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이 시 모임의 진짜 의도를 알고 있지만 그래도 가난한 집 출신인 선비들은 혹여 자신의 문학적 재주로 황자의 눈에 들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고 자리에 왔다. 황자의 눈에만 든다면 앞날은 탄탄대로일 게 분명하니까.
또 꽤나 이름 있는 귀족 가문의 자제들도 있었다.
그중에는 경성에서 유명한 여인이자 좌 승상댁 여식 왕연지도 있었다.
왕연지는 구경하러 온 것이었다.
오늘 황궁에 콕 틀어박힌 채, 좀처럼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육황자가 온다고 해서 그녀는 호기심 때문에 보러 왔다. 소문난 바로 육황자는 아무 능력이 없으나 외모만큼은 남들의 부러움을 살 정도로 준수하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 역시 이번 시 모임에서 시를 짓는 것으로 자신의 재예를 뽐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이준의 잘생긴 얼굴을 본 순간, 왕연지는 마음이 살짝 떨렸다.
‘소문이 맞았어! 육황자가 빼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는 게 맞았어! 정말 너무 잘생겼는데?’
“아씨, 아씨. 저것 좀 보세요. 육황자가 정말 옥에서 깨어난 것처럼 아름답게 생기셨네요.”
옆에 있던 시녀 숙자도 이준을 보고 놀란 얼굴로 소곤거렸다.
왕연지는 분을 바르지 않았음에도 피부가 백옥 같고 몸매가 여리여리한 어여쁜 소녀였다.
그녀는 경성에서 소문난 미인으로, 좌승상댁의 문턱이 그녀에게 중매를 서주려고 찾아온 중매쟁이들이 하도 밟아 닳았다는 말도 있었다.
왕연지는 수줍은 얼굴로 이준을 몇 번 보고는 시녀의 말에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였다.
“외모는 준수하나…”
‘외모는 준수하나 겉모습만 번드르르하지, 속에 통 든 게 없단 말이지. 그런데 방금 보니 황형을 대할 때도 기가 죽지 않는데? 소문난 것처럼 겁쟁이는 아닌가 봐. 육황자가 학식도, 무예도 내놓을 게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지금 당장 풍경을 보고 시를 지으라니, 이건 사람들 앞에서 육황자를 모욕하려는 게 아니고 뭐야?’
오황자 이중기가 출제한 문제를 들은 왕연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당장 시를 지어야 할 뿐만 아니라 절구를 지어야 했다. 그 중에는 설경에 대한 내용도 담겨야 하지 않은가? 소재도 그렇고, 절구의 격식 상 지금 당장 시를 짓기는 그녀도 힘들었다.
그러니 이준은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아씨, 문제가 너무 어렵네요…”
시녀 숙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오황자가 쉽다고 하셨는데 하나도 안 쉬워! 즉석에서 시를 지으려면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고 격식에 제한도 많이 걸리잖아!’
한편, 이중기가 출제한 문제를 들은 선비들은 모두 생각에 잠겼다.
‘설경을 보며 시를 지어야 한다라, 그것도 지금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면서!’
소재가 설경인 것은 어렵지 않으나 지금 상황에 맞게 절묘한 시구를 생각해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시를 잘 지어 삼황자와 오황자의 눈에 든다면 앞으로 탄탄대로가 펼쳐질 것은 의심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가난한 집 출신인 선비들과 벼슬길에 뜻이 있는 사람들은 머리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왕연지도 생각에 잠겼다.
“아우야, 어떠냐? 쉬운 문제지?”
문제를 낸 이중기는 미소 띤 얼굴로 이준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이준에 대한 경멸로 가득했다!
‘이준 네 녀석의 학식으로 지금 풍경을 보면서 절구를 어떻게 만든다고 그래?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임순성에 갈 준비나 해! 시녀가 낳은 모지랭이 따위가 나와 같은 황자라니, 낯이 뜨거워 들고 다닐 수가 없었는데 잘됐어. 이 녀석은 오늘부로 경성을 떠나게 될 거야! 나와 셋째 형님이 고심하여 고른 임순성이야. 그곳에는 강도가 득실거려 네 놈을 죽일 자는 많고도 많을 것이야! 이준, 이번생의 황자 신분은 임순성에서 끝내도록 해!’
