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이 넘은 황제는 책상에 마주앉아 글을 쓰고 있었고 옆에서 한림원 학사 겸 태학원 태부 심학선이 황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정이 상주서에 글을 쓴 뒤, 붓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집정한 후로 강남도 평온하고 변방도 조용해졌는데 유독 서쪽 변경에만 강도떼들이 창궐하여 백성들의 삶이 말이 아니란 말이네! 오늘 쉰세 개의 상주서 중에서 서른하나나 되는 글들이 서쪽 변경의 강도를 운운하고 있군! 언제야 이 강도떼들을 몰아내고 백성들이 숨을 쉴 수 있게 만들어 줄 수 있겠나?”
심학선이 대답했다.
“폐하께서 나랏일에 이리 힘을 쓰시고 조정 관리들도 각자의 직위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서쪽 변경의 강도떼 우환은 언젠가 해결될 것입니다.”
“그러기를 바라야지.”
이정은 한숨을 내쉬고 책상 위의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태부는 ‘호성설’을 어떻게 보나?”
심학선이 공손하게 물었다.
“폐하의 뜻은…”
“태부가 이 절구를 정녕 육황자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이정의 입가에 차디찬 냉소가 피어올랐다.
심학선은 바로 그의 뜻을 깨닫고 고개를 조아렸다.
“폐하, 신이 어찌 감히 황자를 입에 올리겠습니까!”
“말해보게.”
이정은 심학선을 힐끗 보고 말했다.
“폐하, 그러면 신이 한 번 아뢰겠나이다.”
심학선은 이를 악물고 읍을 한 뒤, 말을 이었다.
“이 시는 의미나 풍경을 활용한 기교를 봐도 모두 소박한 가운데 절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히… 세상에 위엄을 떨칠 기개를 타고 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태부의 뜻은 육황자가 다시 없을 인재라는 말인가?”
이정은 차가워진 안색으로 버럭 호통쳤다.
“황당하군!”
“신이 어찌 감히 그런 망발을 하겠습니까!”
심학선은 바로 무릎을 털썩 꿇었다.
“이 시가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절묘한 시임은 틀림이 없으나 정말로 육황자가 쓴 게 맞는지는 신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흥!”
이정이 콧방귀를 뀌었다.
“육황자가 글공부에 뜻도, 재주도 없는 것을 짐이 수년간 지켜봐 왔는데 자네가 오늘 사람들 앞에서 그 시가 육황자의 작품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나? 그 아이의 발칙한 속임수에 넘어가서 이게 웬 소란인가? 참으로 황당하구먼! 짐은 그동안 자식의 재주조차 발견하지 못한 장님이란 말이오?”
“아닙니다, 폐하!”
심학선은 온몸을 벌벌 떨었다.
하지만 오늘, 이준이 사람들 앞에서 칠보만에 시를 다 지은 건 사실이지 않은가?
그 사이에 속임수를 쓸 시간은 전혀 없었다!
한참 뒤에야 안색이 점차 풀어진 이정은 심학선더러 일어나라고 했다.
그리고 누군가 베낀 ‘호성설’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었다.
“뭇산의 새들이 씨가 마르고, 길가를 둘러봐도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구나! 외로운 배 위에 있는 삿갓 쓴 나그네는, 홀로 얼어붙은 강의 눈을 낚고 있네! 아주 쉽고 깔끔하여 아이들이나 아녀자들도 외우게 쉽겠군. 또 오래오래 전해질 시야. 태부가 그렇게 평가한 것도 맞는 소리네. 이 시는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절묘한 시가 맞아. 이런 자가 내 사람이 된다면 현재 조정의 학식 수준이 크게 향상되겠는데 말이네!”
“폐하, 오늘 육황자가 사람들 앞에서 시를 지은 건 보았지만 구체적으로 누구의 소행인지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심학선이 말했다.
이 시는 절묘한데 육황자 이준은 폐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 누구도 이 시를 쓴 사람이 이준이라고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심학선도 믿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천재로 불리는 심학선도 이런 시를 지을 수 없으니 말이다!
이정은 시를 읽어보며 코웃음을 쳤다.
“흥, 그동안 이룬 것 하나 없이 살아왔는데 어딘가에서 베껴 온 시로 정말 짐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인가? 시는 그렇다고 해도, 세상에 학식과 무예 모두 뛰어나지 않은 황자가 어디 있다더냐? 짐은 네 녀석의 무예를 시험해 보겠다. 이번에도 어떻게 속임수를 쓰는지 두고보아야겠구나. 짐이 직접 볼 테니 각오하는 게 좋을 것이다!”
다음날 새벽.
황제의 측근내관 왕련이 황제의 명을 받고 아직 잠자고 있는 이준을 깨웠다.
