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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어머 재활용이라도 되려면 예쁘게 좀 꾸미고 다니지

  • ***
  • 전남편 김민준과 이연희의 불륜을 알게된 건 사실 그 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 그보다 한참 전부터 알고는 있었다.
  • 확증이 없었을 뿐.
  • 전남편 김민준과 나 사이에는 아기가 좀처럼 생기질 않았다.
  • 시댁에서는 아침저녁으로 일하고 학회에 나가는 나를 탓했다.
  • 그리고 그 등쌀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시험관 시술을 받고 있었다.
  • 몸과 마음이 다 망가져갔다.
  • 김민준과 간호사 이연희가 주고받은 카톡을 발견하고, 내가 김민준을 추궁하자,
  • 그는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갔다.
  • “이게 뭐야. 달콤한 우리 자기 입술 먹고 싶다? 이게 무슨 소리야. 당신. 이연희 간호사가 왜 이런 문자를 보내!”
  • “아 그거. 이 간호사 남친한테 보낼 거 잘못 보낸 것같아.”
  • “집에 먼저 올라가 있어? 이 간호사가 설마 우리집 비번도 알아?”
  • “아 무슨 소리야. 그 때 잠깐 물건 가지러 우리 집에 보낸 거야. 너도 알잖아. 너 진짜 왜그러냐. 신경쇠약이야. 너. 시험관 시술 받다가 의부증 걸리는 사례 한두 번 보냐. 너 정신과 의사야. 너답지 않게. 이성을 좀 찾아.”
  • 그 이후로 그는 집에올 때면 카톡을 다 지워버렸다. 아무 증거도 남지 않도록.
  •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나는 그 이후 의심만 할 뿐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다.
  • 그러다 민준이 이연희와 키스를 하는 걸 내게 들킨 거다.
  • 지금도 그 때만 생각하면 손이 바들바들 떨린다.
  • 그런 억울한 일.
  • 절대 다시는 경험하지 않을 거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 강한 사람이 될 거라고.
  • 전남편 김민준에게 바보같이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그런 짓 절대 다시는 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 그 이후 내 성격은 180도 바뀌었다.
  • 억울한 일은 절대
  •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 이렇게 억울할 때, 기분 나쁠 때면 그자리에서 바로 되갚아 주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 먹었다.
  • 새치기를 해온 아주머니가 주변을 의식하며 나를 쳐다봤다.
  • 팔짱을 낀 채로 일부러 내가 주변에 들릴 만한 소리로 말했다.
  • “오.지.랖. 그거. 일종의 정신병이거든요.”
  • “하. 기. 기가 막혀.”
  • 얼떨결에 명함을 받아든 아주머니는 황당하다는 듯 얼굴이 새빨개지며 고개를 휙 돌렸다.
  • 그제서야 나를 흘끔흘끔 쳐다보던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고 제 할일을 했다.
  • 은근히 차오르는 시원한 기분에 막혀있던 가슴이 뚫어뻥처럼 뚫리는 듯했다.
  • 그때 민준과 이연희 간호사의 불륜을 목격했을 때도
  • 이렇게 대처했다면,
  • 내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을까.
  • ***
  • 그여자다.
  • 지훈이 불가리 매장에 도착해 시영을 발견했다.
  • 시영은 왠 아주머니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 ‘분명 예약을 해줬는데.’
  • 매장에 들어가지 않고 줄을 서 있는 시영을 의아해 하며 지훈이 막 그녀에게 다가서려 하던 참이었다.
  • 지훈의 귀에 시영의 당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오지랖. 그거 일종의 정신병이거든요.”
  • 시영의 말을 듣고 지훈이 풉.하고 실소를 터트렸다.
  • 재미있는 여자군.
  • 지훈은 시영이 마음에 들었다. 다만 여자로서가 아니라, 일종의 사업 파트너로서.
  • 그리고 까다로운 자신의 마음에 들었다면, 이 회장의 마음에도 들 게 분명했다.
  • ‘이상하네.’
  • 수련과 이혼한 이후,
  • 여자와 5분 이상 말을 섞어본 적이 없었다.
  • 믿었던 수련에게 뒤통수를 맞아서였을까,
  • 아니면 지훈과 결혼하려 신발 벗고 들이대는 여자들이 지겨워서였을까,
  • 지훈은 여자를 믿지 않았다.
  • 그에게 여자는 다 겉과 속이 다른 내숭뿐인 여우같았다.
