘렀고, 그녀는 이번 생에는 더는 고민서를 볼 일이 없을 거라,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그 남자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 하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고민서가 돌아온 것이었다. 게다가 이른 아침부터 박씨 가문 저택 문 앞에 서있는 것이었다!
  • ‘이 계집애가 돌아온 걸 태훈 씨는 이미 알고 있는 걸까?’
  • 신정연의 머릿속에는 온통 충격과 의문으로 가득했다. 몰려드는 감정에 그녀는 결국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 그러더니 차에서 내려 고민서의 앞으로 다가와 조롱 섞인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 “오랜만이네, 고민서. 무슨 낯짝으로 여길 돌아온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