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효은의 한심한 아버지는 그제야 마지못해 나와 상황을 정리하고 손님들을 먼저 보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난동을 피우던 그 두 사람도 이미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심기가 불편한 안상진은 집안의 모든 잔들을 다 집어던질 기세였다. 이에 안효은은 가볍게 혀를 차며 짐짓 생각해 주는 척 그를 설득했다.
“할아버지, 화내지 마세요… 아니면 우선은 언니더러 안 씨 가문을 떠나 있으라고 하는 게 어떠세요?”
“나가라고 해. 지금 당장 꺼지라고. 그리고 영원히 안 씨 가문에는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해.”
안상진의 한마디에 안지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안효은은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삐죽였다. 아래를 향해 내리깐 두 눈이 그녀의 감정들을 잘 숨겨주고 있었다.
안상진의 말은 안 씨 가문에서는 절대적이었다. 그의 한마디에 누구도 감히 반기를 드는 사람은 없었다.
조희연은 울다 기절해 버렸고 안지윤은 그렇게 맨몸으로 집밖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사람들에 의해 끌려나가던 안지윤은 마침 고개를 돌린 채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안효은을 발견했다. 이에 그녀는 흠칫 놀라며 다시 찬찬히 보려 했지만 안효은은 이미 고개를 돌린 뒤였다.
하지만 안효은이 가장 의외라고 느꼈던 것은 그녀의 한심한 아버지의 반응이었다. 다른 사람의 딸을, 그것도 자신의 아내가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키워왔다는 사실에도 그는 조금도 분노하고 있지 않았다.
“너도 썩 나가.”
안상진이 안효은을 가리키며 말했다.
……
안효은은 기회를 엿보다 조희연을 찾아가 협력할 것에 대해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조희연의 방 문 앞에 다다랐을 때, 방 안에서는 부모님이 다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비록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두 사람이 어떠한 일로 인해 다투는 것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각자 살아가던 두 사람이었기에 안효은은 그들이 왜 다투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설마 자신의 한심한 아버지가 겉으로는 아내의 배신을 신경 쓰지 않는 척했지만 사실은 이미 질투를 느끼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말이다.
하지만 안효은은 실상 놀아나고 있던 것은 자신이었을 줄은 전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당시 내가 당신이 지윤이를 데려오는 걸 허락했을 때 나한테 뭘 약속했었는지 잊지 마.”
그가 조희연을 밀치며 사납게 말했다.
“당신의 그 사생아를 위해 안효은 그 계집애의 심장이 필요했던 것 아닌가요? 당신 마음속에는 그 천한 여자뿐이니까요.”
밀쳐진 조희연은 순간 발끈하여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알아둬요. 만약 우리 지윤이한테 무슨 나쁜 일이라도 생긴다면 당신과 그 천한 여자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도 무사할 생각 말아요.”
다른 말들은 딱히 안효은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 두 마디 만은 똑똑히 들었다.
그녀는 이제야 자신의 한심한 아버지가 왜 전혀 분노하지 않았던 것인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두 사람은 자신을 두고 거래를 했었던 것이었다.
‘좋아! 무슨 수로 내 것을 가져가는지 지켜보겠어.’
속상함 같은 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안효은은 저릿저릿한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몸의 모든 모공이 역겨움을 호소하고 있었다… 안효은은 끝내는 그저 옅은 미소를 짜내며 문을 두드렸다.
노크소리에 안에 있던 두 사람은 깜짝 놀란 듯했다. 문을 연 사람은 그녀의 한심한 아버지였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언제 온 거야?”
“방금이요! 아빠도 계셨네요. 전 엄마가 걱정이 돼서 살펴보러 온 거예요.”
안효은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어 보였다. 이에 그녀의 한심한 아버지는 간단히 대꾸하고는 제 발 저린 듯 떠나갔다.
방 안에 있는 조희연의 표정도 어딘가 부자연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눈물을 닦아내고는 몸상태가 좋지 않은 척하며 다시 침대로 돌아가 누웠다.
예전의 안효은이었다면 현재 창백한 조희연의 얼굴을 보고 마음 아파했겠지만 지금의 안효은은 달랐다. 그녀는 자신의 심장 부근을 어루만졌다.
‘그래… 차게 식어있네!’
마음이 켕기고 부자연스러웠던 것도 잠시뿐이었다. 조희연은 잠깐 사이에 이미 스스로를 납득시켰고 이내 다시 자신의 딸을 지키고자 하는 위대한 어머니로 돌아와 있었다. 다만 그녀가 보호하고자 하는 사람이 안효은이 아닐 뿐이었다.
“왜 왔어?”
안효은을 보자 안지윤의 안타깝던 모습이 생각난 조희연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엄마와 언니를 도와드리려고 왔어요. 전 언니가 이대로 쫓겨나게 하고 싶지 않거든요.”
