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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내 친딸이에요

  • 하지만 나현준은 그 말을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럼에도 안지윤이 그를 잡고 있던 터라 딱히 화를 내지도 않았다. 이에 안효은이 팔짱을 끼며 순진한 척 웃음 지었다.
  • “현준 오빠는 여전히 이렇게나 언니를 신경 써주네. 부러운걸.”
  • “이상한 소리 하지 마, 효은아. 현준 오빠는 네 약혼자잖아.”
  •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는 안지윤의 모습은 가련하면서도 무기력해 보였다.
  • 안효은은 나현준을 쳐다보았다. 나현준에 대해 어쩌면 아무것도 몰랐던 어린 날의 설렘은 아직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이라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 첫 번째 삶에서 안효은은 그와 그 어떤 감정이 미처 생기기도 전에 죽어버렸으니 말이다.
  •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시 살아 돌아온 지금 그녀에게 그런 마음 같은 것이 생길리는 더더욱 없었다.
  • 이에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안지윤과 나현준을 바라보았다.
  • “혹시 모르지!”
  • “애매모호하게 말하지 마. 네가 제 발로 다른 남자의 침대에 올라간 일은 나도 이미 알고 있어. 넌 우리 나 씨 집안에 시집 올 생각 하지 마.”
  • 나현준의 말투는 불친절했고 불쾌한 기색이 가득했다.
  • 그는 말을 마친 뒤 이내 고개를 돌려 다정하게 안지윤을 데리고 떠나갔다.
  • 안효은은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어떠한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러다 뒤돌아선 그녀를 찾아온 집사가 그녀를 안상진에게로 데려갔다.
  • 하지만 다시 살아난 뒤 처음으로 할아버지와 마주하는 그녀를 맞이한 건 그녀를 향해 날아든 찻잔 하나였다.
  • 그나마 안효은이 재빨리 몸을 피한 것이 다행이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대로 머리에 맞아 상처가 크게 났을 터였다.
  • “네가 한 짓 때문에 장 씨 가문에서 찾아오기까지 했다. 너 도대체 어떻게 감히 장진호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거냐?”
  • 안상진은 화가 잔뜩 나서 탁자를 두드렸다.
  • “그 사람이 어떻게 됐는데요?”
  • 안효은은 자신이 뭘 한 것도 없는데 장진호가 뭐가 어떻게 됐다는 것인지 의문이었다.
  • “꼬시려다 안되니까 사람을 거의 병신이 될 정도로 걷어차놓고 어떻게 됐냐는 말이 나와?”
  • 안상진은 안효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장진호 같은 호색한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할 만큼 예뻤다.
  • “나 씨 가문에서도 그 일에 대해 이미 알게 되어 현재 다른 사람과의 혼약을 요구하고 있다. 잠시 후 내가 사람들 앞에서 현준이와 지윤이의 일에 대해 공표할 거다…”
  • “……”
  • 그 말을 들은 안효은은 조금은 의외의 상황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 그녀가 일부러 음모론을 제기하는 것이 아닌 이 모든 일들이 진행되어 가는 방향으로 보건대 누군가가 일부러 그렇게 만들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 ‘누구지?’
  • 그녀는 곱지 않은 눈빛으로 안상진을 쳐다보았다. 그런 그녀의 눈빛에 화가 난 안상진이 또 한 번 그녀를 향해 잔을 집어던졌다.
  • “그 눈빛은 뭐냐. 스스로 몸을 함부로 놀리고 다니더니 혼사가 엎어지니 누굴 탓한단 말이야?”
  • 안효은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일이 밖에는 어떤 식으로 소문이 퍼졌을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장 씨 가문에서 사실 그대로를 말했을 리가 없었다.
  • “내일 나와 함께 장 씨 가문에 찾아가자꾸나. 우리 쪽에서 뭐든 설명을 해야 해.”
  • 어찌 됐든 안상진은 일이 이지경이 되었음에도 자신의 손녀를 팔아먹고 싶은 것이었다.
  • 더군다나 장 씨 가문 쪽에서 말하기를, 안효은만 내놓는다면 아무것도 문제 삼지 않겠다고 했으니 말이다.
  • 비록 현재 대외적으로는 안 씨 가문에는 안효은이라는 딸 하나뿐이었지만 안상진은 자신의 그 한심한 아들 녀석이 밖에서 낳은 사생아들이 몇 명 정도 더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정 안된다면 그 몇 명을 가문으로 들이면 될 일이었다.
  • “네.”
  • 안효은은 속으로 냉소를 터트렸다.
  • ‘내일 이 일에 대해 신경 쓸 정신이 아직 있으시다면 말이에요.’
  • “나가. 꺼지라고. 널 보면 기분이 안 좋아. 이 한심한 것.”
  • ‘남자 하나 못 홀리다니. 정말이지 쓸모없는 것 같으니라고.’
  • 안효은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돌아서서 그 자리를 벗어났다.
  • 그렇게 안지윤의 방 앞을 지나치던 순간 일부러 엿들으려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마침 조희연과 안지윤이 함께 있는 모습을 발견한 그녀는 호기심에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 “이제 현준이랑 잘 지내야 해, 알겠니?”
  • 안지윤의 손을 쓰다듬어주는 조희연의 모습은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 “엄마, 만약 내가 현준 오빠랑 잘되면 효은이는 어떡해? 게다가 난 안 씨 집안의 친 자식도 아니잖아… 이래도 되는 걸까?”
  • 안지윤이 고개를 숙인 채 마음이 복잡한 듯 말했다.
  • “그 아이는 신경 쓰지 마.”
  • 조희연은 딱히 생각도 하지 않고 말을 뱉었다.
