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2화 넌 너무 어려

  • 안효은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병원 침대 위에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 눈부신 햇살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올려 비쳐드는 햇빛을 가렸다.
  • 몸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그녀는 자신이 아직 살아있음을 느꼈다. 보아하니 어젯밤의 일이 환각은 아닌 듯했다.
  • 그리고 그녀는 정말로 다시 살아난 것이었다. 이 몸이 열아홉 살이던 그때로 돌아온 것이었다.
  • 마음이 놓이자 기억들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어젯밤의 그 응큼한 남자가 마음에 들어 했던 건 사실은 안 씨 가문의 양녀였다.
  • 하지만 그녀의 친어머니가 양녀를 지키기 위해 약물로 그녀를 기절시킨 뒤 그 남자의 침대로 보낸 것이었다.
  • 그리고 이 번은 그녀가 두 번째로 다시 얻은 삶이었다.
  • 이 전 전 생에서, 그녀는 바로 그 주사기에 담긴 약물로 인해 죽음을 맞았었다.
  • 하지만 죽은 뒤의 그녀는 40년 전의 한 강소원이라는 인물의 몸으로 되살아났고 강소원이 된 그녀는 많은 것들을 배웠다.
  • 강소원으로서의 그녀의 삶은 남부러울 것 없는 꽤나 만족스러운 삶이었고 세상에서 노력으로 얻어내지 못할 것이 없을 것만 같았다.
  • 하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그녀는 결국 가장 가까운 사람의 손에 죽임을 당했고 산채로 땅속에 묻히게 되었다.
  • 그렇게 강소원이 죽고, 다른 이들에게는 고작 몇 분 밖에 안 되는 시간 동안 그녀는 한 생애를 건너 또다시 처음의 안효은이 죽었을 때의 그 몸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 두 번의 삶을 살았고, 두 번 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번 생에서는 더는 혈육의 정 따위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칠 생각이 없었다.
  • 그녀는 안효은의 복수를 할 생각이었고, 강소원의 복수 또한 할 생각이었다. 이에 그녀는 그 사람들이 좋기는 잘 살아있기를 바랐다. 그녀는 그들을 하나하나 짓밟아줄 생각이었다.
  • “정신이 들어?”
  • 낮게 깔리 어른스러운 목소리였고, 말투는 다정했다. 그 목소리에 재빨리 일어나 앉은 그녀의 눈에 멀지 않은 곳 창가에 앉아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 빛을 등지고 있는 남자는 반은 그녀를 향해있었고, 반은 햇살에 파묻힌 채로 들고 있는 파일을 들여다보던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 그녀를 향해 말했다.
  • 늘씬한 체격에 흰 셔츠를 입고 넥타이까지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냉철한 CEO 같았다.
  • 하지만 그 위에 걸치고 있는 긴 재킷과 그 재킷 위에 수놓아진 짙은 금색의 문양으로 인해 그 이미지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 더욱이 의외였던 점은 그의 긴 머리였다. 등 뒤에 하나로 묶어 내린 긴 머리와 그의 어깨 위에 흐트러져있는 몇 가닥의 흰머리는 그저 그 모습만으로도 마치 그림 속의 귀공자 같이 보였다.
  • 그리고 그의 얼굴은… 안효은은 눈앞이 환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의 얼굴은 말 그대로 그녀의 마음속 이상형 그 자체였다.
  • “전 안효은이라고 해요. 어젯밤에 절 구해주셔서 고마워요, 착한 오빠. 앞으로 전 오빠의 사람이에요.”
  • 안효은은 잔뜩 신이 난 듯 미소 지었다.
  • “난 윤시우. 네 오빠는 아니고.”
  • 윤시우가 드디어 고개를 들더니 들고 있던 파일을 내려놓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 “내 여자가 되겠다고?”
  • 그는 안효은을 찬찬히 훑어보더니 말을 이어갔다.
  • “넌 안돼. 너무 어려.”
  • 그 말에 안효은은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허리는 가늘고 다리도 꽤 늘씬했지만 유일하게 이 가슴만은…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 “좋아요 그럼!”
  • 자신의 가슴을 뚫어져라 내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에 의문을 갖고 있던 윤시우는 그녀의 그 한마디에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 그가 보고 있던 건 그녀의 파일이었다.
  • 말하자면 재벌가 아가씨라고도 할 수 있었지만 그녀의 인생은 꽤나 파란만장했다. 이에 그는 친절하게 들고 있던 파일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 “앞으론 남자를 침대로 끌어들이지 마. 함부로 몸 위에 올라타지도 말고. 매번 그렇게 운이 좋을 수는 없을 테니까.”
  • 그가 건넨 파일을 훑어본 안효은은 무언가 설명하고 싶었지만 파일의 내용을 본 그녀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 파일 속에는 안 씨 가문에 관한 내용들이 담겨있었기 때문이었다.
  • 자신의 부모님이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은 보통의 계약결혼으로 맺어진 부부였다.
  • 하지만 그 속에 그토록 많은 역겹지만 또한 이용할만한 사실들이 있었을 줄은 그녀는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 파일을 다 살펴본 그녀는 눈시울을 붉힌 채 윤시우를 바라보았다.
  • “제 뒷조사를 한 거예요?”
  • “내 부하들이 나한테 접근한 모든 사람들에 대해 뒷조사를 하지.”
