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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직접 와서 나랑 이야기하라고 하세요

  • “대표님, 아무래도 한번 보셔야겠습니다!”
  • 안은호는 순간 깜짝 놀라 급히 아이의 손에서 검사지를 낚아채 박태훈에게 건넸다. 하지만 박태훈은 성가시다는 듯 말을 내뱉었다.
  • “더 시간 낭비하지 마!”
  • “그게 아니라, 이… 검사지 말입니다. 진짜인 것 같습니다!”
  • 안은호는 순간 흠칫 놀라며 급히 설명했다.
  • 이에 박태훈은 눈살을 찌푸리며 차가운 시선으로 검사지를 한번 훑었다.
  • 그리고 이내 그는 그 자료의 진위 여부를 알아볼 수 있었다.
  • 그것은 분명 진짜였다.
  •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이 아이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 “누가 이 유전자 검사 결과를 조작해 준 거지? 그리고 이 정보들은 또 어디에서 난 거야?”
  • 박태훈은 차가운 얼굴로 앞에 있는 꼬마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 눈빛은 마치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 하지만 그런 그의 시선에도 준이는 겁먹은 기색 없이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 “조작한 거 아니에요. 자료들은 제가 직접 조사한 거고요. 뭐가 잘못된 부분이 있는 거예요?”
  • 이에 박태훈은 눈을 찌푸렸다.
  • 아이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문득 조금 전에는 그냥 듣고 넘겼던 정보가 스쳤다.
  • ‘잠깐… 이 아이가 올해 4살 하고도 3개월 됐다고 했지. 고민서!’
  • 5년쯤 되짚어 생각해 보면 그가 평생 유일하게 안았던 여자는 그녀밖에 없었다.
  • 이를 알아차린 순간 그는 더는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 그가 벌떡 일어서더니 조금 긴장한 듯한 목소리로 확신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 “너… 성이 고 씨라고 했지? 너희 엄마 이름이 뭐지?”
  • “저희 엄마의 이름은 고민서예요.”
  • 준이가 귀여운 목소리로 솔직하게 답했다.
  • 그리고 그 대답에 박태훈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 “너… 다시 한번 말해봐. 엄마 이름이 뭐라고?”
  • “고민서요. 엄마 이름도 잊어버린 거예요, 아빠?”
  • 준이가 속상하다는 듯 박태훈을 바라보았지만 박태훈은 이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 그의 마음은 현재 격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심지어는 손까지 살짝 떨리고 있었다.
  • ‘고민서! 5년이야! 5년을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더니 드디어 나타났군!’
  • 아이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이름에 안은호 역시 무척이나 놀랐다.
  • 그도 고민서라는 사람에 대해 알고 있었다.
  • 또한 그녀가 5년 전 박씨 집안에서 쫓겨난 뒤로 이제껏 실종 상태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 지난 5년간 박태훈이 유럽의 모든 토지를 다 뒤졌어도 찾을 수 없었던 사람이 이런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 게다가 아이까지 낳은 채로 말이다…
  • 박태훈은 한참을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고 나서야 결국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한기가 맴돌고 있었다. 심지어 약간의 살기마저도 느껴지는 듯했다.
  • “너희 엄마 지금 어딨어? 너희 엄마가 너더러 날 찾아오라고 한 거야?”
  • ‘5년 동안 숨어있을 거였으면 차라리 그냥 평생을 숨어 다니지 왜?’
  • 하지만 준이는 고개를 저었다.
  • “엄마는 몰라요. 제가 몰래 아빠를 찾으러 귀국한 거예요…”
  • 여기까지 말하던 아이는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어 나갔다.
  • “하지만 지금쯤이면 아마 엄마도 알았을 거고, 분명 날 찾으러 올 거예요. 아빠, 엄마가 찾아오면 아빠가 날 지켜줘야 해요. 엄마는 분명 엉덩이를 때릴 거라고요!”
  • 말을 마친 아이는 다시 한번 달려가 박태훈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 방금까지도 화가 잔뜩 나 있던 박태훈은 이 같은 아이의 행동에 무언가가 마음을 톡 건드린 듯 온몸에서 느껴지던 살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 그는 저도 모르게 한결 누그러진 태도로 물었다.
  • “몰래 귀국한 거라니, 혼자 온 거야?”
  • “아니요. 원래 혼자 오려고 했는데 공항에서 어린이는 혼자 출국 못 하게 해서 건우 할아버지를 끌고 왔어요!”
  • 건우 할아버지에 대해 말하던 아이는 그제야 장건우가 아직 아래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생각나 박태훈을 향해 물었다.
  • “아빠, 할아버지더러 올라오시라고 해도 돼요? 지금 길 건너 커피숍에 계시거든요!”
  • 당연하게도 박태훈은 이에 딱히 의견이 없었다. 이에 그는 단숨에 아이를 안아 올리며 안은호를 향해 지시했다.
  • “가서 데리고 올라와. 오늘 회의는 전부 취소시키고.”
