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내가 결혼한 유령
- 6년 후.
- 여의도.
- 잿빛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집고 내려와 도시를 은빛으로 물들였다. 통유리 너머로 펼쳐진 빌딩 숲은 유리와 콘크리트, 돈과 권력이 쌓아 올린 세상이었다.
- 하지만 이제 그 모든 것은 하정우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 사업도.
- 펜트하우스도.
- 이 사무실도.
- 모든 걸 가졌지만, 그녀만은 없었다.
- 6년.
- 그는 아직도 그녀를 찾고 있었다.
- 존재하지 않는 그림자를 쫓는 것처럼.
- 하정우는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 여의도가 내려다보이는 코너 오피스는 그의 취향대로 꾸며져 있었다. 군더더기 없이 정돈된 공간, 비서가 미리 올려둔 일정표, 이미 식어 버린 커피까지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 방 안에는 디자이너 시계의 초침 소리만 규칙적으로 울렸다.
-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기 전까지는.
- “아직도 그 일 때문에 골치 아프냐?”
- 강지훈이 자기 사무실처럼 자연스럽게 걸어 들어왔다.
- 이곳의 주인은 아니었지만, 허락도 없이 이 방에 들어올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 하정우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 익숙한 능글맞은 미소를 보는 순간, 좋은 얘기는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 “그 표정 보니까 결과가 나온 모양이네.”
- 강지훈은 벽에 기대 두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 여전히 느긋하고, 여유로웠다.
- “벌써 6년이야.”
-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 “넌 6년 동안 그 여자를 찾았어.”
- “그래서?”
- “이쯤이면 이제 그만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냐.”
- 잠시 말을 멈춘 강지훈이 하정우를 바라봤다.
- “정우야, 너 이제 결혼하잖아. 강씨 가문 둘째 딸이랑.”
- 하정우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잠시 눈을 감았다.
-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 “도무지 이해가 안 돼.”
- 낮게 중얼거린 그가 헛웃음을 지었다.
- “처음엔 강다해였는데 어느새 강다솜으로 바뀌어 있었어. 내가 무슨 할인 상품도 아니고.”
- 강지훈이 피식 웃었다.
- “별반 다를 것도 없지. 넌 태양그룹 후계자잖아. 애초에 결혼을 선택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야.”
- 하정우는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 “난 강다솜 얼굴도 몰라.”
- “알 필요도 없고.”
- 강지훈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 “사랑해서 하는 결혼도 아니잖아. 할머니 뜻이고. 집안을 이어야 하니까.”
- 하정우는 한숨처럼 낮은 숨을 내쉬었다.
- “할머니만 아니었다면...”
- 말을 끝맺지 못하자 강지훈이 웃으며 받아쳤다.
- “그랬으면 아직도 라스베이거스에서 ‘사신’ 노릇하면서 이름도 모르는 여자나 찾고 있었겠지.”
- 하정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잠시 그를 바라보던 강지훈이 휴대전화를 꺼냈다.
- “그래도 결혼할 사람 얼굴은 알아야 하지 않겠냐?”
- 화면을 몇 번 넘긴 뒤 하정우에게 내밀었다.
- 사진에는 강다솜의 SNS가 떠 있었다.
- 명품 옷.
- 고급 칵테일.
- 휴양지 사진.
- 완벽하게 계산된 미소.
- 강다솜은 분명 아름다웠다.
- 하지만 이상하게도 진짜 같은 모습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 “내 취향은 아니네.”
- 하정우가 무심하게 중얼거리자 강지훈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 “계속 넘겨 봐.”
- 하정우는 화면을 한 번 더 넘기다가 손을 멈췄다.
- [생일 축하해, 언니.]
- 짧은 글과 함께 사진 한 장이 올라와 있었다.
- 두 여자가 나란히 서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한 사람에게만 머물렀다.
- 그녀는 카메라를 향해 억지로 웃지도 않았고, 일부러 포즈를 취하지도 않았다.
- 어딘가 다른 곳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
- 금방이라도 그 자리를 떠날 것처럼 담담하고 차분한 분위기.
- 강다솜은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그 미소는 겉으로만 화려했다.
- 반면 언니는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눈길을 붙잡았다.
- 사진 아래 적힌 이름.
- 강다해.
- 하정우의 시선이 그 이름 위에서 멈췄다.
- “내 취향은 이쪽인데.”
- 작게 흘린 말에 강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 “강다해. 원래 네가 결혼할 사람이었지.”
- 하정우는 말없이 사진을 바라봤다.
- 우연히 마주친 사진 한 장일 뿐이었다.
- 그런데도 쉽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이상하네.”
- 그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처음 보는 얼굴인데.”
- 강지훈이 가까이 다가와 화면을 흘끗 보더니 웃었다.
- “또 강씨 가문 여자냐?”
- 하정우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 “아니. 설명은 못 하겠는데. 왠지 낯설지가 않아. 그런데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 잠시 침묵이 흘렀다.
- “난 6년 동안 이름도 모르는 여자를 찾아다녔어.”
- 하정우는 사진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나중에 헬기 조종사에게 들었어. 그날 밤 헬기 안에서 나랑 그 여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고.”
- 잠시 숨을 고른 그가 말을 이었다.
