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은 털이 달린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채, 우뚝 서서 몰아치는 찬바람을 맞고 있었다. 칼로 에이는 듯한 추위였다.
그는 거위털처럼 내리는 눈꽃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준수한 얼굴은 약간의 창백한 빛을 띠고 있었다.
“양 총관(总管), 아바마마의 뜻은 오늘에 내가 시 모임에서 좋은 시를 지어 읊지 못한다면 임순성의 현령(县令)으로 발령을 보낸다는 말이지?”
내시 양충식은 고개를 끄덕이고 초조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마마. 이걸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이준은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그 어떤 역사 서적에도 존재하지 않는 고대 황조에 타임슬립해 동명이인 이준의 몸에 들어온 게 벌써 일 년째였다.
이 몸은 육황자였다.
서출인 게 아쉽지만.
황제가 술에 취해 실수로 밤을 보내서 태어난 아이로, 여태까지 인정을 받지 못한 채로 살아왔다.
이준은 처음 타임슬립해 왔을 때만 해도 낙관적이었다.
‘인정을 못 받는 황자도 황자인데 여기서는 제멋대로 굴어도 되겠지?’
하지만 현실은 크나큰 타격을 가져왔다.
황궁에는 황자 여섯 명, 공주 세 명이 있었는데 모두 그를 무시했다. 특히 삼황자와 오황자는 그를 괴롭히기까지 했다.
물론 이것은 가장 중요한 게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부친인 황제까지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며 그를 황도에서 쫓아내려고 갖은 수를 쓴다는 것이었다.
이것만 봐도 뻔하지 않나?
경성 시모임을 빌미로 그를 강도들이 득실대는 임순성에 보내려고 했다. 임순성은 조정의 통제에서 벗어난 혼란스러운 곳이었다!
그곳에 현령(县令)을 몇 번이나 보냈지만 모조리 목숨을 잃었다. 조정에서도 군사를 파견했으나 한 번도 임순성 수복에 성공한 적이 없었다.
그런 임순성에 황제가 그를 현령으로 보내려고 한다니, 그 속에 숨겨진 의도를 이준 어찌 모르리.
하지만 이것 역시 이준이 자초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준이 황제의 미움을 받은 것은 출신뿐이 아니었다. 학식이면 학식, 무예면 무예, 어느 것 하나 잘하는 게 없었다. 폐인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그는 무능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어렸을 때부터 황자와 공주들의 괴롭힘을 받은 탓에 성격이 유약했다. 잘생긴 얼굴을 빼면 정말 잘난 구석이 한 곳도 없었다.
이런 무능한 황자이니 황제가 그를 황도에서 쫓아내고 죽든 살든 알아서 하라는 것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지금의 이준은 그 예전의 이준이 아니었다!
지금 이준은 21세기에서 타임슬립해서 온 사람인데 어찌 폐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시를 지으라는 거지?’
공교롭게도 그는 타임슬립하기 전에는 국문학과의 수재였다.
문학 역사가 깊은 나라인만큼 시를 지을 줄 모른다고 해도 베낄 시는 많고도 많지 않은가?
‘나더러 임순성에 죽으러 가라고? 그럴 리 없지!’
고대로 타임슬립한지도 어언 일 년. 그는 그저 조용하고 평화로운 고대 생활을 즐기고 싶었다. 그런데 왜 다들 그를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란 말인가?
이렇게 된 바에 그는 이 고대 사람들에게 ‘미래 세상의 파워’를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양 총관, 길을 안내하게.”
이준은 눈웃음을 지은 채, 말했다.
양충식은 흠칫 놀라더니 바로 고개를 조아렸다.
“네, 마마…”
‘육황자께서는 아예 막 나가기로 하신 거군.’
양충식은 이준이 측은하게 느껴지는 한편, 서글픈 기분도 들었다.
‘육황자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문무에 모두 재능이 없으셨는데 어찌 좋은 시를 지을 수 있으랴? 음절 같은 것도 아시는 것 같지 않은데. 오늘 망신을 당하시고 임순성으로 쫓겨나시겠지. 참으로 슬픈 일이구나.’
양충식은 어렸을 때부터 이준의 수종으로 자신이 모시는 주인이 비참한 말로를 맞이할 것을 생각하자 마음이 아팠다.
“마마, 오늘 시모임에 다른 마마들도 오실 것입니다. 그분들이 또 마마를 공격하고 비웃을 수 있으니 마마께서 꼭 참으셔야 합니다.”
양 충식은 이준을 따라가며 낮은 목소리로 충언했다.
양충식은 지난번 같은 일이 또 재연될까 두려웠다.
