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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내가 갚을게

  • 총성이 울리는 순간, 서하은이 몸을 피하려던 찰나였다.
  • 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한쪽 팔이 옆에서 뻗어 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고, 그대로 몸을 끌어당겼다.
  • 이마가 단단한 무언가에 부딪혔다.
  • 따뜻하고, 딱딱한 것.
  • 남자의 가슴이었다.
  • 서하은의 눈빛이 순간 차갑게 가라앉았다. 본능적으로 몸을 빼려 했지만 허리를 감싼 손은 오히려 더 강하게 힘을 주며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 이 남자.
  • 죽고 싶은 건가?
  • 그녀의 손이 소리 없이 허리춤의 칼자루를 향했다. 하지만 칼을 뽑기도 전, 남자가 먼저 손을 놓았다.
  • 서하은은 즉시 한 걸음 물러나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운 채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 그리고 그녀의 동공이 순간 작아졌다.
  • 황혼 아래, 눈앞의 얼굴은 마치 잡지 표지에서 그대로 걸어 나온 듯했다. 날카롭게 조각한 듯한 이목구비와 높은 콧대, 선명한 윤곽. 살짝 얇은 입술까지. 웃지 않는 순간에도 자연스럽게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 그에게서는 여유로운 기품이 흘러나왔다. 비싼 옷이나 겉치레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태어날 때부터 몸에 밴 듯한 기품. 높은 자리에서 세상을 내려다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분위기였다.
  • 하지만 그녀를 진짜 멈칫하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다.
  • 그 남자와 아이가 너무 닮아 있었다.
  • 설마...
  • 부자 관계?
  • 서하은이 그를 살피는 동안 남자 역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깊고 조용한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서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 등 뒤로 숨긴 손끝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 방금 전 그녀의 허리를 감쌌던 손이었다.
  • 그때 아이가 비틀거리며 달려왔다. 그리고 잃어버린 보물을 다시 찾은 사람처럼 서하은의 다리를 힘껏 끌어안았다.
  • "엄마! 엄마!"
  • "나 찾았어! 드디어 찾았어!"
  • 아이는 얼굴 가득 눈물을 흘리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외쳤다.
  • 엄마?
  • 구서진의 표정에 거의 알아차리기 힘든 변화가 스쳤다.
  • 그의 시선이 서하은과 아이 사이를 천천히 오갔다.
  • 자세히 보니. 확실히 닮은 구석이 있었다.
  • 5년 전 그날 밤.
  • 그 흐릿한 실루엣이 문득 떠올랐다.
  • 설마... 그녀였던 건가?
  • 구서진의 시선이 서하은의 눈가에 머물렀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날 밤 그는 의식이 흐릿했고 기억도 조각조각 흩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는 분명히 기억했다. 그 여자의 눈꼬리에는 작은 붉은 점이 있었다.
  • 반면 서하은의 얼굴은 티 하나 없이 깨끗했다. 게다가 그날 그는 이 아이를 쓰레기통 안에서 발견했다. 어머니라면 어떻게 자신의 아이를 쓰레기통에 버릴 수 있겠는가. 그런 짓을 한 여자와 눈앞에서 아이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지는 여자가 같은 사람일 리 없었다.
  • 아니다.
  • 그녀가 아니다.
  • 서하은은 눈물범벅이 된 아이를 내려다보다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손을 뻗어 아이의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 주었다.
  • "됐어. 이제 울지 마. 다친 곳은 치료하면 돼. 운다고 아픈 게 사라지는 건 아니야."
  • "응..."
  • 아이는 흐느끼면서도 애써 눈물을 참았다.
  • "서우는 착한 아이야... 엄마 말 들을게..."
  • 눈가에는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흔들리는 눈물을 보며 서하은은 잠시 말이 없었다. 아이도 알고 있었다. 울면 그녀가 자신을 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이 너무 두려웠다.
  • 잠시 망설이던 서하은이 입을 열었다.