‘그럼 재미없잖아. 양어머니와 양딸로 살겠다면 평생 그렇게 살아야지.’
안효은은 속상해하는 기색 하나 없이 조희연이 누워있는 침대 머리맡에 앉았다. 그 모습은 마치 다정한 모녀같이 보였다.
“네가 웬일로? 전에 내가 너더러 지윤이를 대신해 장 대표한테 가라고 했을 때는 죽어도 싫다고 했었잖아. 내가 수를 쓰지 않았다면 네가 거길 갔겠어?”
조희연은 안효은을 전혀 믿지 않았다. 예전이었다면 안효은은 이를 신경 쓰며 갖은 방법을 대어 스스로를 증명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딱히 상관없었다.
“그때는 지윤 언니가 내 친언니라는 걸 몰랐잖아요. 엄마가 왜 남을 도우려고 그렇게까지 하는 건지 그저 이상했었죠…”
안효은은 짐짓 잘 보이려는 듯 조희연에게 물을 따라다 주었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안지윤을 돕고자 한다는 안효은의 말은 믿지 않으면서도 안효은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에게 잘 보이려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던 조희연은 자연스레 안효은이 건넨 잔을 받아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너한테 무슨 방법이 있는데?”
“저한테 언니를 다시 안 씨 가문으로 돌아오게 할 방법이 있어요. 게다가 앞으로도 예전과 똑같은 대접을 받을 수 있죠.”
조희연이 물을 마신 것을 확인한 안효은은 무척이나 자상하게 물 잔을 다시 가져왔다.
“말해봐.”
조희연은 만약 안효은의 방법이 정말로 효과가 있다면 앞으로는 안효은에게 조금이나마 잘해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엄마의 작은 무언가가 필요해요.”
안효은이 손을 뻗어 제스처를 취했다.
“뭘 말이니?”
조희연의 말투는 꽤나 불친절했다.
‘대가를 요구하는 건 역시나 좋은 물건이 아니야. 우리 지윤이는 달라. 착하고 어른스럽고 다정하지.’
“엄마가 갖고 있는 사업들 중 몇 개를 저한테 주세요.”
‘내가 맨 입으로 도와줄 줄 알았나요?’
안효은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양도 서류를 꺼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생각도 하지 마. 그건 내가 지윤이한테 물려줄 것들이라고. 넌 어쩜 애가 그렇게 악독하니? 네가 지윤이 것을 빼앗아가면 지윤이는 아무것도 없어.”
그녀가 건넨 서류들을 본 조희연은 화가 난 듯 안효은을 밀어냈다. 그러자 그 충격에 안효은이 들고 있던 컵이 흔들리며 안에 담긴 물이 전부 조희연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이에 안효은은 당황한 척 급히 조희연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와 함께 약간의 어이없음이 드러나 있었다.
“엄마, 조심 좀 하시지 그러셨어요. 다 쏟아졌잖아요.”
그녀의 말은 무척이나 다정했지만 조희연은 그 속에서 서늘함을 느꼈다. 자신의 딸이 며칠 못 본 사이에 완전히 달라진 것 같았다.
“언니한테 주실 수 있죠. 하지만 저한테 주실 수도 있잖아요! 게다가 언니가 돌아오는 걸 제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엄마가 수를 써서 손에 넣은 언니의 혼사는 어떡하시려고요? 나 씨 가문에서 혼외자를 받아줄 것 같나요? 현준 오빠가 하겠다고 해도 나 씨 가문에서는 절대 안 된다고 할 거라고요.”
안효은은 조희연의 얼굴을 다 닦아준 뒤 종이를 더 가져다 자신의 손을 닦았다. 그 모습은 마치 살인을 마친 뒤 손을 닦는 동작 같이 보였다.
조희연의 마음속에는 시집을 잘 가는 것이 본인이 대단해지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했다. 이에 그녀는 복잡한 마음에 안효은의 말에 반박조차도 하지 않았고 이로써 안효은은 이전의 그 일이 조희연의 계획이었다는 것까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손 끝을 가볍게 두드렸다.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당신은 정말이지 모질군요! 둘 다 당신의 친 자식인데 어떻게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있을 수 있는 거죠? 아니면 그 손가락이 없어지면 아프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건가요?’
그녀는 조희연의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 손가락 중 하나를 잘라내어 아픈지 아닌지 조희연에게 느껴보라고 하고 싶었다.
“너 정말로 지윤이를 다시 돌아오게 할 방법이 있는 거니?”
만약 조금 더 시간이 있었다면 조희연도 무언가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녀는 도저히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에 그녀는 무척이나 조급해하고 있었다. 그녀가 진심으로 안지윤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안효은은 진심으로 조금은 부러워졌다.
누구나 그들을 진심으로 생각해 주는 사람이 하나쯤은 다 있는데 그녀는 영원히 혼자였다. 이에 그녀는 애정이나 증오와는 상관없이 그저 순수하게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