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효은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병원 침대 위에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눈부신 햇살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올려 비쳐드는 햇빛을 가렸다.
몸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그녀는 자신이 아직 살아있음을 느꼈다. 보아하니 어젯밤의 일이 환각은 아닌 듯했다.
그리고 그녀는 정말로 다시 살아난 것이었다. 이 몸이 열아홉 살이던 그때로 돌아온 것이었다.
마음이 놓이자 기억들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어젯밤의 그 응큼한 남자가 마음에 들어 했던 건 사실은 안 씨 가문의 양녀였다.
하지만 그녀의 친어머니가 양녀를 지키기 위해 약물로 그녀를 기절시킨 뒤 그 남자의 침대로 보낸 것이었다.
그리고 이 번은 그녀가 두 번째로 다시 얻은 삶이었다.
이 전 전 생에서, 그녀는 바로 그 주사기에 담긴 약물로 인해 죽음을 맞았었다.
하지만 죽은 뒤의 그녀는 40년 전의 한 강소원이라는 인물의 몸으로 되살아났고 강소원이 된 그녀는 많은 것들을 배웠다.
강소원으로서의 그녀의 삶은 남부러울 것 없는 꽤나 만족스러운 삶이었고 세상에서 노력으로 얻어내지 못할 것이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그녀는 결국 가장 가까운 사람의 손에 죽임을 당했고 산채로 땅속에 묻히게 되었다.
그렇게 강소원이 죽고, 다른 이들에게는 고작 몇 분 밖에 안 되는 시간 동안 그녀는 한 생애를 건너 또다시 처음의 안효은이 죽었을 때의 그 몸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두 번의 삶을 살았고, 두 번 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번 생에서는 더는 혈육의 정 따위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안효은의 복수를 할 생각이었고, 강소원의 복수 또한 할 생각이었다. 이에 그녀는 그 사람들이 좋기는 잘 살아있기를 바랐다. 그녀는 그들을 하나하나 짓밟아줄 생각이었다.
“정신이 들어?”
낮게 깔리 어른스러운 목소리였고, 말투는 다정했다. 그 목소리에 재빨리 일어나 앉은 그녀의 눈에 멀지 않은 곳 창가에 앉아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빛을 등지고 있는 남자는 반은 그녀를 향해있었고, 반은 햇살에 파묻힌 채로 들고 있는 파일을 들여다보던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 그녀를 향해 말했다.
늘씬한 체격에 흰 셔츠를 입고 넥타이까지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냉철한 CEO 같았다.
하지만 그 위에 걸치고 있는 긴 재킷과 그 재킷 위에 수놓아진 짙은 금색의 문양으로 인해 그 이미지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더욱이 의외였던 점은 그의 긴 머리였다. 등 뒤에 하나로 묶어 내린 긴 머리와 그의 어깨 위에 흐트러져있는 몇 가닥의 흰머리는 그저 그 모습만으로도 마치 그림 속의 귀공자 같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안효은은 눈앞이 환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의 얼굴은 말 그대로 그녀의 마음속 이상형 그 자체였다.
“전 안효은이라고 해요. 어젯밤에 절 구해주셔서 고마워요, 착한 오빠. 앞으로 전 오빠의 사람이에요.”
안효은은 잔뜩 신이 난 듯 미소 지었다.
“난 윤시우. 네 오빠는 아니고.”
윤시우가 드디어 고개를 들더니 들고 있던 파일을 내려놓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내 여자가 되겠다고?”
그는 안효은을 찬찬히 훑어보더니 말을 이어갔다.
“넌 안돼. 너무 어려.”
그 말에 안효은은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허리는 가늘고 다리도 꽤 늘씬했지만 유일하게 이 가슴만은…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그럼!”
자신의 가슴을 뚫어져라 내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에 의문을 갖고 있던 윤시우는 그녀의 그 한마디에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 그가 보고 있던 건 그녀의 파일이었다.
말하자면 재벌가 아가씨라고도 할 수 있었지만 그녀의 인생은 꽤나 파란만장했다. 이에 그는 친절하게 들고 있던 파일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앞으론 남자를 침대로 끌어들이지 마. 함부로 몸 위에 올라타지도 말고. 매번 그렇게 운이 좋을 수는 없을 테니까.”
그가 건넨 파일을 훑어본 안효은은 무언가 설명하고 싶었지만 파일의 내용을 본 그녀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파일 속에는 안 씨 가문에 관한 내용들이 담겨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부모님이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은 보통의 계약결혼으로 맺어진 부부였다.
하지만 그 속에 그토록 많은 역겹지만 또한 이용할만한 사실들이 있었을 줄은 그녀는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파일을 다 살펴본 그녀는 눈시울을 붉힌 채 윤시우를 바라보았다.
“제 뒷조사를 한 거예요?”
“내 부하들이 나한테 접근한 모든 사람들에 대해 뒷조사를 하지.”
