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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일다경의 시간까지 필요없습니다 일곱 걸음 걸을만큼의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 이날 문곡관에는 세 명의 황자를 제외하고도 경성에서 내로라하는 재자들도 도착해 있었다.
  • 다들 이 시 모임의 진짜 의도를 알고 있지만 그래도 가난한 집 출신인 선비들은 혹여 자신의 문학적 재주로 황자의 눈에 들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고 자리에 왔다. 황자의 눈에만 든다면 앞날은 탄탄대로일 게 분명하니까.
  • 또 꽤나 이름 있는 귀족 가문의 자제들도 있었다.
  • 그중에는 경성에서 유명한 여인이자 좌 승상댁 여식 왕연지도 있었다.
  • 왕연지는 구경하러 온 것이었다.
  • 오늘 황궁에 콕 틀어박힌 채, 좀처럼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육황자가 온다고 해서 그녀는 호기심 때문에 보러 왔다. 소문난 바로 육황자는 아무 능력이 없으나 외모만큼은 남들의 부러움을 살 정도로 준수하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 물론 그녀 역시 이번 시 모임에서 시를 짓는 것으로 자신의 재예를 뽐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 이준의 잘생긴 얼굴을 본 순간, 왕연지는 마음이 살짝 떨렸다.
  • ‘소문이 맞았어! 육황자가 빼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는 게 맞았어! 정말 너무 잘생겼는데?’
  • “아씨, 아씨. 저것 좀 보세요. 육황자가 정말 옥에서 깨어난 것처럼 아름답게 생기셨네요.”
  • 옆에 있던 시녀 숙자도 이준을 보고 놀란 얼굴로 소곤거렸다.
  • 왕연지는 분을 바르지 않았음에도 피부가 백옥 같고 몸매가 여리여리한 어여쁜 소녀였다.
  • 그녀는 경성에서 소문난 미인으로, 좌승상댁의 문턱이 그녀에게 중매를 서주려고 찾아온 중매쟁이들이 하도 밟아 닳았다는 말도 있었다.
  • 왕연지는 수줍은 얼굴로 이준을 몇 번 보고는 시녀의 말에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였다.
  • “외모는 준수하나…”
  • ‘외모는 준수하나 겉모습만 번드르르하지, 속에 통 든 게 없단 말이지. 그런데 방금 보니 황형을 대할 때도 기가 죽지 않는데? 소문난 것처럼 겁쟁이는 아닌가 봐. 육황자가 학식도, 무예도 내놓을 게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지금 당장 풍경을 보고 시를 지으라니, 이건 사람들 앞에서 육황자를 모욕하려는 게 아니고 뭐야?’
  • 오황자 이중기가 출제한 문제를 들은 왕연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 지금 당장 시를 지어야 할 뿐만 아니라 절구를 지어야 했다. 그 중에는 설경에 대한 내용도 담겨야 하지 않은가? 소재도 그렇고, 절구의 격식 상 지금 당장 시를 짓기는 그녀도 힘들었다.
  • 그러니 이준은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 “아씨, 문제가 너무 어렵네요…”
  • 시녀 숙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 ‘오황자가 쉽다고 하셨는데 하나도 안 쉬워! 즉석에서 시를 지으려면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고 격식에 제한도 많이 걸리잖아!’
  • 한편, 이중기가 출제한 문제를 들은 선비들은 모두 생각에 잠겼다.
  • ‘설경을 보며 시를 지어야 한다라, 그것도 지금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면서!’
  • 소재가 설경인 것은 어렵지 않으나 지금 상황에 맞게 절묘한 시구를 생각해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 하지만 시를 잘 지어 삼황자와 오황자의 눈에 든다면 앞으로 탄탄대로가 펼쳐질 것은 의심할 것이 없었다.
  • 그래서 가난한 집 출신인 선비들과 벼슬길에 뜻이 있는 사람들은 머리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 왕연지도 생각에 잠겼다.
  • “아우야, 어떠냐? 쉬운 문제지?”
  • 문제를 낸 이중기는 미소 띤 얼굴로 이준을 바라보았다.
  •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이준에 대한 경멸로 가득했다!
  • ‘이준 네 녀석의 학식으로 지금 풍경을 보면서 절구를 어떻게 만든다고 그래?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임순성에 갈 준비나 해! 시녀가 낳은 모지랭이 따위가 나와 같은 황자라니, 낯이 뜨거워 들고 다닐 수가 없었는데 잘됐어. 이 녀석은 오늘부로 경성을 떠나게 될 거야! 나와 셋째 형님이 고심하여 고른 임순성이야. 그곳에는 강도가 득실거려 네 놈을 죽일 자는 많고도 많을 것이야! 이준, 이번생의 황자 신분은 임순성에서 끝내도록 해!’
  • 이중기는 사악한 생각을 하며 피식 냉소했다.
