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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복수

  • 병실 안은 고요했다.
  • 오직 수액 펌프가 일정한 간격으로 내는 작은 작동음만이 정적을 깨고 있었다.
  • 구서우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작은 얼굴은 열로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팔에는 링거 바늘이 꽂혀 있었다. 가느다란 수액 줄은 마치 아이를 간신히 붙잡고 있는 마지막 생명줄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 구현수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늦췄다. 침대 곁에는 구서진이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마치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진 석상 같았다.
  • "회장님."
  • 구서진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 밖으로 걸어 나갔고, 구현수도 곧바로 뒤를 따랐다. 문이 조용히 닫히자 복도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 "인현수 선생님 쪽은 소식 있나?"
  • "연락은 닿았습니다. 하지만 진료 요청은 거절하셨습니다."
  • 잠시 정적이 흘렀지만 구현수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 "대신 현재 행방은 파악했습니다. 지금 삭주성으로 오고 있는 중입니다. 이곳에 선생님께 중요한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내일 오후쯤 도착할 예정입니다."
  • 구서진의 눈빛이 깊어졌다.
  • "내가 직접 간다."
  • 짧은 한마디였지만 복도의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 구현수는 잠시 멈칫했다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 "알겠습니다."
  • 소문대로 인현수가 쉽게 움직이지 않는 인물이라면 누구를 보내도 부족할 것이다. 결국 구서진이 직접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 ……
  • 문 씨 가족의 집.
  • 저녁 식사가 끝난 뒤였다.
  • 차도현이 밖에서 돌아오자 서하은은 손에 들고 있던 컵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 "엄마, 지호야. 나 잠깐 다녀올 일이 있어."
  • 장은미는 무언가 말하려다 끝내 입을 다물었고, 문지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 마당을 스치는 밤바람에는 제법 서늘한 기운이 실려 있었다. 집 밖으로 나온 서하은이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말해."
  • 차도현의 표정은 무겁게 굳어 있었다.
  • "확인했습니다. 박성웅입니다."
  • 그 이름이 나오자 서하은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 "문지호 씨의 약혼녀는 그의 형편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결국 박성웅에게 넘어갔고, 문지호 씨는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장면을 보고 찾아가 따지다 몸싸움이 벌어졌습니다."
  • 차도현은 잠시 숨을 골랐다.
  • "박성웅은 사람들을 불러 문지호 씨의 다리를 부러뜨렸고, 집 마당까지 전부 난장판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도 지금은 박성웅의 약혼녀가 됐습니다."
  • 밤공기 속에서 서하은의 손가락 마디가 천천히 소리를 냈다.
  • 뚝.
  • 뚝.
  • "어디 있어?"
  • "클럽에 있습니다."
  • ……
  • 밤은 더욱 깊어졌다.
  • 클럽 VIP룸 안은 벽이 울릴 만큼 큰 음악 소리로 가득했다.
  • 박성웅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양옆에 여자를 끼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 냄새와 짙은 향수 냄새가 방 안을 뒤섞었고, 그는 세상에 자신을 신경 쓰게 할 일 따위는 아무것도 없다는 듯 거침없이 웃고 있었다.
  • "너 진짜 나쁘다."
  • 여자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몸을 기대자 박성웅은 피식 웃었다.
  • "나빠? 너 이런 거 좋아하잖아."
  • 그가 여자의 입술에 키스하려던 순간.
  • 쾅!
  • 문이 거칠게 걷어차이며 열렸다.
  • 순간 룸 안의 음악을 제외한 모든 움직임이 멎었다.
  • 박성웅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문 앞에 선 여자를 보는 순간 표정이 달라졌다. 짜증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노골적인 흥미가 눈빛에 번졌다.
  • "오. 이거 신선한데?"
  • 그는 느긋하게 몸을 일으키며 그녀를 훑어봤다.
  • "너 누구야?"
  • 서하은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를 바라봤다.
  • "박성웅?"
  •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 "누가 찾아왔느냐에 따라 다르지."
  • 시선은 한순간도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 차도현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는 이미 박성웅의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서하은이 막지 않았다면 저 남자는 지금쯤 바닥에 쓰러져 있었을 것이다.
  • "장갑입니다."
  • 서하은은 장갑을 받아 천천히 손에 끼웠다. 그리고 다시 박성웅을 바라봤다.
  •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 박성웅의 취기가 절반쯤 달아났다.
  • "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
  • "문지호는 내 동생이야."
  • 그제야 박성웅의 얼굴이 굳어졌다.
  • "...서하은?"
  • 그는 그녀를 알아봤다.
  • "너, 감옥에 있었잖아."
  • 서하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 박성웅은 비웃듯 웃으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 "동생 편 들어주러 왔냐? 맞을 짓을 했으니까 맞은 거지. 처맞고도 남 탓이나 하는 거냐?"
  • 그는 손으로 자신의 뺨을 툭툭 두드렸다.
  • "자. 여기 쳐 봐. 난 안 피한다."
  • 서하은은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 "...네가 원하는 대로."
  •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의 몸이 움직였다.
  • 너무 빨랐다.