- “좌석에는 피가 묻어 있었고, 호텔에서는 침대 시트를 폐기했다고 하더라. 다음 날 눈을 떠 보니 난 혼자였고, 손에는 반지 하나만 남아 있었어. 그 사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
- 강지훈은 혀를 차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 “아직도 안 믿겨. 네가 진짜 그런 일을 벌였다는 게.”
- “약에 취해 있었으니까.”
- 하정우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차갑게 말했다.
- “애초에 네 총각 파티 아이디어부터가 문제였잖아. 하마터면 스트리퍼랑 결혼할 뻔했다고.”
- 강지훈이 피식 웃었다.
- “그건 명예훼손인데. 스트리퍼는 아니었어.”
- “그래, 맞아.”
- 하정우도 옅게 웃었다.
- “난 필름이 끊길 정도로 취한 적도 없고, 얼굴도 기억 못 하는 여자랑 합법적으로 결혼한 적도 없어.”
- 그는 강지훈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 “전부 네 덕분이야. 술에 약을 탔잖아.”
- 강지훈은 두 손을 번쩍 들며 항복하는 시늉을 했다.
- 장난기 어린 미소는 조금 옅어졌지만, 끝내 사라지지는 않았다.
- “할머니한테는 말씀드렸어?”
- 하정우는 대답 대신 차갑게 그를 바라보았다.
- 강지훈은 곧바로 손을 내저었다.
- “알았어, 안 물을게.”
- 작게 한숨을 쉰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 “그래도 할머니도 정말 오래 기다려 주신 거야.”
- 하정우는 휴대전화를 조용히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 “내가 제일 화나는 게 뭔지 알아?”
- 강지훈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 “뭔데?”
- “그 여자는 날 찾지 않았어.”
- 그 한마디가 떨어지자 사무실은 금세 조용해졌다.
- 강지훈도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 아마 처음이었을 것이다.
- 무슨 말로 위로해야 할지 몰랐던 건.
- “이건 내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야.”
- 하정우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결혼증명서도 있었고 반지도 남아 있었어. 그날 밤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고, 변호사도 혼인신고를 확인했어. 헬기 조종사 역시 그 여자를 봤고.”
-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씁쓸하게 웃었다.
- “전부 사실이야.”
- 강지훈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 “그 여자도 기억을 잃은 거 아닐까?”
- 하정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 “아니. 라스베이거스에서 결혼한 걸 어떻게 잊어.”
-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
- “하물며... 상대가 나라면 더더욱.”
- 강지훈은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
- “그 여자는. 날 찾아오지 않기로 선택한 거야.”
- 잠시 생각하던 강지훈이 씁쓸하게 웃었다.
- “내가 보기엔 말이야 그 여자 입장에서는 술만 마시면 사고 치는 이상한 남자로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지.”
- 그는 하정우를 흘겨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 “솔직히 그날 밤만큼은 네 인생 최악의 흑역사였잖아.”
- 하정우는 부정하지 않았다.
-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작게 웃으며 말했다.
- “맞아.”
- 강지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기지개를 켰다.
- “아무튼 이제 들어가. 할머니가 요즘 너 찾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
- 하정우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 “반지를 잃어버렸다고 말씀드릴 거야.”
- 강지훈은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 “진심이야?”
- “진심이야.”
- 짧은 대답을 들은 강지훈은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참... 비밀도 많고, 고집은 더럽게 세.”
-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사무실을 나섰다.
- 문이 닫히자 하정우는 창가로 걸어갔다.
-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여의도는 손바닥 위 모형 도시처럼 작아 보였고, 도로를 오가는 사람들은 개미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 하지만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 머릿속을 떠도는 건 오래전 그날 밤의 기억뿐이었다.
- 희미하게 들려오던 목소리와 살결을 스치던 손끝, 어둠 속에서 느껴졌던 그녀의 체온, 그리고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 준 자신의 반지까지.
- 그 기억만은 또렷하게 남아 있었지만, 정작 그녀의 얼굴만큼은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 단 한 번도.
- 마치 누군가 기억에서 얼굴만 지워 버린 것처럼.
- 그래서 더 답답했다.
- 지금 길에서 스쳐 지나가도 그녀를 알아볼 자신이 없었다.
- 어쩌면 이미 몇 번이나 마주쳤는데도 그냥 지나쳤을지 몰랐다.
- 하정우는 눈을 감았다.
- 혹시라도 기억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어 목소리 하나, 이름 하나, 사소한 단서라도 붙잡아 보려 했지만 끝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 남아 있는 건 그날의 열기뿐이었다.
- 귓가를 스치던 숨결.
- 품 안을 파고들던 체온.
- 그리고 어둠 속에서 들려왔던 그녀의 목소리.
- “그럼 안아줘.”
- 하정우는 천천히 눈을 떴다.
- 턱선이 단단히 굳어 있었다.
- 그녀가 누구인지도, 왜 떠났는지도, 지금 어떤 이름으로 살고 있는지도, 아직도 그 반지를 끼고 있는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 그에게 중요한 건 단 하나였다.
- 그녀는 그의 아내였다.
- 그리고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찾을 것이다.
- 그녀가 어디에 숨어 있든, 이 도시를 모조리 뒤져서라도.
- 하정우는 재킷을 집어 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 이제 할머니를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
유료회차
결제 방식을 선택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