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은호는 순간 깜짝 놀라 급히 아이의 손에서 검사지를 낚아채 박태훈에게 건넸다. 하지만 박태훈은 성가시다는 듯 말을 내뱉었다.
“더 시간 낭비하지 마!”
“그게 아니라, 이… 검사지 말입니다. 진짜인 것 같습니다!”
안은호는 순간 흠칫 놀라며 급히 설명했다.
이에 박태훈은 눈살을 찌푸리며 차가운 시선으로 검사지를 한번 훑었다.
그리고 이내 그는 그 자료의 진위 여부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 진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이 아이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누가 이 유전자 검사 결과를 조작해 준 거지? 그리고 이 정보들은 또 어디에서 난 거야?”
박태훈은 차가운 얼굴로 앞에 있는 꼬마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 눈빛은 마치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하지만 그런 그의 시선에도 준이는 겁먹은 기색 없이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조작한 거 아니에요. 자료들은 제가 직접 조사한 거고요. 뭐가 잘못된 부분이 있는 거예요?”
이에 박태훈은 눈을 찌푸렸다.
아이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문득 조금 전에는 그냥 듣고 넘겼던 정보가 스쳤다.
‘잠깐… 이 아이가 올해 4살 하고도 3개월 됐다고 했지. 고민서!’
5년쯤 되짚어 생각해 보면 그가 평생 유일하게 안았던 여자는 그녀밖에 없었다.
이를 알아차린 순간 그는 더는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가 벌떡 일어서더니 조금 긴장한 듯한 목소리로 확신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너… 성이 고 씨라고 했지? 너희 엄마 이름이 뭐지?”
“저희 엄마의 이름은 고민서예요.”
준이가 귀여운 목소리로 솔직하게 답했다.
그리고 그 대답에 박태훈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너… 다시 한번 말해봐. 엄마 이름이 뭐라고?”
“고민서요. 엄마 이름도 잊어버린 거예요, 아빠?”
준이가 속상하다는 듯 박태훈을 바라보았지만 박태훈은 이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현재 격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심지어는 손까지 살짝 떨리고 있었다.
‘고민서! 5년이야! 5년을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더니 드디어 나타났군!’
아이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이름에 안은호 역시 무척이나 놀랐다.
그도 고민서라는 사람에 대해 알고 있었다.
또한 그녀가 5년 전 박씨 집안에서 쫓겨난 뒤로 이제껏 실종 상태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지난 5년간 박태훈이 유럽의 모든 토지를 다 뒤졌어도 찾을 수 없었던 사람이 이런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게다가 아이까지 낳은 채로 말이다…
박태훈은 한참을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고 나서야 결국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한기가 맴돌고 있었다. 심지어 약간의 살기마저도 느껴지는 듯했다.
“너희 엄마 지금 어딨어? 너희 엄마가 너더러 날 찾아오라고 한 거야?”
‘5년 동안 숨어있을 거였으면 차라리 그냥 평생을 숨어 다니지 왜?’
하지만 준이는 고개를 저었다.
“엄마는 몰라요. 제가 몰래 아빠를 찾으러 귀국한 거예요…”
여기까지 말하던 아이는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지금쯤이면 아마 엄마도 알았을 거고, 분명 날 찾으러 올 거예요. 아빠, 엄마가 찾아오면 아빠가 날 지켜줘야 해요. 엄마는 분명 엉덩이를 때릴 거라고요!”
말을 마친 아이는 다시 한번 달려가 박태훈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방금까지도 화가 잔뜩 나 있던 박태훈은 이 같은 아이의 행동에 무언가가 마음을 톡 건드린 듯 온몸에서 느껴지던 살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저도 모르게 한결 누그러진 태도로 물었다.
“몰래 귀국한 거라니, 혼자 온 거야?”
“아니요. 원래 혼자 오려고 했는데 공항에서 어린이는 혼자 출국 못 하게 해서 건우 할아버지를 끌고 왔어요!”
건우 할아버지에 대해 말하던 아이는 그제야 장건우가 아직 아래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생각나 박태훈을 향해 물었다.
“아빠, 할아버지더러 올라오시라고 해도 돼요? 지금 길 건너 커피숍에 계시거든요!”
당연하게도 박태훈은 이에 딱히 의견이 없었다. 이에 그는 단숨에 아이를 안아 올리며 안은호를 향해 지시했다.
