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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나한테 웃어주지 말아요, 감당 안되니까

  • “그럼요. 저랑 엄마랑 언니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잖아요. 제가 엄마랑 언니를 돕지 않으면 누굴 돕겠어요? 아빠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아빠의 그 혼외자한테 남겨줄 것들이라는 건 저도 다 알고 있어요.”
  • 안효은은 진심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웃어 보였다.
  • “엄마가 여기 사인하시면 제가 꼭 엄마를 도와 언니를 다시 돌아오게 할게요.”
  • 정말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다. 안지윤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녀가 세운 계획들은 전부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 좋은 구경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 조희연이 서류에 사인하자 안효은은 곧바로 미련 없이 떠나갔다. 방을 나서기 전 그녀는 조희연을 향해 말했다.
  • “엄마, 그래도 언니한테 옷가지들을 좀 보내주시는 게 좋겠어요. 그리고 며칠간 지낼 곳을 찾아주시는 게 어때요? 아무래도 돌아오게 하는 것도 바로 되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 그녀에게 바깥세상이 얼마나 호락호락하지 않은지 겪어보도록 해야 안 씨 가문으로 돌아오는 것이 더 간절해질 터였다.
  • 조희연은 닫혀버린 문을 한참 동안 뚫어져라 바라보다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안지윤이 돌아온 뒤 다시 방법을 대어 안효은에게 넘겨준 것들을 다시 되찾아올 생각을 하고 있었다.
  • 안효은을 대신해 그 사업들을 관리해 준다는 명분이라면 결국에는 다시 자신의 손에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다.
  • 그것들은 전부다 안지윤에게 물려줄 것들이었기에 안효은에게 줄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 안효은 역시 당연하게도 이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도 따로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 후일을 도모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 안 씨 가문을 떠나기 전, 그녀는 안지윤의 방을 찾았다. 이 방이야말로 진정한 부잣집 아가씨가 머물 것 같은 방이었다.
  • 반면에 그녀의 방은 그저 평범한 방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 방에서 몇 가지 물건들을 챙겼다.
  • 하지만 방을 나서려니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오르는 기분에 그녀는 몇백만 원 상당의 다기 세트 몇 개를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 그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
  • 시끄러운 소리에 방으로 들어온 고용인 아주머니 두 명이 안효은을 발견하고는 물었다.
  • “아가씨, 무슨 일이세요?”
  • 이에 그녀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중충하던 표정을 밝게 풀며 웃어 보였다.
  • “제가 실수로 언니 물건들을 떨어뜨려서 깨져버렸네요. 아주머니들이 청소 좀 해주세요.”
  • 그녀는 몸을 돌려 방을 나서기 전 다시 고개를 돌려 두 아주머니를 향해 말했다.
  • “그리고 이건 비밀로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언니 물건을 깨뜨렸다는 걸 엄마가 알게 되면 절 때리실 거예요.”
  • 안효은이 다시 걸음을 옮겨 방을 나서자 두 아주머니들이 입을 열었다.
  • “정말 불쌍하다니까. 아빠한테 혼외자가 있는 건 그렇다 쳐도 엄마한테도 사생아가 하나 있다니 말이야. 그러니까 사모님께서 이제껏 그 양녀를 그렇게나 아끼셨던 거겠지. 알고 보니 친딸이었던 거잖아.”
  • “확실히 불쌍하긴 해. 아빠도 신경 써주지 않고 엄마도 사랑해주지 않으니 이도저도 아닌 거잖아. 이제껏 어떤 생활을 해오셨던 건지 모르겠다니까.”
  • 안효은은 멀리 가지 않고 있었다. 청력 또한 좋았기에 그녀는 그들의 대화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 ‘불쌍한가? 불쌍하지. 그들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까? 그럴 리가 없잖아.’
  • 고용인들도 전부 다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공교롭지 못하게도 그녀가 그들의 마음속에 그다지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을 뿐이었다.
  •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그들에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불쌍하게 여겨주는 것이 좋았다. 그녀는 그렇게라도 누군가가 자신을 불쌍히 여겨주기를 바랐다.
  • ……
  • 그날 저녁, 한 고급 클럽. 안효은은 소파에 앉아 손에는 술잔을 든 채 미소 지었다. 그런 그녀의 반대편 소파에도 스마트한 차림새의 한 여자가 앉아있었다.
  • “무슨 뜻이죠?”
  • 그녀의 이름은 문희정으로, 반년 전 강에 뛰어들어 자살하려던 그녀를 안효은이 살린 적이 있었다.
  • 그녀가 그런 선택을 했던 이유는 사업에 실패해 자금줄이 끊겼기 때문이었다.
  • 안효은은 비록 아껴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자신을 아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미친 듯이 돈을 모았었다.
  • 지난 수년간 그녀가 모아둔 돈을 꽤 큰 액수였고 당시 그녀는 그 돈을 전부 다 이 여자에게 주었던 것이었다.
  • ‘그때의 난 무슨 생각으로 그랬던 걸까? 그 많은 돈을 말이야!’
  • 심지어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았던 그 바보 같은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인 것에 안효은은 차가운 헛웃음을 터뜨렸다.
  • “그때 당신이 저에게 주었던 돈 전부를 다시 돌려드릴 수 있어요.”
  • 문희정은 이 소녀가 전에 만났을 때와는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떤 점이 다른지 묻는다면 딱히 대답할만한 말은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 “돌려주겠다고요? 당신은 나한테 목숨도 하나 빚졌죠. 그건 어떻게 돌려주실 건데요?”