  • 언제든 그의 뒤통수를 치고 배신할 수 있는 존재들.
  • 그런 지훈이 김시영 저 여자에게는 호기심이 생기고 있었다.
  • ‘저 여자는 대체 뭐가 다른 거지.’
  • 그쪽 나랑 재혼할래요?
  • 자신에게 결혼하자 들이대는 여자는 34 평생 동안 1톤 트럭 백 대는 채우고도 남았다.
  • 그런데, 이상하게도
  • 자신의 넥타이를 잡아끌던 시영의 이 말 한마디에 지훈은 호기심이 일었다.
  • 시영을 호텔방에 데려와 놓고, 그녀의 뒷조사를 했다.
  • 전남편 김민준, 그리고 이복 여동생 이연희와 연관된 여자였다.
  • 단순히 자신의 적의 적이라 동지애가 드는 걸까.
  • 예쁜 얼굴이긴 했다. 옷을 저렇게 허름하게 입고 화장기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영은 수수하게 예뻤다.
  • 하지만 예쁜 여자는 지훈의 주변에 모래알보다 더 많다.
  • 지훈은 시영이 불가리 매장 안으로 들어가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 하얀 박스티에 허름한 쓰레빠를 끌고 매장 안으로 들어가는 시영은
  • 허리가 꼿꼿하고 당당해 보였다.
  • 지훈이 손을 바지주머니에 넣고는 시영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 마치 재미있는 축구경기를 보는 듯이.
  • 안병욱 박사와 진료를 마치고 시영을 만나러 오면서
  • 지훈은 그녀와 결혼식을 하는 게 맞는지 아닌지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민했다.
  • 하지만 이제 분명해졌다.
  • ‘이유가 어쨌건, 지금 나한테 필요한 여자인 건 분명하군.’
  • 지훈의 눈빛이 다시 차갑고 냉소적으로 바뀌었다.
  • 지훈은 곧바로 매장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시영이 나올 때까지 한참을 기다렸다.
  • ***
  • 내 앞에 사람들이 다 매장으로 들어가고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불가리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아까 나를 위아래로 무시하던 구찌가방 아주머니는 잠시 뒤 자리를 피했다.
  • 남자 직원이 나와 나를 안으로 안내했다.
  • “고객님. 무슨 제품 보러 오셨나요?”
  • “결혼반지요.”
  • 내가 말하자 남자는 살짝 놀란 눈빛으로 내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하지만 그는 내 옷차림에 크게 개의치 않고 반지를 몇 개 꺼내 내게 보여주었다.
  • “혹시 실례지만, 남편분 반지 사이즈는 알고 계신가요?”
  • 남편 반지 사이즈라고.
  • “아뇨? 몰라요.”
  • “그럼 곤란하신데요. 아무래도 반지 사이즈는 크게 조절이 어려워서.”
  • 매장 직원이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 “다음에 남편분 모시고 같이 오시는 게 어떨까요?”
  • 직원의 반응이 이해될 것도 같았다. 보통 결혼반지는 남자 여자가 같이 보러 오지, 여자 혼자 이렇게 궁상맞게 결혼반지를 보겠다고 오지는 않기 때문이다.
  • 이지훈 대표가 예약을 했다고 했으니까, 한번 말해볼까?
  • “그 사실 남편될 사람이 먼저 여기 매장에 예약을 했어요.”
  • “그래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 직원이 내 옷차림을 훑어보며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 “이 지훈이요.”
  • “네. 이지훈 고객님…………………………….네에!?”
  • 그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가 모니터 화면을 한참 보며 무언가를 확인했다.
  • “세상에. 죄송합니다. 고객님. 저희가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 남자직원이 얼굴이 사색이 되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그가 다른 세 명의 직원들과 함께 나왔다.
  • 아까 나를 문전박대하던 여직원도 그걸 보더니 얼굴이 사색이 되어 나를 쳐다보았다.
  • 안에서 나온 직원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보이는 40대 중반 정도 되는 남직원이 내게 꾸벅 인사를 하며 말했다.
  • “정말 죄송합니다. 고객님. 저희 직원들이 아직 신입이라. 뭘 전달을 잘못 받은 모양입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 “괜찮..아요.”
  • 내가 멋쩍게 직원의 사과를 받아주었다.
  • ‘이지훈‘이라는 이름 세 글자의 마법같은 힘을 알게된건 이 순간부터였다.