  • 지시를 받은 안은호는 곧바로 회의실 문을 나섰다.
  • ……
  • 그 시각 고민서는 여전히 귀국길에 있었다. 가는 내내 그녀는 마음이 불안하기만 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계속해서 준이가 귀국한 목적을 추측했다.
  • 겨우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다음 날 아침이었다.
  • 그녀는 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바로 준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 같은 시각 준이는 이미 일어나 평소와 같이 장건우의 보살핌을 받으며 씻고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박태훈이 장건우를 향해 물었다.
  • “평소에도 당신이 준이를 보살피는 겁니까?”
  • 지나가듯 묻는 말투였지만 그의 말에는 떠보는 듯한 낌새가 담겨있었다.
  • 그는 아이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심지어는 그 여자에 대한 것들까지도.
  • 하지만 장건우는 분수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어떤 것들은 말해도 되고, 어떤 것들은 말하면 안 되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 “민서 아가씨는 일 때문에 엄청 바쁘십니다. 하지만 그래도 매일 시간을 내어 도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시죠.”
  • 박태훈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뭔가 더 물으려던 그때 갑자기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 이에 휴대폰을 꺼내 확인하던 준이는 곧바로 깜짝 놀랐다. 장건우 역시 흠칫 놀라며 망설이듯 박태훈을 한번 쳐다보았다.
  • 그런 두 사람의 행동에 박태훈은 전화를 걸어온 사람이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 그는 얼굴을 굳히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 “받아.”
  • 하지만 자리를 비켜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 전화를 받기가 두려웠던 준이는 바로 휴대폰을 장건우에게 넘겼다. 이에 장건우는 울며 겨자 먹기로 전화를 받았다.
  •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고민서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 “고성준! 3초 줄 테니 당장 어디 있는지 말해!”
  • 휴대폰을 뚫고 나오는 그 목소리는 박태훈에게도 똑똑히 들렸다.
  • 그것은 분명 그 여자의 목소리였다.
  • 이에 그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
  • “민서 아가씨, 저… 접니다.”
  • 장건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자 잔뜩 화가 나 있던 고민서가 무서운 목소리로 질책하기 시작했다.
  • “고성준 그 녀석은요? 왜 전화를 못 받는 거죠? 건우 아저씨, 준이가 철이 없어서 이런 사고를 치는 건 그렇다 쳐도 어떻게 아저씨까지 같이 일을 벌일 수가 있으세요? 말 한마디 없이 이렇게 멀리까지 오다니요! 제가 걱정할 걸 몰라서 그러신 거예요? 지금 두 사람 어디 있는 거예요? 지금 당장 제가 있는 호텔로 오세요!”
  • 장건우는 무의식적으로 준이를 쳐다보았다.
  • 그러자 아이는 미친 듯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가고 싶지 않다는 뜻을 내비쳤다.
  • 이에 장건우는 하는 수 없이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 “민서 아가씨, 도련님께서… 아버지를 찾아내셨습니다. 저희 지금… 박씨 가문 저택에 있어요.”
  • “……”
  • 고민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고 싶던 수많은 말들이 순식간에 막혀버리는 것만 같았다.
  • 머릿속으로는 이미 짐작하고 있던 일이었지만 진실을 직접 듣고 나니 여전히 머릿속이 혼란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 역시나, 준이는 박태훈을 찾아온 것이었다.
  • 몇 달 전 실수로 박태훈의 존재에 대해 말을 한 이후로 아이는 그것을 내내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 먼 곳까지 몰래 찾아온 것이리라.
  • ‘이제 박태훈이 이미 준이의 존재를 알게 됐으니…’
  • 그 생각만 하면 고민서는 숨이 막혀왔다.
  • 그해 박씨 가문에서 쫓겨날 때의 그 처량하던 자신의 모습이 아직 눈앞에 선했다.
  • 비록 오랜 시간이 흘렀고, 꽤나 담담해졌지만, 그럼에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더 이상 박씨 가문과는 그 어떤 일로도 엮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 고민서는 깊게 한숨을 들이쉬며 마음속에 일렁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명령했다.
  • “아저씨, 당장 준이 데리고 돌아오세요. 두 번 말하지 않겠어요.”
  • 그녀의 말투에서 그 어떤 참견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을 느낀 장건우는 그녀와 박태훈 사이가 분명 어떠한 원한으로 얽혀 있음을 알아챘다.
  • 그리고 이번에 준이를 데리고 몰래 이곳까지 온 것도 확실히 잘못한 일이 맞았다.
  • 이에 잠시 망설이던 그가 대답하려던 그때, 박태훈의 낮고도 차가운 목소리가 한발 먼저 울려 퍼졌다.
  • “준이를 데려가고 싶으면 직접 와서 나랑 이야기하라고 전하세요.”
  • 그리고 그 크지도 않은 목소리는 수화기 너머에 있는 고민서의 귓가에 똑똑히 전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