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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격차

  • 주차장에는 거센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낙엽이 바닥을 맴돌며 이리저리 흩날렸다.
  • 백진우의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서류철은 그의 손안에서 구겨질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
  • 그는 그녀의 얼굴에서. 5년 전의 서하은을 찾고 있었다. 겁에 질려. 무릎을 꿇고. 자신들을 붙잡고 애원하던 여자.
  • 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 "서하은."
  • 이를 악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 "적당히 해."
  • 그때 누군가 그의 소매를 살며시 붙잡았다.
  • "진우 씨..."
  • 서하영이었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길게 드리운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 "제가... 언니랑 이야기할게요. 처음 상처를 준 사람도... 저였으니까요."
  • 눈가는 금세 붉어졌고. 입술도 가늘게 떨렸다. 백진우의 표정이 흔들렸다. 저렇게까지 상처받았는데도. 서하영은 언제나 자신의 탓부터 했다. 그래서 더 안쓰러웠다.
  • "부탁이에요. 언니와 둘이 이야기하게 해 주세요."
  • 백진우는 말없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서하영이 천천히 돌아섰다. 백진우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순간.
  • 눈물이 사라졌다.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차갑고 비웃는 듯한 미소였다.
  • "언니. 죄수복이 아직도 제일 잘 어울리네. 솔직히 평생 거기서 썩는 게 어울렸을 텐데."
  • 서하은은 차 문에 기대선 채 팔짱을 낀 자세 그대로였다. 시선에는 아무런 흔들림도 없었다. 수없이 들어 본 대사를 또 한 번 듣는 사람처럼.
  • "헛소리는 그만."
  • 담담한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 "결혼식이 사흘 뒤였지."
  • 잠시 침묵 그리고.
  • "그날 끝내자."
  • 서하영의 미소가 아주 잠깐 굳었다. 하지만 이내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출소한 죄수 하나가. 대체 뭘 할 수 있겠는가.
  • "언니가? 언니는 평생 내 그림자에서나 숨 쉬는 사람이야. 진우 씨도 내 거고. 엄마도 내 편이야. 언니는 이미 다 잃었어. 아무것도 안 남았잖아."
  • 서하은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한참 동안.그 시선이 길어질수록. 서하영의 미소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서하은이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 "샴페인은. 너무 일찍 터뜨린 거 아닌가?"
  • 순간. 서하영의 등골을 차가운 기운이 스쳤다. 그녀는 재빨리 백진우 쪽을 흘끗 바라봤다.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 이쪽은 전혀 보지 못하고 있었다. 다음 순간. 짝─!
  • 서하영이 스스로 자신의 뺨을 후려쳤다. 몸이 휘청이며 반걸음 뒤로 밀렸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얼굴을 반쯤 가렸다. 고개를 다시 들었을 때는 이미 두 눈에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
  • "언니... 죄송해. 다 제 잘못이에요. 진우 씨를 빼앗은 것도... 제가 너무 사랑해서 그랬어요... 죄송해요..."
  •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어깨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떨렸다. 서하은은 말없이 바라봤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연기였다. 그런데도 언제나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 "서하은!"
  • 백진우가 휴대전화를 던지듯 내려놓고 달려왔다. 그는 서하영을 품에 끌어안았다.
  • "하영이는 끝까지 널 감싸려고 했어. 그런데 넌 또 이 짓이냐?"
  • 서하은의 시선은 백진우를 스쳐 지나갔다. 그의 품에 안긴 서하영. 몸은 흐느끼듯 떨고 있었지만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눈빛에는 승리감이 가득했다.
  • "난 손대지 않았어. 끝까지 발뺌하겠다는 거냐?"
  • 서하은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멍청한 사람과 대화할 때나 나오는 한숨이었다.
  • "증명하면 되겠네."
  • 백진우가 비웃듯 말했다.
  • "증명? 어떻게..."
  •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하은이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손목을 한 번 푸는 듯한 동작. 길고 곧게 뻗은 손가락.
  • 단단한 마디. 서하영의 눈이 커졌다. 보인 것은 단 하나. 순식간에 그려지는 궤적. 피할 틈도.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 짝─!!
  •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소리가 주차장을 뒤흔들었다. 서하영의 몸이 그대로 반 바퀴 돌아갔다. 무릎이 바닥에 부딪혔고.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오른쪽 뺨은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다. 입을 벌리는 순간. 피가 섞인 침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붉게 물든 치아 몇 개가 함께 굴러갔다.
  • 주차장이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몇 사람 사이의 공기마저 얼어붙은 듯했다. 백진우는 그대로 굳어 있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버렸다. 서하은은 휴지를 한 장 꺼냈다.
  • 천천히 손끝을 닦아 냈다. 마치 사소한 먼지라도 털어 낸 것처럼.
  • "이제 알겠나."
  • 그녀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 "이게 사람을 때린다는 거다."
  • 서하영은 바닥에 엎드린 채 퉁퉁 부어오른 눈 사이로 서하은을 올려다봤다.
