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를 먹고 난 후에도 박강현은 여전히 외출하지 않고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고 쉬었다. 왠지 컨디션이 좋지 않은 듯했다.
한편, 안소율은 온 몸이 흙투성이인 데다 열로 인해 식은땀까지 나 당장 씻고 싶었다.
그러나 찬물로 샤워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병날까 봐 두려운 게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아프기라도 하여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는 게 싫었을 뿐이다.
안소율이 천천히 박강현의 곁으로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강현 씨, 저… 뜨거운 물 나오는 법 좀 알려 주면 안 돼요?”
박강현은 잠에 들지 않았지만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를 무시하는 듯한 박강현의 태도에 안소율은 더는 말할 수가 없었다.
활발하고 명랑한 편인 안소율도 남자랑 단둘이 지내는 건 처음이라 무척 어색했다.
그래서 그녀는 박강현이 무시하자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안소율은 욕실에서 김미진에게 전화를 걸어 물으며 물을 받았다.
그러다 곧 자신이 받은 물이 차가운 물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안소율은 창피함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 진짜 너무 멍청한 거 아니야? 전화로도 말귀를 알아듣지 못해 번거롭게 이모님이 여기 오시게 만들고.’
욕실에서 김미진을 기다리고 있던 안소율은 별안간 박강현이 그녀의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박강현은 안소율이 욕실에 서 있는 것을 보고도 서슴없이 욕실로 들어왔다.
그는 항상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들 특유의 짜증과 예민함을 갖고 있었다. 그가 안소율의 방에 온 이유는 어젯밤에 안소율이 난초를 심는 것을 보며 왜 자신의 마음이 차분해졌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욕조에 담겨있는 찬물을 보고 불현듯 박강현의 눈빛이 차가워지며 비아냥거렸다.
“허, 일부러 찬물로 샤워해서 병 나고는 내 앞에서 불쌍한 척 한 거야? 가식 쩌네.”
안소율은 맞는 건 참을 수 있어도 억울한 건 도저히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 정색하며 해명했다.
“저 그런 적 없어요! 전 단지 조작법을 몰라서 그런 것 뿐이에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강현은 레버를 핸드 샤워기로 전환해 버렸다. 그 순간 차가운 물이 안소율의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렸다.
깜짝 놀란 안소율은 급히 손을 들어 눈을 가리고는 화를 내며 말했다.
“박강현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박강현은 마치 차가운 독사 같이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찬물로 샤워하는 거 좋아하잖아. 샤워 잘 하라고 도와주고 있는데, 왜?”
차가운 물이 옷을 적시며 몸에 달라붙어 안소율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박강현은 악랄한 대마왕 같았다.
그러나 안소율도 순순히 당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박강현에게 돌진해 박강현의 손에 있던 핸드 샤워기를 빼앗으려고 했지만, 키 차이로 인해 팔이 안 닿자 아예 박강현을 세게 밀어 그를 자빠뜨렸다.
박강현의 뒤가 바로 차가운 물이 반쯤 담겨있는 욕조라 그는 욕조에 빠지기 전에 안소율을 덥석 잡아끌어 함께 욕조에 풍덩 빠져버렸다.
안소율은 열받았지만, 박강현에게 손을 대지는 않았다. 어제 그가 아팠던 자신을 돌봤던 게 떠올랐고 안소율은 그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박강현에 의해 욕조에 빠져 그의 가증스러운 눈길을 보고 있자니 안소율은 순간 열받아 박강현을 잡고 그의 어깨를 꽉 물어버렸다.
‘박강현 진짜 짜증 나.’
이때 김미진이 노크를 하며 들어왔다.
김미진은 눈앞의 광경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김미진의 기억 속에 박강현은 열 살 이후로 이렇게 초라해 보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박강현이 사람을 처리하는 방법은 잔인했는데 제일 잔인하다고도 할 수 있는 부분은 상대방에게 반격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이었다.
이렇게 직접 나서고도 초라한 몰골이 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두 사람이 바라보자, 김미진이 머뭇거리다 말했다.
“도련님, 전 소율 아가씨에게 온수 조작법을 가르쳐 드리러 왔어요.”
안소율은 몸이 다 회복되지도 않았는데 또다시 박강현에 의해 차가운 물에 빠져 몸이 뜨거워졌다, 차가워졌다 하자 억울한 마음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쳐 올랐다.
안소율이 울먹거리며 말했다.
“박강현 씨, 저도 다른 사람이랑 사는 거 처음이에요. 전 그저 강현 씨를 지켜주고 강현 씨한테 잘해주고 싶어서 그런 건데 혹여나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면 알려주면 되잖아요. 그러면 안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