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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왜 그녀는 더 타운에서 지낼 수 있는가

  • 안소율의 맑은 눈빛에 그녀의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기에 다들 그녀의 눈빛에서 실망감을 보나 낼 수 있었다.
  • 하지만 진정성이라는 단어는 이 도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 안소율이 사과하자 어떤 이들은 그런 그녀를 비웃으며 다가가 밀치기 시작했고, 창피를 당한 꽃무늬 셔츠의 남자는 그녀에게 다시 손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화풀이하듯 안소율의 핑크색 물통을 걷어찼다.
  • 안소율은 연신 뒷걸음질 쳤다.
  • 사실 박호진에게 전화 한 통만 한다면 분명 이 집에서 쫓겨날 일은 없겠지만 그녀는 서울에 올라온 첫날부터 박호진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두 눈에 담겨있던 실망감은 아무도 못 본 사이에 어느새 강인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 ‘날 괴롭힌다 이거지! 좋아, 한 명 한 명 다 기억해 두겠어! 다음에 만나면 쥐도 새도 모르게 갚아줄 거야!’
  • 가련해 보이는 이 소녀가 이미 복수를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 그리고 박강현은 현재 피곤해하고 있는 듯했다. 그는 이 난리통을 더 이상 지켜보고 싶지 않은 듯 입을 열었다.
  • “피곤해. 다들 이만 가봐.”
  • 박강현은 종래로 허튼소리를 하는 법이 없었다. 그가 허용할 때는 어떻게 난장판을 부리며 놀아도 괜찮지만 해산하라는 그의 한마디에 그곳에 있던 잘난 도련님들은 곧바로 소란을 멈추고 하나 둘 인사를 건네며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 그들은 안소율만큼 대담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감히 박강현의 말을 거역할 용기가 없었다.
  • 오직 안소율만이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그곳에 서있었다.
  • 그때, 박강현이 또 한마디 지시를 내렸다.
  • “이모, 쟤한테 지낼만한 방 하나 내줘. 앞으로 더 타운 저택에 아르바이트생이나 메이드는 필요 없어. 저택의 일들은 전부 쟤한테 맡기도록 해.”
  • 그 말에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나이가 지긋한 집사가 안소율을 향해 다가갔다.
  • 아직 저택을 벗어나지 않은 사람들은 박강현의 말을 듣고는 다들 어리둥절해하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 지금 이 순간 모든 이들이 평소와 다른 점을 눈치챘던 것이다.
  • 박강현에게는 괴벽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머무는 곳에 타인이 들어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평소 메이드나 요리사들도 정해진 시간에 찾아와 할 일을 마치고는 바로 떠나곤 했다.
  • 이곳에 놀러 오는 이들도 그 규칙은 다들 알고 있었고, 어렸을 때부터 박강현을 보살펴 온 집사 김미진조차도 밤에는 더 타운에 묵지 않았다.
  • 하지만 그는 그녀를 이곳에 묵도록 했고, 그것은 그녀가 밤에도 이곳 더 타운에 머무르며 박강현과 한 지붕아래 지낸다는 말이었다.
  • 이 사실에 그들은 충격을 금치 못했고 또한 이해가 가지 않았다.
  • ‘저 메이드는 누구지? 촌스럽기 그지없는 저 여자가 왜 더 타운에서 지낼 수 있는 거지?’
  • 한 무리의 사람들이 충격에 휩싸인 채 빠르게 그곳을 떠나가고 작은 저택은 완전히 조용해졌다.
  • 김미진은 박강현의 지시대로 안소율을 1층에 있는 한 방으로 데려가 이것저것 일러주었다.
  • “아가씨는 앞으로 이 방을 쓰시면 됩니다. 도련님의 방은 2층에 있습니다. 도련님은 누군가에게 방해를 받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으니 평소 위층으로 올라가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 박강현과 한 방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소율은 크게 안도했다.
  •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녀는 이제 막 대학에 가게 된 소녀였고, 비록 결혼을 하기는 했지만 방금 알게 된 남자와 동침을 할 준비 역시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 눈앞의 자상해 보이는 모습의 어른을 바라보던 안소율은 박강현이 그녀를 이모라고 불렀던 것이 생각나 자신 역시 그 호칭을 사용했다.
  • “알겠어요, 이모님. 고맙습니다. 저는 안소율이라고 해요. 그냥 이름으로 부르시면 돼요.”
  •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모라는 말에 김미진은 조금 놀란 듯한 눈치였다.
  • 평소 그녀를 이모라고 부르는 사람은 오직 박강현뿐이었고, 다른 사람들과 박강현의 친구들은 공손하게 김 집사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 이에 김미진의 표정이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 박강현이 지시한 것들이 생각난 그녀는 안타까운 듯 입을 열었다.
  • “소율 아가씨, 도련님께서 지시하신 것들이 있는데… 일단 오늘은 거실을 정리하라고 하셨고, 앞으로 도련님의 의식주행은 아가씨께서 책임지라고 하셨습니다.”
  • 아직 성인도 아닌 것 같이 보이는 소녀에게 오자마자 이 큰 저택을 청소하라고 시킨다는 건 순전히 일부러 괴롭히기 위함이었다.
  • 하지만 안소율은 그 어떤 불만도 없이 기운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습니다. 열심히 할게요.”
  • 김미진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갔다.
  • “그럼 짐들 내려놓고 따라오세요. 저택 상황에 대해 알려드릴게요. 그리고 일부 기계들의 사용법도 알려드리고요.”
  • 가난한 집안에서 나고 자란 안소율에게 이곳의 많은 전자기기들은 이제껏 본 적도 없는 것들이었다.
  • 김미진은 참을성 있게 그녀에게 이것저것 알려주었고 그녀는 김미진의 선의를 느낄 수 있었다.
  • 마지막으로 안소율은 김미진을 향해 진지하게 허리 숙여 감사를 전했다.
  • “정말 감사합니다.”
  • 착하고 순진해 보이는 안소율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진 김미진은 관례를 깨고 그녀에게 자신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 안소율에게 이후 모르는 것이 있으면 자신에게 전화하라고 말한 뒤, 김미진은 날이 곧 어두워질 때가 되어서야 떠나갔다.
  • 안소율이 자신의 짐들을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왔을 때, 박강현은 이미 위층으로 올라간 뒤였고 저택은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난장판이 되어있는 거실뿐이었다.
  • 2박 3일간의 긴 여정에 안소율은 이미 많이 지쳐있는 상태였다.
  • 하지만 한 가지 일을 할 때마다 박호진에게 입은 은혜를 조금씩 갚는 것이라는 생각에 그녀는 순간 다시 기웃이 솟는 것만 같았다.
  • ‘은혜를 갚자, 은혜를 갚아야 해! 청소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