  • 매장 안의 직원들 절반이 나를 에워싸고 인사하며 내게 필요한 게 없는지 묻기 시작했다.
  • “고객님. 에어컨 바람이 차진 않으신가요?”
  • “고객님. 커피 아니면 녹차 어떤 게 좋으신가요?”
  • “의자 쿠션입니다. 등에 대고 편하게 앉으세요 고객님.”
  • 고객님 고객님~하는 상냥한 목소리들이 내 귀를 얼얼하게 했다.
  • ‘뭐야. 이지훈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어?’
  • “고객님. 이지훈 고객님께서 예약하신 제품입니다.”
  • 나이 많은 직원분이 내게 보석함 하나를 내밀었다. 보석함은 그냥 투박한 갈색 나무상자였다. 실망스러움에 애걔걔 소리가 절로 나왔다.
  • 그러나 직원이 그 보석함을 여는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숨이 멎는 듯했다.
  • “저희 매장의 가장 고귀한 아트피스입니다. 이름은 인피니트 러브. 도합 500캐럿의 완전무결한 다이아가 박혀 있습니다.”
  • 그 광채에 눈이 부실 것만 같았다. 다이아가 촘촘히 박혀 스스로 빛을 내고 있는 목걸이와 귀걸이 그리고 반지 세트는 내 가슴을 파도처럼 요동치게 만들었다.
  • ‘다이아몬드 1캐럿만 해도 100만 원은 족히 넘는데. 이건 대체 얼마야.’
  • 내 눈빛이 흔들리는 걸 보았을까, 직원이 내게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 “결제는 이미 오늘 대표님께서 하셨습니다.”
  • “혹시나 궁금해하실까봐 말씀드리지만. 가격은 30억입니다.”
  • “뭐라구요?”
  • 헉. 집 한 채 가격이구만. 민준과 내 신혼집이 고작 3억짜리 전셋집이었는데.
  • 빛을 내는 목걸이는 마치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빛같았다. 이런 화려한 걸 하면 내 얼굴이 죽지 않을까. 보석을 보는 내 가슴은 두근거렸지만, 되려 그 화려함에 기가 죽는 듯했다.
  • “네. 고객님. 그럼 포장해드리겠습니다.”
  • “제가 가져가요? 그거?”
  • “네. 가져가셔야죠. 비용도 지불하셨는데.”
  • 직원이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 “아. 아니. 포장해주세요.”
  • 세상에 30억짜리 들고 다니다가 도난당하면 어쩌라고. 재벌들은 돈씀씀이가 헤프다더니. 걍 환불하고 집사달라고 할까. 요즘 집값도 비싼데.
  • 아님 이거 중고나라같은 데 팔고, 이참에 내집마련이나 해봐?
  • ***
  • 세상에 너무 비싼 보석을 만지니까 실감이 나지 않았다.
  • 이지훈 대표는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 30억짜리 쇼핑백을 들고 이매장 저매장을 기웃거리며 한시간 정도를 기다린 듯하다.
  •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지. 그냥 집에 갈까.
  • 머리라도 제대로 감고 나올걸.
  • 한참을 기다리다 딱 화장실만 다녀오고 집에 먼저 가야겠다 생각했다.
  • 그런데,
  • 그 화장실에서
  • 기다리던 이지훈 대표 대신 내가 절대 기다리지 않던 사람을 만났다.
  •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나오는 길
  • 익숙한 얼굴, 익숙한 목소리가 묵직한 쇠사슬처럼 내 발을 바닥에 묶었다.
  • “오빠아. 나 잠깐 화장실 다녀올게용.”
  • “연희야 이거 챙겨가야지.”
  • “아앙. 맞다. 역시 울 민준오빠가 최고야.”
  • 저 익숙한 정장 자켓.
  • 그리고 넓은 어깨 185가 넘는 큰 키.
  • 모델같이 잘난 얼굴.
  • 전남편 김민준.
  • 그리고 그 옆엔 불륜녀 이연희.
  • 두 사람이 나를 발견하고는 딱딱하게 표정이 굳었다. 아니 저 여자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떠오르는 듯했다.
  • 왜 하필 이럴 때 저 두 사람을 마주치는 건지.
  • 입술을 꽉 깨물었다.
  • 당황한 우리 세 사람 가운데 까만 먼지같은 정적이 가득했다.
  • 세 사람 사이의 정적을 깨고 나온 건 이연희 간호사였다.
  • “어머. 재활용이라도 되려면 예쁘게 좀 꾸미고 다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