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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한데 못 멈추겠어

미안한데 못 멈추겠어

박가람

Last update: 2024-11-12

제1화 전 그냥 평범한 시골 사람이에요

  • 8월 말, 국경의 깊은 산속.
  • 글자 없는 묘비 앞에 원피스 차림의 소녀와 할머니가 서 있었다.
  • 소녀는 이름이 우도정이고 17년 전에 북의시의 한 병원에서 바뀐 여씨 가문의 아가씨였다.
  • 여씨 가문에서 일주일 전에 그녀를 찾아 오늘 데려가기로 약속했다.
  • “돌아가자. 여씨 가문의 사람들이 곧 도착할 거야. 북의시로 돌아가면 넌 여씨 가문의 아가씨야. 예전의 일은 모두 잊어버려.”
  • 우 노부인은 묘비를 바라보던 눈길을 우도정에게 돌렸다.
  • “네. 외할머니, 먼저 내려가세요. 전 좀 더 있다가 내려갈게요.”
  • 우도정은 입술을 실룩거리며 말했다.
  • 노부인은 다시 한번 묘비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너무 늦지 마.”
  • 곧 우 노부인은 떠나고 혼자 남은 우도정은 조용히 묘비만 바라보았다.
  • 문득 뒤쪽 숲속에서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 숲속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 움직임은 곧장 그녀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긴장한 표정으로 그쪽을 살펴보았다.
  • 위장복 차림의 훤칠한 모습 하나가 숲속에서 뛰쳐나왔다. 몸에서 짙은 피비린내가 풍기고 있었다.
  • 남자는 얼굴에 수채를 칠해 용모를 똑똑히 알 수 없지만, 우도정은 그의 오른팔에 있는 붉은색 표지를 보았다. 남자의 뒤쪽 숲속에서 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위험해. 어서 가!”
  • 남자는 이 깊은 산속에서 사람을 만날 줄은 몰랐다는 듯이 나지막하게 소리쳤다.
  • 그는 이 말 한마디에 온몸의 힘을 다 쓴 듯 몇 걸음 비틀거리며 달려가다가 그녀의 앞에 쓰러졌다.
  • 남자는 그대로 엎드려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몸에 눌린 풀에 피가 가득 묻었다.
  • 우도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짙은 피비린내만 보아도 이 남자는 분명히 피를 너무 많이 흘려 기절한 것이었다.
  • 더 이상 지혈하지 않으면 곧 죽을 것이다…
  • 이때 숲속 소리 나던 방향에서 역시 위장복 차림의 남자 두 명이 나타났다.
  • “여기에 여자가 있다니!”
  • 앞에 선 곱슬머리 남자가 영어로 입을 열었다.
  • “그럼 같이 데려가자.”
  • 스포츠머리에 입술이 두꺼운 남자가 뒤따라 나오며 우도정을 바라보았다.
  • 너무 오랜만에 여자를 만나서인지 아니면 이렇게 예쁜 여자를 처음 봐서인지 그의 눈빛이 약간 음탕해졌다.
  • 우도정은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국경지대에서 11년을 살며 이 주변이 어지러운 줄은 알았지만,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 그녀는 마음속으로 긴장하면서도 외할머니를 먼저 내려보낸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 우도정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들의 손에 든 무기를 바라보며 표준적인 미국식 영어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 “저를 해치지 마세요. 전 그냥 평범한 시골 사람이에요…”
  • 스포츠머리가 총부리로 우도정의 턱을 쳐들어 그녀의 예쁘고 여린 얼굴을 바라보며 두꺼운 입술을 핥았다.
  • “어린 아가씨가 영어도 꽤 잘하네. 앞으로 우리랑 같이 놀자. 이 오빠가 너를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잘 먹고 잘살게 해 줄게.”
  • 우도정은 새까만 총구를 바라보며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 그녀는 무서워서 침을 꿀꺽 삼키며 가는 소리로 말했다.
  • “알았어요. 저를 죽이지만 않으면 시키는 대로 할게요. 지금 바로 가서 짐을 싸 들고 당신들을 따라갈게요.”
  • 겁에 질린 여자의 나약한 모습은 순간적으로 남자의 괴롭힘 욕구를 자극했다. 스포츠머리는 능글맞게 웃었다.
  • “시키는 대로 하겠다면 내가 먼저 너를 해야겠어!”
  • 곱슬머리 남자도 사악하게 웃었다.
  • 스포츠머리는 아예 무기를 던지고 한 손으로 우도정의 오른손을 잡아 그녀를 자기 품으로 끌어당겼다.
  • 바로 남자의 가슴에 안기는 순간 우도정의 왼손이 재빠르게 원피스 옆트임 쪽을 스치며 어느새 은침 하나를 들었다.
  • 그리고 다음 순간, 그 은침은 곧장 스포츠머리의 영혈을 찔렀다.
  • “아…”
  • 스포츠머리는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진 채 고개를 숙이고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언제 겁에 질렸던가 싶게 맑고 싸늘했다.
  • 곱슬머리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리고 더러운 욕설을 퍼부으며 총을 들었다. 그러나 자칫 스포츠머리를 다치게 할까 봐 그냥 시커먼 총구를 우도정에게 겨누기만 했다.
  • 우도정은 기절한 스포츠머리를 밀어내고 잽싸게 묘비 앞으로 굴러가서 대바구니 안에 있는 흰 가루 한 움큼을 집어 곱슬머리 남자에게 던졌다.
  • 곱슬머리는 재빨리 장탄했지만, 여전히 한발 늦었다.
  • 하얀 가루가 코에 흡입되는 순간 눈앞이 어지럽고 감각이 둔해지다가 곧 눈을 하얗게 뒤집으며 쓰러졌다.
  • 이것은 그녀가 야생동물을 상대하기 위해 직접 만든 마취약이다. 이 약은 해독제가 없고 적어도 한 시간 안에는 깨어나지 못한다.
  • 우도정은 땅바닥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고 자기 몸을 살펴보았다. 외할머니가 만들어 준 원피스는 이미 더러워졌을 뿐만 아니라 돌에 긁혀 찢어지기까지 했다.
  • 예쁜 미간이 저도 모르게 찌푸려졌다.
  • 아까워도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재빨리 먼저 쓰러진 남자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 남자는 오른쪽 견갑골에 총상을 입고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 우도정은 남자의 복잡한 위장복을 헤치고 자기 원피스의 옆트임 쪽을 젖혔다. 그 가장자리에는 길고 짧은 은침이 가득 꽂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