  • 처음이었다. 두려움을 느낀 건 그녀가 무서운 이유는감히 반격해서가 아니었다. 손을 내미는 순간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는 것. 눈동자에는 아무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그제야 백진우가 정신을 차렸다. 손끝부터 어깨까지 떨리고 있었다.
  • "너... 하영이한테 사과해."
  • 서하은은 쓰고 있던 휴지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백진우를 바라봤다. 그 눈에는 분노도 원망도 실망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가벼운 한숨 하나가 흘러나왔다.
  • "멍청하군."
  • 그 한마디를 남기고 몸을 돌렸다.
  • "서하은!"
  • "거기 서!"
  • 백진우가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향해 뻗었지만, 닿지 못했다. 서하은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어깨를 아주 조금, 불과 몇 센티미터 비틀었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손끝은 옷깃만 스치고 지나갔다.
  • 곧바로 그녀의 손이 그의 손목을 감쌌고, 다섯 손가락이 손목 관절을 정확히 움켜쥐었다. 강하게 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는데도 백진우는 단 한 번도 빠져나오지 못했다. 다음 순간, 콰앙! 하는 굉음과 함께 그의 등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 충격이 온몸을 꿰뚫었다. 장기가 뒤집히는 듯한 통증이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고, 코피가 입안으로 흘러내려 비릿한 피맛이 혀끝을 가득 채웠다. 서하영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부어오른 얼굴 너머로 공중으로 날아가는 백진우의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머릿속에 오래전 기억 하나가 번쩍 스쳐 지나갔다. 교도소 면회실에서 유리벽을 향해 미친 듯 달려들던 서하은, 절망에 짓눌린 채 물에 빠진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던 그 모습이었다. 그때와 지금의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 지금의 서하은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해 같았다. 고요했고, 차가웠으며, 모든 것을 집어삼킬 만큼 깊었다. 백진우는 바닥을 짚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코피가 얼굴 절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고 눈동자는 충혈되어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분노가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 서하은이 가볍게 주먹을 쥐며 손목을 한 번 풀 듯 흔들었다.
  • "더 할 건가."
  • 백진우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뒤꿈치가 연석에 걸리며 몸이 크게 흔들렸고, 넘어질 뻔한 그는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 서하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비웃음도, 승리의 기쁨도 아닌 그저 시시하다는 표정이었다.
  • "한심하군."
  • 그녀는 차 문을 열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손을 한 번 들어 보였다.
  • "사흘 뒤."
  • "결혼식에서 보지."
  • 차 문이 조용히 닫혔다. 백진우는 주차장 한가운데 멍하니 서 있었다. 코피가 셔츠 위로 한 방울씩 떨어졌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이런 굴욕을 당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 바람이 불자 이혼 합의서가 바람에 넘어가며 펄럭였고, 서명란에는 이미 서하은의 이름이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백진우의 입가가 천천히 비틀렸다. 사흘 뒤,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반드시 오늘의 대가를 몇 배로 돌려주리라 다짐하면서.
  • ……
  • 해 질 무렵.
  • 차량이 교도소 주차장을 빠져나와 도로 위로 들어섰다. 차 안은 에어컨 바람 소리만 잔잔하게 울릴 정도로 조용했다. 차도현이 룸미러를 힐끗 바라보자, 서하은은 눈을 감은 채 한 손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 검지가 일정한 리듬으로 무릎을 톡톡 두드렸다.
  • "지휘관님, 어디로 모실까요?"
  • 서하은은 눈을 감은 채 입을 열었다.
  • "앞으로는 '지휘관님'이라고 부르지 마. 신분이 드러나선 안 돼. Boss면 된다."
  • 차도현이 잠시 멈칫했다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습니다, Boss."
  • "집으로."
  • 그때였다. 도로 옆에서 작은 그림자 하나가 갑자기 차 앞으로 뛰어들었다.
  • "조심!"
  • 차도현이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이익─! 타이어가 날카로운 마찰음을 내며 차량은 인도 턱을 스치듯 아슬아슬하게 멈춰 섰다. 저녁 바람이 열린 창문 사이로 밀려들며 매캐한 먼지 냄새가 차 안을 스쳤다. 서하은은 몸이 앞으로 크게 쏠리자 손잡이를 꽉 붙잡았다.
  • "무슨 일이야."
  • "아이가 갑자기 뛰어나왔습니다."
  • 서하은은 곧바로 차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길가를 향했다. 어린 남자아이가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손바닥은 까져 있었고, 무릎도 크게 긁혀 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다. 입술을 깨문 채 몸을 일으켜 보려 했지만, 팔에 힘을 주는 순간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서하은이 아이 앞에 쪼그려 앉았다.
  • "괜찮니?"
  • 손을 내미는 순간이었다. 아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가로등 불빛이 작은 얼굴을 비췄다. 서하은의 손이 그대로 허공에 멈췄다. 그 눈, 그 눈매, 살짝 올라간 콧날까지 어릴 적 사진 속 자신의 얼굴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아이는 눈을 한 번 깜빡였고, 속눈썹 끝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던 아이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였다.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