  • 박성웅은 웃음조차 거두지 못했다.
  • 콰직!
  •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콧등뼈가 산산이 부서졌다.
  • 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박성웅의 몸이 뒤로 날아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손가락 사이로 피가 쏟아져 내렸고, 그제야 그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 "...아아악!"
  • "이... 이년이!"
  • 그는 피투성이 얼굴로 악을 썼다.
  • "죽여 버리겠어!"
  • 서하은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깨진 유리 조각을 밟을 때마다 발밑에서 잘게 부서지는 소리가 울렸다.
  • "그래?"
  • 그녀는 그대로 발을 들어 그의 다리를 힘껏 내리밟았다.
  • 콰드득.
  • 이번에는 훨씬 둔탁한 소리와 함께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 박성웅의 비명은 이미 사람의 목소리라고 하기 어려웠다.
  • "그만둬——!"
  • 하지만 이미 늦었다.
  • 서하은은 발에 더욱 힘을 실었고, 버티지 못한 뼈는 뒤틀리며 산산이 부서졌다.
  • "아아악——!"
  • 이번 비명은 아까보다 훨씬 더 날카롭고 처절했다.
  • 서하은이 발을 떼자 박성웅의 두 다리는 이미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망가져 있었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얼굴에서는 핏기가 완전히 가셔 있었다.
  • 서하은은 말없이 그를 내려다봤다.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 "이걸로 끝이야."
  • 박성웅은 이를 악물고 그녀를 노려봤다. 눈에는 증오가 가득했지만 입술만 바르르 떨릴 뿐,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그때 룸 문이 열리며 한나영이 안으로 들어왔다. 문턱에서 걸음을 멈춘 그녀는 처참하게 망가진 박성웅의 다리와 피범벅이 된 얼굴을 번갈아 바라봤고, 순식간에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야?!"
  • "나."
  • 서하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얼음장처럼 차가운 한마디에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 한나영은 홱 고개를 돌렸다. 서하은을 알아본 순간 놀람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 "서하은?! 미쳤어?!"
  • "내 동생 다리를 부러뜨렸기에 나도 그의 다리를 부러뜨렸을 뿐이야."
  • 한나영은 망설임도 없이 쏘아붙였다.
  • "걔가 자초한 일이잖아."
  • 방 안은 다시 싸늘한 정적에 휩싸였다.
  • "문지호는 자기한테 줄 수 있는 건 전부 다 줬어. 그런데 네 대답이 고작 그거야?"
  • 한나영은 비웃음을 흘렸다.
  • "걔한테 뭐가 있는데? 돈도 없고 미래도 없잖아. 나랑 결혼해서 뭘 해줄 수 있는데?"
  • 서하은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 예쁘긴 했다.
  • 하지만 문지호에 비하면 한참 부족했다.
  • 편을 드는 게 아니었다. 그건 그저 사실이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문지호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 "뭐가 웃겨? 내 말 틀렸어?"
  • 한나영은 턱을 치켜들며 말을 이었다.
  • "내 약혼자는 달라. 돈도 있고, 회사도 있고, 여자가 원하는 게 뭔지도 알아. 네 동생은? 변변한 가방 하나 제대로 못 사 주잖아."
  • 그녀가 내뱉는 말에는 한 치의 숨김도 없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
  • 서하은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살기를 억누르며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여자들을 한 번 훑어본 뒤 다시 한나영을 바라봤다.
  • "보이지? 저 사람이 네 약혼자야. 그런데도 저기서 다른 여자들이랑 놀아나고 있잖아."
  • "그래서?"
  • 한나영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 "난 상관없어. 난 그 사람이면 돼."
  •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의 눈빛은 아주 잠깐 흔들렸다.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애써 외면하고 있을 뿐이었다.
  • 돈.
  • 지위.
  • 그리고 자신이 꿈꾸던 삶.
  •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끝까지 놓지 못하는 것이었다.
  • 서하은의 눈빛은 완전히 차갑게 식어 있었다.
  • "좋아."
  • "오늘 네가 한 선택, 똑똑히 기억해."
  • 서하은의 목소리는 차갑고 담담했다.
  • "넌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야. 오늘 네가 내뱉은 말 한마디도, 네가 내린 모든 선택도. 전부."
  •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을 이었다.
  •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야."
  • 서하은이 원하는 것은 잠깐의 고통이 아니었다. 평생 가슴에 박혀 아무리 애써도 지워지지 않을 후회였다.
  • "가자."
  • 그녀가 차도현을 향해 짧게 말한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룸을 빠져나갔다.
  • 등 뒤에서는 한나영의 날카로운 고함이 끝까지 따라붙었다.
  • "서하은! 거기 서!"
  • "치안대에 신고할 거야! 이번엔 감옥에서 평생 썩게 만들어 주겠어!"
  • 하지만 서하은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 차도현은 한 걸음 뒤에서 그녀를 따르다가 잠시 고개를 돌려 한나영을 바라봤다.
  • 치안대에 신고한다고?
  • 정말 그런 게 통할 거라고 믿는다면...
  • 그녀는 아직도 자신이 어떤 사람을 적으로 돌렸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