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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황자 생존기

폐황자 생존기

박광수

Last update: 2023-12-11

제1화 멍청이 황자의 몸에 들어왔는데 아바마마가 나더러 시를 지으라고 해?

  • “마마, 큰일이 났사옵니다!”
  • 천지가 얼어붙는 엄동설한 12월이었다.
  • 편전에서 쉰이 족히 넘어 보이는 늙은 내시가 초조한 얼굴로 보고를 올렸다.
  • 이준은 털이 달린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채, 우뚝 서서 몰아치는 찬바람을 맞고 있었다. 칼로 에이는 듯한 추위였다.
  • 그는 거위털처럼 내리는 눈꽃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준수한 얼굴은 약간의 창백한 빛을 띠고 있었다.
  • “양 총관(总管), 아바마마의 뜻은 오늘에 내가 시 모임에서 좋은 시를 지어 읊지 못한다면 임순성의 현령(县令)으로 발령을 보낸다는 말이지?”
  • 내시 양충식은 고개를 끄덕이고 초조한 얼굴로 대답했다.
  • “네, 마마. 이걸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 이준은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 그 어떤 역사 서적에도 존재하지 않는 고대 황조에 타임슬립해 동명이인 이준의 몸에 들어온 게 벌써 일 년째였다.
  • 이 몸은 육황자였다.
  • 서출인 게 아쉽지만.
  • 황제가 술에 취해 실수로 밤을 보내서 태어난 아이로, 여태까지 인정을 받지 못한 채로 살아왔다.
  • 이준은 처음 타임슬립해 왔을 때만 해도 낙관적이었다.
  • ‘인정을 못 받는 황자도 황자인데 여기서는 제멋대로 굴어도 되겠지?’
  • 하지만 현실은 크나큰 타격을 가져왔다.
  • 황궁에는 황자 여섯 명, 공주 세 명이 있었는데 모두 그를 무시했다. 특히 삼황자와 오황자는 그를 괴롭히기까지 했다.
  • 물론 이것은 가장 중요한 게 아니었다.
  • 가장 중요한 것은 부친인 황제까지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며 그를 황도에서 쫓아내려고 갖은 수를 쓴다는 것이었다.
  • 이것만 봐도 뻔하지 않나?
  • 경성 시모임을 빌미로 그를 강도들이 득실대는 임순성에 보내려고 했다. 임순성은 조정의 통제에서 벗어난 혼란스러운 곳이었다!
  • 그곳에 현령(县令)을 몇 번이나 보냈지만 모조리 목숨을 잃었다. 조정에서도 군사를 파견했으나 한 번도 임순성 수복에 성공한 적이 없었다.
  • 그런 임순성에 황제가 그를 현령으로 보내려고 한다니, 그 속에 숨겨진 의도를 이준 어찌 모르리.
  • 하지만 이것 역시 이준이 자초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이준이 황제의 미움을 받은 것은 출신뿐이 아니었다. 학식이면 학식, 무예면 무예, 어느 것 하나 잘하는 게 없었다. 폐인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그는 무능한 사람이었다.
  • 게다가 어렸을 때부터 황자와 공주들의 괴롭힘을 받은 탓에 성격이 유약했다. 잘생긴 얼굴을 빼면 정말 잘난 구석이 한 곳도 없었다.
  • 이런 무능한 황자이니 황제가 그를 황도에서 쫓아내고 죽든 살든 알아서 하라는 것도 이해가 갔다.
  • 하지만…
  • 지금의 이준은 그 예전의 이준이 아니었다!
  • 지금 이준은 21세기에서 타임슬립해서 온 사람인데 어찌 폐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 ‘시를 지으라는 거지?’
  • 공교롭게도 그는 타임슬립하기 전에는 국문학과의 수재였다.
  • 문학 역사가 깊은 나라인만큼 시를 지을 줄 모른다고 해도 베낄 시는 많고도 많지 않은가?
  • ‘나더러 임순성에 죽으러 가라고? 그럴 리 없지!’
  • 고대로 타임슬립한지도 어언 일 년. 그는 그저 조용하고 평화로운 고대 생활을 즐기고 싶었다. 그런데 왜 다들 그를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란 말인가?
  • 이렇게 된 바에 그는 이 고대 사람들에게 ‘미래 세상의 파워’를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 “양 총관, 길을 안내하게.”
  • 이준은 눈웃음을 지은 채, 말했다.
  • 양충식은 흠칫 놀라더니 바로 고개를 조아렸다.
  • “네, 마마…”
  • ‘육황자께서는 아예 막 나가기로 하신 거군.’
  • 양충식은 이준이 측은하게 느껴지는 한편, 서글픈 기분도 들었다.
  • ‘육황자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문무에 모두 재능이 없으셨는데 어찌 좋은 시를 지을 수 있으랴? 음절 같은 것도 아시는 것 같지 않은데. 오늘 망신을 당하시고 임순성으로 쫓겨나시겠지. 참으로 슬픈 일이구나.’
  • 양충식은 어렸을 때부터 이준의 수종으로 자신이 모시는 주인이 비참한 말로를 맞이할 것을 생각하자 마음이 아팠다.
  • “마마, 오늘 시모임에 다른 마마들도 오실 것입니다. 그분들이 또 마마를 공격하고 비웃을 수 있으니 마마께서 꼭 참으셔야 합니다.”
  • 양 충식은 이준을 따라가며 낮은 목소리로 충언했다.
  • 양충식은 지난번 같은 일이 또 재연될까 두려웠다.
  • 예전에는 이준이 다른 황자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는 한 번도 반격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얼마 전에 이준이 오황자에게 모욕을 당하고 있을 때, 바로 반박하여 오황자가 크게 약이 오른 적이 있었다.
  • 양충식이 처음 보는 이준의 강압적인 모습이었다.