  • 안효은이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었다.
  • “뭘 원하시죠?”
  • 문희정은 조금 화가 난 듯했다.
  • “당신을 원해요.”
  • 말을 내뱉은 안효은이 잔에 담긴 술을 들이켰다. 잔 속의 술을 다 마신 뒤에야 그녀는 지금의 몸은 쉽게 취하는 체질이라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것이 생각났다.
  • 아마도 강소원으로 살면서 그 습관들이 몸에 배어 잠시 잊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 “뭐라고요?”
  • 문희정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의 부하들이 발끈하며 물었다.
  • “걱정 마세요. 난 그저 당신 자체를 원하는 것이지 당신의 마음이나 당신의 몸을 원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난 당신이 날 위해 일해줬으면 좋겠어요. 내 부하가 되는 그런 거요.”
  • 안효은은 술 내음이 섞여있는 숨을 내뱉고는 말을 이어갔다.
  • “난 지금 당신이 은혜를 갚기를 원해요. 이 정도면 너무 과한 요구는 아니잖아요?”
  • “전에는 필요 없다고 하셨잖아요.”
  • 문희정은 안효은의 의중을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 “전에 필요 없다고 했던 건 당신을 시험해 본 거였어요. 그런데 당신이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정말 은혜를 갚지 않을 줄은 몰랐던 거죠. 당신은 의리 같은 건 없는 건가요?”
  • 안효은은 문희정더러 술을 따르라는 듯 들고 있던 잔을 흔들어 보였다.
  • “꿈도 야무지시군요. 저희 대표님이 당신 말을 들을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어린 아가씨가 집에서 얌전히 시집갈 날이나 기다리고 있을 것이지, 무슨…”
  •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말을 뱉은 사람의 머리를 향해 술잔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곧이어 안효은의 발길질이 이어졌다.
  • 십분 뒤, 안효은은 손목을 풀며 밖으로 걸어 나왔다. 방 안에는 네다섯 명의 남자들이 쓰러져 있었고 문희정은 기꺼이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 안효은이 고개를 돌려 그런 그녀를 향해 웃어 보였다.
  • “걱정 말아요. 날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
  • 예쁘장한 이 소녀를 바라보며 문희정은 마음 한편이 서늘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그토록 포악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 방안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그래도 아직 쓸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아마 그들을 아예 병신으로 만들어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그녀는 정말이지 모질었고, 한치의 자비도 없었다. 하지만 문희정은 확실히 그런 그녀에게 목숨을 하나 빚졌으니 굳이 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 ……
  • 한 룸 앞을 지나치던 안효은은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돌려 문희정을 보낸 뒤 자신은 룸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 이에 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들 쉽게 건드려서는 안 될 사람들인 것을 발견한 문희정이 그녀를 설득해 데리고 나가려 했지만 안효은은 이미 룸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 룸 안으로 들어가 한 남자의 다리 위에 앉아버리는 그녀의 모습에 문희정은 그녀가 미친 것은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 그것도 골랐다는 사람이 하필이면 제일 무서운 남자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귓가에 안효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착한 오빠, 며칠 못 봤을 뿐인데 강산이 변한 것 같은 느낌이네요.”
  • 그 사람은 바로 윤시우였다.
  • 그의 옆에는 다른 사람들이 데려온 미녀들이 그에게 달라붙으려 하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윤시우의 얼굴에는 분명하게 냉소가 드러나 있었다.
  • 안효은이 꽤나 의기양양해서는 그를 대신해 성가신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이었다.
  • 하지만 그의 무릎 위에 앉은 것은 절대적으로 예상에는 없던 일이었다. 그녀의 몸은 취해있었고 전혀 말을 듣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 하지만 그렇게 말한다고 그가 그 말을 믿을지 말지는 모를 일이었다.
  • ‘아마 믿지 않겠지. 상관없어. 안 믿으면 말지 뭐.’
  • 그녀는 기세를 몰아 윤시우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 자세는 말 그대로 야릇하기 그지없었다.
  • 이에 문희정은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이 클럽은 그녀의 것임에 틀림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그 누구와도 척을 지고 싶지 않았다.
  • 하지만 문희정 역시 의외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윤시우의 표정이 조금 풀어지더니 그가 입을 열었다.
  • “속담을 정확하게 배우지 못했으면 아무 곳에나 써먹지 마.”
  • “하지만 오빠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표현하고 싶었는걸요. 그리고 저 공부 잘한다고요.”
  • 그녀는 취기가 도는지 윤시우의 가슴에 기댔다. 그리고는 윤시우의 귓가에 나직이 말했다.
  • “이번에는 내가 오빠를 도와줬죠. 오빠가 저번에 날 도왔으니 깔끔하게 정산된 거네요!”
  • ‘정산? 너 때문에 나에 대해 이상한 소식들이 퍼져나가지 않았다면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나한테 여자를 들이밀었겠어? 지금의 이런 상황이 생겼겠냐고?!’
  • 윤시우는 단숨에 안효은의 허리를 잡아 자신의 무릎 위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있던 그녀를 돌려 아예 자신을 마주 본 채 올라타고 있는 자세로 만들었다.
  • 이에 안효은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의 놀란 표정이 윤시우는 꽤 만족스러운듯한 눈치였다.
  • 또한 이 소녀에게 함부로 남자를 자극한 후과가 얼마나 심각한 지도 알게 했다는 것도 말이다.
  • 하지만 곧이어 그의 귓가에 안효은의 한마디가 들려왔다.
  • “나한테 웃어주지 말아요, 감당 안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