그 말은 특별히 그녀에 대해서만 뒷조사를 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소녀가 어젯밤의 일에 대해 난리를 칠 것이라는 윤시우의 생각과는 달리 안효은의 입에서는 전혀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제 뒷조사를 한 게 어쩌면 다행이네요. 그렇지 않았다면 전 이렇게나 많은 일들이 있었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을 테니까요. 당신이 날 또 한 번 도와줬네요. 당신은 정말이지 내 생의 빛이에요…”
‘내 깜깜한 인생에 비쳐 들어와 나에게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준 사람.’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나중에 꼭 보답할게요.”
날 때부터 예쁘장한 얼굴이던 안효은이 동그란 두 눈을 올려 뜨며 자연스러운 홍조를 띠고 있는 눈꼬리로 그렇게 미소 지으니 정말이지 홀려버릴 것만 같았다.
정신을 차린 윤시우는 그런 자신이 우습기도 했다. 어린 소녀일 뿐인 그녀에게 홀려버리다니 말이다.
이내 그는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 그는 밖으로 나가자마자 차가운 얼굴로 등뒤에 있는 사람을 향해 말했다.
“사람을 시켜서 저 여자를 주시해.”
“왜 그러십니까? 저 소녀한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직접 안아 들고 병원에 오셨길래 그 소녀를 꽤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줄 알았는데.’
“검사 결과 소녀의 몸속의 약물에 문제가 있었다고 했었지. 해독제가 없이는 현재까지 살아있을 수 없는 약물이라고 말이야. 하지만 저 소녀를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지금까지 난 저 소녀에게 그 어떤 약도 준 적이 없어… 그런데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옷깃을 추스르던 윤시우는 목덜미의 상처가 건드려지자 가볍게 혀를 찼다. 왜인지 그녀에게 물린 곳이 중독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군요. 그래서 장진호 그 사람이 해독제를 복용하고도 아직까지도 위험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군요! 전 또 형님이 늦지 않게 그 소녀에게 해독제를 주신 줄 알았습니다.”
그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쳐 날뛸 때 보여줬던 몸놀림도 꽤 나쁘지 않았어…”
차 앞으로 걸어간 윤시우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병원 문 쪽을 한번 돌아보았다.
“알겠습니다. 제가 직접 지켜볼게요.”
그 사람이 윤시우를 위해 차 문을 열어주며 말을 이어갔다.
“형님, 누군가 형님이 여자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는 소문을 퍼트린 것 같던데, 처리해야 할까요?”
“필요 없어. 꽤 좋은 미끼가 되겠군. 던져두고 뭐가 낚이는지 지켜보자고.”
말을 마친 윤시우는 차에 올라탔고 그 사람은 차 밖에 남았다.
……
윤시우가 떠나가자 안효은의 얼굴에 드리워졌던 미소도 곧바로 사라졌다. 한껏 가라앉은 모습으로 그녀는 들고 있는 파일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이를 갈았다.
“저 안효은의 목숨을 당신들은 어떻게 갚으실 건가요?”
‘어머니, 안지윤, 그리고 안 씨 가문… 우리 천천히 놀아보자고요!’
……
7일 뒤, 안상진의 생일.
강남의 유명인사들과 고위급 인사들이 반 이상 모인 그 자리에 당연히 안효은도 빠질 리가 없었다. 이에 그녀는 그럴듯한 선물까지 챙겨 연회에 참석했다.
“지난 며칠간 어디 갔었던 거야? 나랑 엄마가 매일 같이 전화했는데…”
그곳에 모습을 드러낸 안효은을 발견한 안지윤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으며 꽤 괜찮은 언니인 척 말을 걸어왔다.
“내가 어디 갔었던 거냐고?”
검은색 드레스 차림의 안효은은 양갈래로 묶은 머리를 어깨 앞으로 넘긴 채 순진한 얼굴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미소 지으며 되물었다.
“언니가 그걸 몰라?”
자신이 그녀를 대신해 누군가의 침대로 보내진 사실을 그녀가 모른다는 것을 안효은이 믿을 리가 없었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어. 미안해. 다 나 때문이야. 하지만 나도 엄마를 말릴 수가 없었어. 넌 아직 모르겠지만, 너랑 장진호 씨의 일이 지금 소문이 퍼져서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어. 할아버지도 그 일로 인해 화를 내셨고. 널 대신해 설명을 하려다 나도 한 소리 들었어.”
안지윤이 눈물을 훔쳤다. 그 모습은 마치 그녀가 안효은보다 더 서러운 듯해 보였다.
다만 그녀의 말은 어떻게 들어도 그 일이 안효은이 사고를 쳤다는 뜻으로 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안효은이 이에 대해 미처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한 남자가 그녀를 밀어내며 말했다.
“너 또 지윤이를 괴롭히고 있는 거야?”
밀쳐진 안효은은 뒤로 몇 걸음 물러나 고개를 들어 앞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 남자는 자신의 약혼자였다.
‘어휴.’
그녀는 코를 매만졌다. 그리고는 스스로를 위해 무언가 설명하려 했지만 순간 안지윤이 그를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전 그저 효은이랑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효은이가 며칠째 집에 돌아오지 않아서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