  • 오늘 시모임에도 황자들이 그를 비꼴 게 뻔한데 양충식은 이준이 황자들에게 대들까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되면 큰일이었다.
  • 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네, 양 총관.”
  • 양충식은 이준이 순순히 허락하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너무 안심하기는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내 착각인지 몰라도 일 년 전 쯤부터 마마께서 이상해지신 것 같단 말이야. 뭐라고 꼬집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아무튼 그래.’
  • 이준은 점점 이상한 것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 자전거, 자동부채, 연속 쏘아지는 활, 폭탄, 장기, 마작 같은…
  • 양충식도 모두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이준이 만든 물건들은 창고에 한가득 쌓여 있었다.
  • 그리고 이준은 그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말들을 했다. 예하면 ‘대박’, ‘야메떼’ 같은 것이었다.
  • 둘은 황궁을 떠나 경성의 문인들이 모여 있는 문곡관(文曲馆)에 도착했다.
  • 오늘 열리는 경성의 시모임 장소 역시 이곳이었다.
  • 양충식은 밖에서 대기하고 이준이 홀로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문인들과 선비들이 모여서 시를 짓고 있었다.
  • 이준은 한 눈에 황형들을 알아보았다. 한 명은 삼황자 이겸이고 다른 한 명은 오황자 이중기였다.
  • 그들도 한눈에 이준을 알아보았는지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피식 냉소했다.
  • “아우야, 드디어 왔구나.”
  • 오황자 이중기가 냉소하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 “아바마마께서 나와 셋째 형님더러 아우 네가 시를 짓는 걸 보라고 하더구나. 아우야, 준비되었느냐?”
  • 삼황자 이겸도 웃음을 띤 얼굴로 맞장구를 쳤다.
  • “그러니 아우야, 오늘 잘 해야겠지? 나와 중기가 널 도와주고 싶어도 아바마마께서 심 태부(太傅)를 보내오셔서 그럴 수가 없겠구나.”
  • 옆에 서 있던 중년 문관이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였다.
  • 이 사람은 한림원(翰林院) 학사 심학선이었다. 학문에 조예가 깊은 덕에 그는 한림원 학사로 있으면서도 태부 직까지 겸비한 태자의 스승이었다. 현재 황제 역시 그의 제자였다!
  • 그는 현재 제일 대학사이자 문학의 거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형님들, 심 태부!”
  • 이준은 심학선을 보고 읍을 하고는 덤덤하게 말했다.
  • “오늘 과제 역시 두 형님이 내신 거겠죠?”
  • ‘내 생각이 맞았어! 아비라는 작자가 날 황도에서 쫓아내기로 마음먹었군! 그래서 나랑 가장 사이가 나쁜 삼황자와 오황자더러 출제하란 거야. 이게 날 힘들게 하려는 게 아니면 뭐겠어?
  • 하지만! 겨우 시 아니야? 우리 나라 유구한 역사상 시인들이 남긴 걸작만 해도 얼마야? 국문학과인 내가 과제로 외운 시도 넘쳐나거든. 시를 짓는 건 쉽지.’
  • 이중기가 웃으며 말했다.
  • “그래, 아우야. 하지만 네가 익힌 학식이 어느 정도인지 내가 모르는 바 아니지. 아무리 쉬운 문제라도 넌 풀기 어려울 테니 굳이 고생을 사서 하지 말고 이렇게 하자꾸나. 앞으로 열심히 학식을 익히겠다고 약조한다면 나와 형님이 아바마마께 찾아가 사정하여 네 임순성 행은 없던 일로 할게. 어떠냐?”
  • “그래, 아우야. 아니면 네가 직접 아바마마께 그동안 허송세월을 보낸 걸 사죄하고 앞으로 열심히 살겠다 다짐한다면 나와 중기도 널 임순성에 보내지 말라고 아바마마께 사정해 줄게.”
  • 이겸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 이준의 실력이 어떤지 둘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 오늘의 시 모임은 말로는 경성 문인들의 겨룸이라고 하지만 이준을 위해 짠 판이었다.
  • 이곳은 이준이 망신당할 곳이었다. 둘은 그가 아무 시도 짓지 못할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 하지만!
  • 이준은 고개를 저었다.
  • “형님들의 선의는 감사하지만 그래도 두분께서 문제를 내주시기 바랍니다!”
  • 둘은 대뜸 미간을 찌푸렸다.
  • ‘이 자식, 고마운 줄 모르고 왜 이래?’
  • 이중기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 “그렇다면 내가 출제할 테니 문제를 잘 듣거라!”
  • 그는 하얀 눈이 뒤덮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내리는 강 위에 배 한 척이 쓸쓸하게 지나가고 있었는데 그 위에서 한 사람이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 이중기는 피식 웃고 입을 열었다.
  • “아주 쉬운 문제란다. 눈이 내리는 강을 보면서 절구(绝句) 하나를 지어보려무나.”
  • ‘이게 쉽다고?’
  • 이준은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 하지만 그에게 쉬운 것이 맞았다.
  • 출제된 문제를 듣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온갖 시구가 맴돌았다!
  • 모두 지금 눈앞의 풍경에 꼭 맞는 절묘한 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