예전에는 이준이 다른 황자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는 한 번도 반격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얼마 전에 이준이 오황자에게 모욕을 당하고 있을 때, 바로 반박하여 오황자가 크게 약이 오른 적이 있었다.
양충식이 처음 보는 이준의 강압적인 모습이었다.
오늘 시모임에도 황자들이 그를 비꼴 게 뻔한데 양충식은 이준이 황자들에게 대들까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되면 큰일이었다.
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양 총관.”
양충식은 이준이 순순히 허락하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너무 안심하기는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착각인지 몰라도 일 년 전 쯤부터 마마께서 이상해지신 것 같단 말이야. 뭐라고 꼬집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아무튼 그래.’
이준은 점점 이상한 것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자전거, 자동부채, 연속 쏘아지는 활, 폭탄, 장기, 마작 같은…
양충식도 모두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이준이 만든 물건들은 창고에 한가득 쌓여 있었다.
그리고 이준은 그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말들을 했다. 예하면 ‘대박’, ‘야메떼’ 같은 것이었다.
둘은 황궁을 떠나 경성의 문인들이 모여 있는 문곡관(文曲馆)에 도착했다.
오늘 열리는 경성의 시모임 장소 역시 이곳이었다.
양충식은 밖에서 대기하고 이준이 홀로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문인들과 선비들이 모여서 시를 짓고 있었다.
이준은 한 눈에 황형들을 알아보았다. 한 명은 삼황자 이겸이고 다른 한 명은 오황자 이중기였다.
그들도 한눈에 이준을 알아보았는지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피식 냉소했다.
“아우야, 드디어 왔구나.”
오황자 이중기가 냉소하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아바마마께서 나와 셋째 형님더러 아우 네가 시를 짓는 걸 보라고 하더구나. 아우야, 준비되었느냐?”
삼황자 이겸도 웃음을 띤 얼굴로 맞장구를 쳤다.
“그러니 아우야, 오늘 잘 해야겠지? 나와 중기가 널 도와주고 싶어도 아바마마께서 심 태부(太傅)를 보내오셔서 그럴 수가 없겠구나.”
옆에 서 있던 중년 문관이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였다.
이 사람은 한림원(翰林院) 학사 심학선이었다. 학문에 조예가 깊은 덕에 그는 한림원 학사로 있으면서도 태부 직까지 겸비한 태자의 스승이었다. 현재 황제 역시 그의 제자였다!
그는 현재 제일 대학사이자 문학의 거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형님들, 심 태부!”
이준은 심학선을 보고 읍을 하고는 덤덤하게 말했다.
“오늘 과제 역시 두 형님이 내신 거겠죠?”
‘내 생각이 맞았어! 아비라는 작자가 날 황도에서 쫓아내기로 마음먹었군! 그래서 나랑 가장 사이가 나쁜 삼황자와 오황자더러 출제하란 거야. 이게 날 힘들게 하려는 게 아니면 뭐겠어?
하지만! 겨우 시 아니야? 우리 나라 유구한 역사상 시인들이 남긴 걸작만 해도 얼마야? 국문학과인 내가 과제로 외운 시도 넘쳐나거든. 시를 짓는 건 쉽지.’
이중기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아우야. 하지만 네가 익힌 학식이 어느 정도인지 내가 모르는 바 아니지. 아무리 쉬운 문제라도 넌 풀기 어려울 테니 굳이 고생을 사서 하지 말고 이렇게 하자꾸나. 앞으로 열심히 학식을 익히겠다고 약조한다면 나와 형님이 아바마마께 찾아가 사정하여 네 임순성 행은 없던 일로 할게. 어떠냐?”
“그래, 아우야. 아니면 네가 직접 아바마마께 그동안 허송세월을 보낸 걸 사죄하고 앞으로 열심히 살겠다 다짐한다면 나와 중기도 널 임순성에 보내지 말라고 아바마마께 사정해 줄게.”
이겸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이준의 실력이 어떤지 둘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오늘의 시 모임은 말로는 경성 문인들의 겨룸이라고 하지만 이준을 위해 짠 판이었다.
이곳은 이준이 망신당할 곳이었다. 둘은 그가 아무 시도 짓지 못할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준은 고개를 저었다.
“형님들의 선의는 감사하지만 그래도 두분께서 문제를 내주시기 바랍니다!”
둘은 대뜸 미간을 찌푸렸다.
‘이 자식, 고마운 줄 모르고 왜 이래?’
이중기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그렇다면 내가 출제할 테니 문제를 잘 듣거라!”
그는 하얀 눈이 뒤덮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내리는 강 위에 배 한 척이 쓸쓸하게 지나가고 있었는데 그 위에서 한 사람이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