  • "네 이름이 서우야?"
  • 아이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기대가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여전히 그녀를 엄마라고 부르고 있었다.
  • 이상한 일이었다. 서하은은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가 자신을 엄마라고 부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의 텅 빈 공간이 조금씩 채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너무도 잔잔한 감정이라 그녀 자신조차 미처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 "나는 네 엄마가 아니야."
  • 조금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였다.
  • "믿기 어렵다면 네 아빠한테 물어봐."
  •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구서진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서하은도 고개를 들어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 "많이 놀란 모양이군요. 저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것 같습니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 "그 아이에겐 어머니가 없습니다."
  • 구서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감정을 담기보다 그저 변하지 않는 사실을 전하는 사람처럼. 서하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지?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구서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서두르지도, 망설이지도 않는 차분한 목소리.
  •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흔들림 없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 "제 아들을 구했습니다. 당신에게 진 빚은 반드시 갚겠습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 "필요 없습니다."
  • 서하은의 대답은 단호했다.
  • "제가 그 아이를 돕고 싶었을 뿐입니다."
  • 구서진은 한동안 그녀를 말없이 바라봤다. 침착했고, 아이를 지킬 때도 한 치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이런 여자가 자신의 아이를 쓰레기통에 버릴 리 없었다.
  • "당신이 그 아이를 구한 것도 사실이고, 제가 당신에게 빚을 진 것도 사실입니다."
  • 그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타협도 없었다.
  • "당신이 무엇을 원하든 반드시 갚겠습니다."
  • 서하은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희미한 짜증이 스친 얼굴이었다.
  • "말했잖아요. 필요 없다고."
  • 구서진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입꼬리를 아주 희미하게 올리며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 "그럼 저는요?"
  • "...뭐요?"
  • 서하은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의 눈은 너무도 깊고 무거웠다. 마치 그 안에는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것처럼.
  •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구서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 "돈이 싫다면... 저로 갚겠습니다."
  • 순간 서하은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옆에 있던 차도현 역시 멍하니 굳어 있었다. 그녀를 따라다닌 수년 동안, 그녀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 가장 기뻐한 사람은 구서우였다. 왼손으로는 서하은의 손을, 오른손으로는 구서진의 손을 꼭 잡은 아이는 반짝이는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 "좋아! 서우 이제 엄마 있어! 서우 이제 집 있어!"
  • 환하게 웃는 아이를 바라보던 서하은은 끝내 입 밖으로 꺼내려던 말을 삼켰다.
  • 그 순간, 구서우의 눈동자가 갑자기 위로 돌아갔고 작은 몸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 "서우야!"
  • 서하은은 재빨리 아이를 받아 안았다. 아이의 얼굴은 비정상적으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손등으로 이마를 짚어 보니 뜨거운 열이 느껴졌다.
  • "열이 납니다."
  • 그녀가 고개를 들자 구서진은 말없이 아이를 품에 안아 들었다. 몇 걸음 옮기던 그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 "당신은 우리와 같이 가지 않습니까?"
  • 서하은은 잠시 구서우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며 담담하게 말했다.
  • "말했잖아요. 제가 도운 건 제 의지였어요. 대가는 필요 없습니다. 특히 그런 방식은 더더욱요."
  • 구서진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한마디 한마디가 분명했다.
  • "한번 한 말은 절대 번복하지 않습니다. 저로 갚겠다고 했으니 반드시 갚겠습니다."
  • 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덧붙였다.
  • "기다리십시오. 제가 당신을 찾아가겠습니다."
  • 말을 마친 구서진은 구서우를 안고 돌아섰다. 그의 걸음은 크고 빨랐고, 검은 차는 곧 길가를 떠났다. 붉은 후미등은 저녁 어둠 속으로 점점 멀어지다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 서하은은 한동안 그 방향을 바라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 "...갚든 말든."
  • "나랑 무슨 상관이야."
  • 그녀도 이내 몸을 돌려 자신의 차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