  • 그 말은 특별히 그녀에 대해서만 뒷조사를 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소녀가 어젯밤의 일에 대해 난리를 칠 것이라는 윤시우의 생각과는 달리 안효은의 입에서는 전혀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 “제 뒷조사를 한 게 어쩌면 다행이네요. 그렇지 않았다면 전 이렇게나 많은 일들이 있었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을 테니까요. 당신이 날 또 한 번 도와줬네요. 당신은 정말이지 내 생의 빛이에요…”
  • ‘내 깜깜한 인생에 비쳐 들어와 나에게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준 사람.’
  •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나중에 꼭 보답할게요.”
  • 날 때부터 예쁘장한 얼굴이던 안효은이 동그란 두 눈을 올려 뜨며 자연스러운 홍조를 띠고 있는 눈꼬리로 그렇게 미소 지으니 정말이지 홀려버릴 것만 같았다.
  • 정신을 차린 윤시우는 그런 자신이 우습기도 했다. 어린 소녀일 뿐인 그녀에게 홀려버리다니 말이다.
  • 이내 그는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 그는 밖으로 나가자마자 차가운 얼굴로 등뒤에 있는 사람을 향해 말했다.
  • “사람을 시켜서 저 여자를 주시해.”
  • “왜 그러십니까? 저 소녀한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 ‘직접 안아 들고 병원에 오셨길래 그 소녀를 꽤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줄 알았는데.’
  • “검사 결과 소녀의 몸속의 약물에 문제가 있었다고 했었지. 해독제가 없이는 현재까지 살아있을 수 없는 약물이라고 말이야. 하지만 저 소녀를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지금까지 난 저 소녀에게 그 어떤 약도 준 적이 없어… 그런데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 옷깃을 추스르던 윤시우는 목덜미의 상처가 건드려지자 가볍게 혀를 찼다. 왜인지 그녀에게 물린 곳이 중독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 “그렇군요. 그래서 장진호 그 사람이 해독제를 복용하고도 아직까지도 위험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군요! 전 또 형님이 늦지 않게 그 소녀에게 해독제를 주신 줄 알았습니다.”
  • 그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 “미쳐 날뛸 때 보여줬던 몸놀림도 꽤 나쁘지 않았어…”
  • 차 앞으로 걸어간 윤시우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병원 문 쪽을 한번 돌아보았다.
  • “알겠습니다. 제가 직접 지켜볼게요.”
  • 그 사람이 윤시우를 위해 차 문을 열어주며 말을 이어갔다.
  • “형님, 누군가 형님이 여자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는 소문을 퍼트린 것 같던데, 처리해야 할까요?”
  • “필요 없어. 꽤 좋은 미끼가 되겠군. 던져두고 뭐가 낚이는지 지켜보자고.”
  • 말을 마친 윤시우는 차에 올라탔고 그 사람은 차 밖에 남았다.
  • ……
  • 윤시우가 떠나가자 안효은의 얼굴에 드리워졌던 미소도 곧바로 사라졌다. 한껏 가라앉은 모습으로 그녀는 들고 있는 파일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이를 갈았다.
  • “저 안효은의 목숨을 당신들은 어떻게 갚으실 건가요?”
  • ‘어머니, 안지윤, 그리고 안 씨 가문… 우리 천천히 놀아보자고요!’
  • ……
  • 7일 뒤, 안상진의 생일.
  • 강남의 유명인사들과 고위급 인사들이 반 이상 모인 그 자리에 당연히 안효은도 빠질 리가 없었다. 이에 그녀는 그럴듯한 선물까지 챙겨 연회에 참석했다.
  • “지난 며칠간 어디 갔었던 거야? 나랑 엄마가 매일 같이 전화했는데…”
  • 그곳에 모습을 드러낸 안효은을 발견한 안지윤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으며 꽤 괜찮은 언니인 척 말을 걸어왔다.
  • “내가 어디 갔었던 거냐고?”
  • 검은색 드레스 차림의 안효은은 양갈래로 묶은 머리를 어깨 앞으로 넘긴 채 순진한 얼굴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미소 지으며 되물었다.
  • “언니가 그걸 몰라?”
  • 자신이 그녀를 대신해 누군가의 침대로 보내진 사실을 그녀가 모른다는 것을 안효은이 믿을 리가 없었다.
  •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어. 미안해. 다 나 때문이야. 하지만 나도 엄마를 말릴 수가 없었어. 넌 아직 모르겠지만, 너랑 장진호 씨의 일이 지금 소문이 퍼져서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어. 할아버지도 그 일로 인해 화를 내셨고. 널 대신해 설명을 하려다 나도 한 소리 들었어.”
  • 안지윤이 눈물을 훔쳤다. 그 모습은 마치 그녀가 안효은보다 더 서러운 듯해 보였다.
  • 다만 그녀의 말은 어떻게 들어도 그 일이 안효은이 사고를 쳤다는 뜻으로 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 하지만 안효은이 이에 대해 미처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한 남자가 그녀를 밀어내며 말했다.
  • “너 또 지윤이를 괴롭히고 있는 거야?”
  • 밀쳐진 안효은은 뒤로 몇 걸음 물러나 고개를 들어 앞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 남자는 자신의 약혼자였다.
  • ‘어휴.’
  • 그녀는 코를 매만졌다. 그리고는 스스로를 위해 무언가 설명하려 했지만 순간 안지윤이 그를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 “아니에요. 전 그저 효은이랑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효은이가 며칠째 집에 돌아오지 않아서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