이중기는 사악한 생각을 하며 피식 냉소했다.
그러나 이준은 담담한 얼굴로 뒷짐을 진 채, 서 있을 뿐이었다.
눈처럼 하얀색 옷을 입은 그는 속세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기운을 풍기고 있어 그를 바라보는 여인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왕연지도 그에게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형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쉬운 문제를 내주셔서요.”
이준의 말에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버리고 말았다.
옆에 있던 선비들 모두 경악한 표정을 금치 못했다.
‘쉽다고? 진심인가? 아니면 농담인가?’
“쉽다고?”
왕연지는 아름다운 눈을 깜박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준에게 쉬운 거라고?’
“하하하, 아우야. 넌 정말 농담을 잘하는구나!”
삼황자는 이준이 말 한마디로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자 처음에는 흠칫 놀랐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아우 네가 이렇게 농을 잘하는 줄 전에는 왜 몰랐는지 모르겠구나. 아주 재치가 넘쳐.”
이준이 태연하게 맞받아쳤다.
“형님, 별말씀을요.”
이겸은 손을 저었다.
“아우야, 얼른 시를 지어보려무나. 나와 다섯째, 심 태부도 언제까지나 여기서 널 기다릴 수는 없지 않겠느냐? 그러니 너에게 일다경의 시간을 줄게.”
그러자 옆에서 누군가 바로 초에 불을 붙였다. 시간을 재기 위함이었다.
이겸의 말에 사람들은 또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창밖의 풍경을 보며 절구를 짓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시간이 일다경밖에 없다니. 이건 일부러 사람을 괴롭히는 게 아니고 뭐란 말이야?’
선비들은 미간을 찌푸린 채, 고뇌에 찬 표정을 지었다.
재녀라고 불리는 왕연지 역시 안색이 변했다.
일다경의 시간 안에 시를 짓는 건 그녀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늘 시 모임은 일부러 육황자를 괴롭히기 위한 자리가 맞구나.’
왕연지는 시를 지으려던 것을 포기하고 이준의 안색을 살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준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순간 왕연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육황자는 자신이 있는 건가? 아니면 될 대로 되어라는 건가?’
“일다경의 시간까지 필요없습니다. 일곱 걸음 걸을만큼의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이준은 불이 붙은 초를 보며 냉소하더니 놀라운 말을 했다!
‘일곱 걸음 걸을만큼의 시간이면 시를 지을 수 있다고?’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위층에 있던 이겸과 이중기는 미간을 찌푸렸다.
‘자식, 큰소리는!’
옆에서 보던 심학선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일곱 걸음만에 시를 짓는다고? 나조차도 못할 일인데! 육황자는 정말 듣던 대로 무능력한 멍청이군. 큰소리밖에 칠 줄 모르는!’
사람들의 경악한 시선을 받으며 이준이 가장 먼저 첫걸음을 내딛고 입을 열었다.
“뭇산의 새들이… 씨가 마르고.”
‘음? 뭇산의 새들이 씨가 말랐다고? 그런 것 같기도 한데!’
사람들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러더니 이준은 두 걸음 더 내딛으며 시를 읊기 시작했다.
“길가를 둘러봐도…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구나.”
쿠궁!
뭇산의 새들이 씨가 마르고 길가를 둘러봐도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아주 깔끔하고 이해가 쉬우며 말하고자 하는 뜻을 쉽게 풀어 쓴 글이었다!
문체가 대응되는 대구법을 사용하여 군더더기 없는 깔끔함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두 구절이 바로 눈앞에 펼쳐진 강의 모습을 보여준 게 아니겠는가?
경성을 둘러싼 산에는 새가 보이지 않고 만 리 넘는 길에도 사람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풍경과 꼭 맞는 말이었다!
왕연지와 심학선의 표정이 모두 사뭇 진지해졌다.
구경하던 선비들도 깜짝 놀랐지만 누구보다 이겸과 이중기의 표정이 볼만했다.
‘저 멍청이가 진짜 시를 지을 줄 안다고?!’
이때, 이준이 네 번째와 다섯 번째 걸음을 내디디며 말했다.
“외로운 배 위에 있는… 삿갓 쓴 나그네는!”
이준은 또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걸음을 내디디며 입을 열었다.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자조적인 느낌을 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