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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집에서 쫓겨나다

  • “당장 나가!”
  • 최미숙의 고함이 집 안을 뒤흔들었다.
  • 강다해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하지만 놀라서가 아니었다. 임신 테스트기에 두 줄이 뜬 순간부터, 그리고 반지를 들킨 순간부터 이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 “미숙아, 그만해!”
  • 강명수가 버럭 소리쳤다.
  • “애부터 진정시키고, 아이 아빠가 누군지는 들어봐야 할 거 아니야.”
  • “전 관심 없어요.”
  • 최미숙는 단호했다.
  • “원래 저 애는 하정우 씨와 결혼했어야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정체도 모르는 놈 애를 배고 왔잖아요.”
  • 그 말만 입에 올려도 더럽다는 듯 얼굴을 찌푸린 그녀는 강다해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수치심이든, 눈물이든, 뭐라도 하나 찾아내면 그대로 짓밟을 기세였다.
  • “적어도 누가 널 임신시켰는지는 알아야 하는 거 아니야?”
  • 강다해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그 침묵이야말로 최미숙이 가장 견디지 못하는 것이었다. 강다해를 더 이상 마음대로 휘두를 수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 하지만 애초에 최미숙은 진실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강다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도, 뱃속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 그녀에게 중요한 건 오직 하정우뿐이었다.
  • 얼굴은 한 번도 본 적 없었지만, 이름과 막대한 재산만큼은 모를 수 없는 정략결혼 상대였다. 대대로 부를 이어 온 진짜 상류층으로, 개인 섬을 갖고도 언론에 얼굴 한 번 비칠 필요 없는 남자였다.
  • 부모는 강다해를 그 집안에 시집보내기만 하면 회사도 살아날 거라고 믿었다.
  • 하지만 임신으로 모든 계획이 산산이 무너졌다.
  • 강다해는 아이 아빠가 누구인지 말해 줄 수 없었다.
  • 부끄러워서가 아니었다.
  • 정말 몰랐다.
  • 라스베이거스에서의 기억은 흐릿했다. 화려한 조명과 술, 희미하게 스쳐 지나간 웃음소리,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 그리고 혼란 속에서 나눈 약속만 어렴풋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목숨이 달린 일이라 해도 그녀는 이름 하나 말할 수 없었다.
  • “언니, 임신했어?”
  • 들뜬 목소리가 계단 위에서 들려왔다.
  • 강다솜이였다.
  • 맨발에 실크 잠옷 차림으로 난간에 몸을 기댄 그녀는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발견한 사람처럼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강다해를 내려다보는 얼굴에는 놀람보다 기대가 먼저 어려 있었다.
  • “그럼... 하정우 씨와 결혼하는 사람은 내가 되는 거야?”
  • 복권이라도 당첨된 사람처럼 들뜬 목소리였다.
  • 강다해는 헛웃음을 흘렸다.
  • “누군가는 소원 이루게 됐네.”
  • 강다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 강다해는 마지막 희망을 품고 어머니를 바라봤다. 혹시라도 여기서 멈춰 주길 바랐지만, 최미숙은 그녀를 보지 않았다.
  • 대신 강명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 저 미소가 무슨 뜻인지 강다해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최미숙은 무언가를 꾸밀 때마다 꼭 저런 표정을 지었다.
  • 강명수는 잠시 망설이다 강다해와 눈을 마주쳤다.
  • 지치고 무뎌진 눈이었다. 수없이 체념을 반복하며 모든 걸 포기한 사람의 눈.
  • 그리고 그 순간, 강다해는 아버지가 또다시 자신을 포기했다는 걸 알아버렸다.
  • “저쪽에서는 첫째 딸을 원했어.”
  • 강명수가 힘없이 말했다.
  • “하지만 다해는 임신했잖아요. 배 나온 딸을 어떻게 보내요?”
  • 최미숙가 곧바로 받아치자 강명수는 한동안 말없이 서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다솜이를 보내자.”
  • 최미숙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 “우리 다솜이가 훨씬 예쁘잖아요. 우리 딸이 이제 재벌가 며느리가 되는 거예요.”
  • 강다솜은 활짝 웃었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던 최미숙의 얼굴은 순식간에 다시 차갑게 굳었다.
  • 이번에는 시선이 강다해를 향했다.
  • “넌 이 집에서 나가.”
  • 그녀는 결심을 굳힌 사람처럼 성큼성큼 다가왔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선고가 내려지는 것 같았다.
  • “당장 나가.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고, 널 임신시킨 그놈이나 찾아가.”
  • 목소리에는 분노도 슬픔도 없었다.
  • 오직 혐오뿐이었다. 마치 상해 버린 음식이라도 치우듯 차갑게 내뱉는 말이었다.
  • 강다해는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바라봤지만, 강명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버렸다. 마치 그녀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 취급을 했다.
  • 그 한 번의 외면이 따귀보다 훨씬 아팠다.
  •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주 잠깐 기다려 봤다.
  • 단 1초만이라도 자신을 불러 주길 바랐지만, 그는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 강다해는 말없이 몸을 돌렸다.
  • 변명도 하지 않았고, 울지도 소리치지도 않았다. 그런 모습을 보일수록 저 사람들만 더 만족시켜 줄 뿐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녀는 유령처럼 조용히 복도를 걸었다. 얇은 잠옷은 어느새 한기를 머금고 있었고,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집 안 공기마저 자신을 밀어내는 것만 같았다.
  • 벽에는 가족사진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억지로 웃고 있는 얼굴들과 액자 속에 가지런히 걸린 행복은 이제 와 보니 모두 거짓뿐이었다.
  • 강다해는 잠시 그 앞에 멈춰 섰다가 조용히 현관문을 열었다.
  • 문이 열리자 차가운 밤공기가 얼굴을 세게 후려쳤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매서운 바람이었다. 얇은 잠옷도, 마지막 남은 자존심도 단숨에 꿰뚫어 버릴 만큼 차가웠다.
  • 강다해는 맨발로 집을 나섰다.
  • 몸에 지닌 건 잠옷과 휴대전화 하나뿐이었다. 다행히 가족들은 그것까지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 문이 그녀의 등 뒤에서 천천히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