  • 그러나 이준은 담담한 얼굴로 뒷짐을 진 채, 서 있을 뿐이었다.
  • 눈처럼 하얀색 옷을 입은 그는 속세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기운을 풍기고 있어 그를 바라보는 여인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 왕연지도 그에게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 “형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쉬운 문제를 내주셔서요.”
  • 이준의 말에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버리고 말았다.
  • 옆에 있던 선비들 모두 경악한 표정을 금치 못했다.
  • ‘쉽다고? 진심인가? 아니면 농담인가?’
  • “쉽다고?”
  • 왕연지는 아름다운 눈을 깜박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 ‘이준에게 쉬운 거라고?’
  • “하하하, 아우야. 넌 정말 농담을 잘하는구나!”
  • 삼황자는 이준이 말 한마디로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자 처음에는 흠칫 놀랐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 “아우 네가 이렇게 농을 잘하는 줄 전에는 왜 몰랐는지 모르겠구나. 아주 재치가 넘쳐.”
  • 이준이 태연하게 맞받아쳤다.
  • “형님, 별말씀을요.”
  • 이겸은 손을 저었다.
  • “아우야, 얼른 시를 지어보려무나. 나와 다섯째, 심 태부도 언제까지나 여기서 널 기다릴 수는 없지 않겠느냐? 그러니 너에게 일다경의 시간을 줄게.”
  • 그러자 옆에서 누군가 바로 초에 불을 붙였다. 시간을 재기 위함이었다.
  • 이겸의 말에 사람들은 또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 ‘창밖의 풍경을 보며 절구를 짓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시간이 일다경밖에 없다니. 이건 일부러 사람을 괴롭히는 게 아니고 뭐란 말이야?’
  • 선비들은 미간을 찌푸린 채, 고뇌에 찬 표정을 지었다.
  • 재녀라고 불리는 왕연지 역시 안색이 변했다.
  • 일다경의 시간 안에 시를 짓는 건 그녀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 ‘오늘 시 모임은 일부러 육황자를 괴롭히기 위한 자리가 맞구나.’
  • 왕연지는 시를 지으려던 것을 포기하고 이준의 안색을 살폈다.
  •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준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 순간 왕연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 ‘육황자는 자신이 있는 건가? 아니면 될 대로 되어라는 건가?’
  • “일다경의 시간까지 필요없습니다. 일곱 걸음 걸을만큼의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 이준은 불이 붙은 초를 보며 냉소하더니 놀라운 말을 했다!
  • ‘일곱 걸음 걸을만큼의 시간이면 시를 지을 수 있다고?’
  •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 위층에 있던 이겸과 이중기는 미간을 찌푸렸다.
  • ‘자식, 큰소리는!’
  • 옆에서 보던 심학선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일곱 걸음만에 시를 짓는다고? 나조차도 못할 일인데! 육황자는 정말 듣던 대로 무능력한 멍청이군. 큰소리밖에 칠 줄 모르는!’
  • 사람들의 경악한 시선을 받으며 이준이 가장 먼저 첫걸음을 내딛고 입을 열었다.
  • “뭇산의 새들이… 씨가 마르고.”
  • ‘음? 뭇산의 새들이 씨가 말랐다고? 그런 것 같기도 한데!’
  • 사람들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
  • 그러더니 이준은 두 걸음 더 내딛으며 시를 읊기 시작했다.
  • “길가를 둘러봐도…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구나.”
  • 쿠궁!
  • 뭇산의 새들이 씨가 마르고 길가를 둘러봐도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 아주 깔끔하고 이해가 쉬우며 말하고자 하는 뜻을 쉽게 풀어 쓴 글이었다!
  • 문체가 대응되는 대구법을 사용하여 군더더기 없는 깔끔함을 보여주었다.
  • 그리고 이 두 구절이 바로 눈앞에 펼쳐진 강의 모습을 보여준 게 아니겠는가?
  • 경성을 둘러싼 산에는 새가 보이지 않고 만 리 넘는 길에도 사람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 풍경과 꼭 맞는 말이었다!
  • 왕연지와 심학선의 표정이 모두 사뭇 진지해졌다.
  • 구경하던 선비들도 깜짝 놀랐지만 누구보다 이겸과 이중기의 표정이 볼만했다.
  • ‘저 멍청이가 진짜 시를 지을 줄 안다고?!’
  • 이때, 이준이 네 번째와 다섯 번째 걸음을 내디디며 말했다.
  • “외로운 배 위에 있는… 삿갓 쓴 나그네는!”
  • 이준은 또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걸음을 내디디며 입을 열었다.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자조적인 느낌을 담고 있었다.
  • “홀로…”
  • “얼어붙은 강의 눈을 낚고 있네!”
  • ‘홀로 얼어붙은 강의 눈을 낚는다?’
  • 이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 끝을 장식해주었다.
  • “이 시의 제목은 ‘호성설(护城雪)’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