“가서 데리고 올라와. 오늘 회의는 전부 취소시키고.”
지시를 받은 안은호는 곧바로 회의실 문을 나섰다.
……
그 시각 고민서는 여전히 귀국길에 있었다. 가는 내내 그녀는 마음이 불안하기만 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계속해서 준이가 귀국한 목적을 추측했다.
겨우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다음 날 아침이었다.
그녀는 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바로 준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같은 시각 준이는 이미 일어나 평소와 같이 장건우의 보살핌을 받으며 씻고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박태훈이 장건우를 향해 물었다.
“평소에도 당신이 준이를 보살피는 겁니까?”
지나가듯 묻는 말투였지만 그의 말에는 떠보는 듯한 낌새가 담겨있었다.
그는 아이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심지어는 그 여자에 대한 것들까지도.
하지만 장건우는 분수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어떤 것들은 말해도 되고, 어떤 것들은 말하면 안 되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민서 아가씨는 일 때문에 엄청 바쁘십니다. 하지만 그래도 매일 시간을 내어 도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시죠.”
박태훈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뭔가 더 물으려던 그때 갑자기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에 휴대폰을 꺼내 확인하던 준이는 곧바로 깜짝 놀랐다. 장건우 역시 흠칫 놀라며 망설이듯 박태훈을 한번 쳐다보았다.
그런 두 사람의 행동에 박태훈은 전화를 걸어온 사람이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는 얼굴을 굳히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받아.”
하지만 자리를 비켜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전화를 받기가 두려웠던 준이는 바로 휴대폰을 장건우에게 넘겼다. 이에 장건우는 울며 겨자 먹기로 전화를 받았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고민서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고성준! 3초 줄 테니 당장 어디 있는지 말해!”
휴대폰을 뚫고 나오는 그 목소리는 박태훈에게도 똑똑히 들렸다.
그것은 분명 그 여자의 목소리였다.
이에 그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
“민서 아가씨, 저… 접니다.”
장건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자 잔뜩 화가 나 있던 고민서가 무서운 목소리로 질책하기 시작했다.
“고성준 그 녀석은요? 왜 전화를 못 받는 거죠? 건우 아저씨, 준이가 철이 없어서 이런 사고를 치는 건 그렇다 쳐도 어떻게 아저씨까지 같이 일을 벌일 수가 있으세요? 말 한마디 없이 이렇게 멀리까지 오다니요! 제가 걱정할 걸 몰라서 그러신 거예요? 지금 두 사람 어디 있는 거예요? 지금 당장 제가 있는 호텔로 오세요!”
장건우는 무의식적으로 준이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아이는 미친 듯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가고 싶지 않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에 장건우는 하는 수 없이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민서 아가씨, 도련님께서… 아버지를 찾아내셨습니다. 저희 지금… 박씨 가문 저택에 있어요.”
“……”
고민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고 싶던 수많은 말들이 순식간에 막혀버리는 것만 같았다.
머릿속으로는 이미 짐작하고 있던 일이었지만 진실을 직접 듣고 나니 여전히 머릿속이 혼란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역시나, 준이는 박태훈을 찾아온 것이었다.
몇 달 전 실수로 박태훈의 존재에 대해 말을 한 이후로 아이는 그것을 내내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 먼 곳까지 몰래 찾아온 것이리라.
‘이제 박태훈이 이미 준이의 존재를 알게 됐으니…’
그 생각만 하면 고민서는 숨이 막혀왔다.
그해 박씨 가문에서 쫓겨날 때의 그 처량하던 자신의 모습이 아직 눈앞에 선했다.
비록 오랜 시간이 흘렀고, 꽤나 담담해졌지만, 그럼에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더 이상 박씨 가문과는 그 어떤 일로도 엮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고민서는 깊게 한숨을 들이쉬며 마음속에 일렁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명령했다.
“아저씨, 당장 준이 데리고 돌아오세요. 두 번 말하지 않겠어요.”
그녀의 말투에서 그 어떤 참견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을 느낀 장건우는 그녀와 박태훈 사이가 분명 어떠한 원한으로 얽혀 있음을 알아챘다.
그리고 이번에 준이를 데리고 몰래 이곳까지 온 것도 확실히 잘못한 일이 맞았다.
이에 잠시 망설이던 그가 대답하려던 그때, 박태훈의 낮고도 차가운 목소리가 한발 먼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