“폐하께서 아뢰신다! 육황자 이준은 잘 듣거라. 어제 시 짓기는 통과이나 현재 황자들은 학식과 무예를 겸비해야 하는 법, 폐하께서 오늘 직접 육황자의 무예를 시험해 볼 것이다! 육황자는 즉각 기린전(麒麟殿)으로 행차하여 폐하의 시험을 받아라!”
“네, 소자 폐하의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이준은 미간을 찌푸린 얼굴로 일어났다.
‘무예를 시험한다고? 싸움실력을 본다는 말인데… 이거 큰일이네. 난 싸움을 통 해본 적이 없잖아! 됐어, 될 대로 되라지. 이렇게 된 이상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면 황제인 아버지가 자신을 경성에서 쫓아내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이었다.
‘하여튼 독하다니까!’
그는 자신이 시 짓기 난관을 통과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을 걸 예상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가장 먼저 의심을 보인 사람은 바로 그의 아버지였다.
‘아침 일찍부터 날 괴롭히려고 사람을 보내다니! 참 지독해!’
이준의 눈가에 한기가 스쳤다.
그는 옷을 입은 뒤, 양충식을 데리고 기린전으로 향했다.
간만에 기분이 좋았던 양충식은 하루가 지나자마자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을 맛보아야 했다!
‘우리 마마는 너무 안됐어…’
이준의 뒤를 따르는 그의 마음은 속상하기만 했다.
“소자, 아바마마를 뵙습니다!”
곡교의에 앉은 황제의 용안은 더없이 위엄을 풍겼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무릎을 꿇은 이준을 보더니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일어나거라. 아들아, 짐이 오늘 널 부른 것은 네 무공 실력을 시험해 보려는 것이니 이 아비를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이정의 목소리에는 감정이라고는 꼬물만치도 담겨 있지 않았다.
“네, 아바마마!”
이준이 천천히 일어났다!
기린전 안에는 그의 황형과 누나들, 또 일곱째와 여덟째도 둘러싸고 있었다.
다들 구경거리라도 난 듯이 깨고소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섯째 이중기가 활짝 웃으며 나섰다.
“아우가 어제 보여준 시가 얼마나 놀라운지 소자 깜짝 놀랐습니다. 오늘도 아우가 기적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하하~”
팔공주 이향연이 깔깔 웃으며 말했다.
“여섯째 오라버니의 시를 듣고 심 태부마저 칭찬이 자자했다고 해요. 오라버니, 오늘도 우리를 실망시키면 안 돼요. 소녀가 아침 일찍부터 여기에 온 보람이 있게요. 호호호~”
칠황자 이진은 올해 열 살이었지만 질세라 이준을 비웃었다.
“작은 형님 시 짓기에는 정말 일가견이 있더군요. 아우인 제가 깜짝 놀랐지 뭡니까. 오늘 저도 형님이 또 전설을 쓰시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이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이정이 차가운 얼굴로 손을 젓자 옆에 있던 내관 총관 왕련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정을 가져오너라!”
그러자 일여덟 명의 장자가 힘겹게 다리 세 개짜리 거대한 정(鼎)을 들고 나오더니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기린전 중앙에 내려놓았다.
정을 본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버렸다.
‘이게 무슨 뜻이지?’
이준도 미간을 찌푸렸다.
이때, 왕련이 큰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고로 세상을 제패할 수 있는 왕이면 정을 높이 추켜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육황자가 이 정을 어깨의 높이까지 추켜들고 호흡 세 번 할 시간을 버틴다면 폐하의 시험을 통과한 것으로 하겠습니다!”
‘정을 어깨의 높이까지 추켜든다고? 그것도 삼 식(息, 고대의 단위, 호흡할 시간을 가리킴)을 버텨야 한다고?’
“뭐라고요?”
“정을 추켜들어요?”
“이 정은 족히 몇 천 근이 되어 보이는데요!”
현재 가장 강하다는 제일 장군 왕승지라고 해도 이 정을 추켜들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그 정을 이준더러 들라고 하다니?
‘이게 무슨 소리야? 몸집이 왜소한 이준이 이걸 들 수 있다고?’
이중기 일행은 고소한 표정을 지었다.
팔공주 이향연은 깔깔 웃기까지 했다.
이준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
‘너무하군! 제왕은 가족의 정도 없다고 하더니 정말 날 경성에서 쫓아내려고 별 짓을 다하네! 정말 날 내치고 싶은 건가?’
이준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소자가 무슨 방법을 사용하든 어깨보다 더 높이 삼 식간만 추켜들면 통과인 것입니까?”
왕련은 이정을 돌아보았다. 이정이 덤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 네가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지만 않는다면 무슨 수를 써도 좋으니 정을 들고 삼 식간만 버티면 통과로 하겠다!”
“네! 소자 잘 알겠습니다!”
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의 도움만 받지 않는다면 무슨 수를 써도 된다고? 좋았어! 너희들한테 지렛대 원리가 뭔지 똑똑히 보여줄게! 나에게 지렛점만 준다면 황궁까지도 들어올려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