  • “친자식이고 아니고가 뭐가 중요해. 내 마음속에는 너를 걔보다 백배는 더 아낀단다. 그 애가 네 반만큼이라도 철이 들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 안효은은 몸을 틀어 벽에 기댔다. 담배라도 한 대 피고 싶었다.
  • ‘내가 철이 없다고? 어렸을 때부터 엄마한테 사랑받으려고 시키는 대로 했었지만 안지윤이 안 씨 집안에 들어온 뒤로는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말이야…’
  • 그보다도 그녀에게 기억이라는 것이 생겼을 때부터 지금껏 단 한 번도 조희연의 관심이 그녀에게 향했던 적이 없다고 하는 편이 오히려 더 맞을 것이다.
  • 이에 그녀는 호주머니를 만졌다.
  • ‘바보같이 잊고 있었어. 다시 살아났으니 담배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지. 아무것도 없다고!’
  • 결국 그녀는 정원으로 나가 잠시 숨을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 그리고 다시 돌아갔을 때, 안은 이미 소란스러운 상태였다. 이에 안효은은 기쁜 마음으로 사람들 사이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 촌스러운 차림의 부부가 처절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그들은 울면서 안지윤을 붙잡고 말했다.
  • “지윤아, 우리가 네 친엄마아빠야. 20년을 널 찾아다니다 끝내 이렇게 찾아냈는데, 어떻게 우리를 못 알아볼 수가 있어? 그때 우리가 널 버린 게 아니라 누군가가 널 납치해 간 거였다고.”
  • “입 닥쳐요. 경비원은 어디 있죠? 이 두 미친 사람들을 끌어내요.”
  • 그 두 사람이 자신의 친부모인지 아닌지는 안지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그녀는 인정하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 그녀는 안 씨 가문의 양녀 안지윤이어야만 했다. 지금 그녀가 누리는 모든 것들은 어렵게 얻은 것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친 부모 따위는 원하지 않았다. 설령 그런 존재가 있다고 하더라도 없게 만들어야 했다.
  • “아가, 네가 이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라는 거니.”
  • 두 사람은 숨이 넘어갈 듯 울부짖었다. 그 모습을 한쪽에서 지켜보고 있던 안효은은 마냥 우스웠다. 그녀가 고용한 사람들의 연기는 정말이지 훌륭했다. 그녀조차도 믿고 싶을 정도였다.
  • “지윤아, 그래도 네 친부모님이시고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이분들을 쫓아내는 건 아닌 것 같아.”
  • 나서서 말을 꺼낸 사람은 안 씨 가문과 사이가 꽤 좋은 재벌집 사모님이었다.
  • 이에 안효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안지윤을 감싸고돌던 조희연은 누군가 안지윤을 나무라는 소리에 잔뜩 화가 나서는 그 부부를 거칠게 밀어냈다.
  • 그 결과 조희연에게 밀쳐진 여자의 머리가 탁자 모서리에 부딪쳐 피가 흘러내렸다. 굉장히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 하지만 그 여자가 스스로 모서리에 가서 부딪치고는 미리 준비해 둔 피를 얼굴에 바르는 모습을 똑똑히 확인한 안효은은 잔뜩 신이 나있었다.
  • “사람 죽네, 사람 죽어.”
  • 그 여자는 바닥에 주저앉아 더욱더 큰 소리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에 조희연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큰 소리로 호통쳤다.
  • “지윤이는 내 딸이라고 했잖아요. 내 친딸이라고요. 그런데 당신들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죠? 유전자 검사 할 거면 하세요. 어디 한 번 해보시라고요!”
  • 하지만 말을 마친 그녀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너무 조용했던 것이다. 안 씨 가문과 나 씨 가문의 사람들도 다들 이곳에 몰려와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충격에 휩싸인 표정들이었다.
  • 한눈에 보기에도 자신들이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믿어지지 않는 듯한 모습들이었다.
  • 안지윤이 조희연을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도 이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 그러던 그때, 안상진이 다가가 조희연의 뺨을 내려쳤다.
  • “무슨 헛소릴 하는 거냐?”
  • 조희연은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번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었다.
  • 파일을 봤었던 안효은은 안지윤이 조희연이 사랑하는 남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하지만 안타깝게도 남자는 보잘것없는 집안 출신이었고, 범죄를 저지르고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 조 씨 가문에서는 안 씨 가문과의 계약결혼을 위해 태어난 안지윤을 고아원에 보냈고 조희연이 안 씨 가문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은 뒤 안지윤을 다시 데려온 것이었다.
  • 그렇다 보니 조희연은 안지윤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 그녀에게 보상해도 부족하다 느낄 터였다. 그렇기에 원래는 안효은의 것이었어야 할 것들까지도 전부 다 안지윤에게 준 것이었다.
  • ‘그럼 나는? 난 뭘 잘못한 건데?’
  • 안효은은 고개를 갸웃하며 어두워진 눈빛으로 멍청하게 서있는 안지윤과 조희연을 바라보았다.
  • 그녀는 거짓으로 감싼 양어머니와 양녀 사이의 깊은 정이라는 그 껍데기를 찢어발길 생각이었지만 또한 그들이 영원히 그저 양어머니와 양녀의 관계일 수밖에 없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그녀의 것은 그녀가 갖지 않더라도 아무나 주워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 “지윤 언니가 괜히 친언니 같이 느껴졌던 게 아니었네요. 알고 보니 진짜 내 친언니였던 거잖아요.”
  • 안효은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다가가 다소 긴장한 듯한 조희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그 한마디로 인해 안색이 바뀌어버린 안상진의 모습도 보게 되었다.
  • 이에 안효은은 하마터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린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