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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임신

  • 강다해는 목끝까지 치밀어 오른 신물을 참지 못하고 눈을 떴다.
  •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는 비틀거리며 욕실로 뛰어들었다. 무릎이 타일 바닥에 세게 부딪혔지만 아픈 줄도 몰랐다. 변기를 붙잡은 채 몸을 반으로 접고, 속에 남은 것까지 모조리 토해 낼 기세로 헛구역질을 쏟아냈다.
  • 배 속이 뒤집히는 듯 울렁거렸다. 내장이 통째로 비틀리는 것처럼 속이 뒤엉켰다.
  • 이 지긋지긋한 입덧도 벌써 5일 째였다.
  •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 급하지만 다급한 사람의 걸음은 아니었다. 짜증과 불쾌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너무도 익숙한 발걸음이었다.
  • 최미숙은 욕실 문 앞에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강다해만 보면 어김없이 짓는 그 싸늘한 얼굴이었다.
  • “라스베이거스에서 돌아온 지도 벌써 2주야.”
  • 잠시 뜸을 들인 그녀가 차갑게 말했다.
  • “너, 임신했지?”
  • 강다해는 대답하지 않았다. 변기에 얼굴을 묻은 채 겨우 숨만 고를 뿐이었다. 입덧이라는 말 한마디조차 꺼낼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 “여보!”
  • 최미숙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
  • 거실에서 리모컨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났고, 곧 묵직한 발걸음이 다가왔다.
  • 강명수가 낡은 가운 차림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헝클어진 머리에 얼떨떨한 표정까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 “무슨 일이야?”
  • “당신 딸이 임신했어요.”
  • 짧은 한마디에 집 안 공기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 강다해는 차라리 변기 속으로 사라질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미숙아... 다해 아직 스무 살이잖아.”
  • 강명수의 목소리에는 당혹감만 가득했다.
  • 강다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가운 변기 가장자리에 이마를 기댄 채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속은 사포로 긁어낸 것처럼 쓰라렸다.
  • 최미숙은 잠옷 주머니에서 작은 흰 상자를 꺼내 강다해 앞에 내밀었다.
  • 임신 테스트기였다.
  • 그녀는 죄를 입증할 증거라도 들이밀 듯 무표정하게 말했다.
  • “가서 확인해.”
  • 강다해는 말없이 테스트기를 받아 들었다.
  • 손안에 들어오는 건 작은 플라스틱 하나뿐인데도 이상하리만큼 무겁게 느껴졌다.
  • 욕실 문을 닫은 그녀는 한동안 그것만 바라봤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릴 만큼 거세게 뛰었다.
  • 검사를 마치고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욕실 문이 벌컥 열렸다.
  • 최미숙은 안으로 들어와 테스트기를 그대로 빼앗아 밖으로 나갔다.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입가에는 늘 피해자인 척할 때마다 떠오르던 냉랭한 표정이 걸려 있었고, 발끝은 초조하게 바닥을 두드리고 있었다.
  • 잠시 뒤.
  • 집 안을 뒤흔드는 비명이 터졌다.
  • “거봐! 내 말이 맞잖아!”
  • 최미숙은 테스트기를 높이 치켜들었다.
  • “임신이잖아!”
  • 강명수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 “세상에...”
  • 최미숙은 다시 강다해를 노려봤다.
  • “누구 아이야?”
  • 강다해는 입을 다문 채 고개만 숙였다. 목은 바짝 말라 있었고, 목소리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 순간 최미숙이 성큼 다가오더니 망설임 없이 손을 휘둘렀다.
  • 짝!
  • 강다해의 얼굴이 옆으로 홱 돌아가고 시야가 크게 흔들렸다.
  • “내가 묻잖아, 이 더러운 년아!”
  • 따귀보다 더 아픈 건 그 손길에 망설임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너무도 익숙한 일이라는 듯, 숨 쉬듯 자연스럽게 손이 올라왔다.
  • 강다해의 눈에서 끝내 눈물이 흘러내렸다.
  • 하지만 최미숙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 엄마의 사랑은 늘 조건부였다.
  • 그리고 강다해는 그 조건을 단 한 번도 만족시킨 적이 없었다.
  • 그때 최미숙의 시선이 강다해의 왼손에 멈췄다.
  •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 “그 반지 뭐야?”
  •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지만, 아까보다 훨씬 서늘했다.
  • 그녀는 강다해의 손목을 거칠게 붙잡았다.
  • 손가락에는 큼직한 은빛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매끈하고 묵직한 반지 위에는 짙은 붉은 보석이 박혀 있었는데, 불꽃 한가운데서 막 꺼낸 듯 깊고 강렬한 빛을 품고 있었다.
  • 싸구려 보석처럼 번쩍거리지는 않았다. 대신 살아 있는 불꽃처럼 은은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 누가 봐도 값비싼 반지였다.
  • 단순히 비싸서가 아니라, 오랜 시간을 품고 살아온 듯한 묵직한 품격이 느껴졌다.
  • 강다해도 이 반지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 인터넷을 샅샅이 뒤져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런 정보도 찾을 수 없었다.
  • 라스베이거스에서 그녀가 얻은 건 아이만이 아니었다.
  • 그곳에서 그녀는 결혼까지 했다.
  • 그 순간 최미숙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 실소가 아니었다.
  • 금방이라도 무너질 사람처럼, 정신이 나간 듯 갈라진 웃음이었다.
  • “누가 준 거야?”
  • 그녀는 강다해의 손을 움켜쥔 채 반지를 눈앞으로 들어 올렸다.
  • “이 반지...”
  • 강다해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 말을 하고 싶어도 목소리가 몸 어딘가에 갇혀 버린 것만 같았다.
  • 그녀는 어머니를 바라보다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 꺼진 TV와 바닥에 나뒹구는 리모컨, 구석에서 말라 가는 화분까지. 집 안은 늘 그대로였지만, 자신만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 최미숙은 이번에는 임신 테스트기를 강다해 눈앞으로 들이밀었다.
  • “어른인 척하고 싶었어?”
  • 비웃듯 입꼬리를 올린 그녀가 차갑게 말을 이었다.
  • “좋아. 그럼 이제 어른답게 책임져. 누가 이 반지를 준 거야?”
  • 강명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미숙아... 이제 그만하자.”
  • 하지만 최미숙은 남편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 “당신은 빠져 있어요.”
  • 한동안 침묵하던 강다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목소리는 자신조차 낯설 만큼 거칠고 메말라 있었다.
  •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알아요.”
  • 잠시 숨을 고른 그녀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 “실수였어요.”
  • 최미숙의 얼굴이 혐오로 일그러졌다.
  • “그 실수 하나로 네 인생까지 망쳐 버렸구나.”
  • 강다해는 한동안 어머니를 바라보다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 “제 인생이... 애초에 제 것이었던 적이 있었나요?”
  • 순간 최미숙도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 하지만 그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 “당장 이 집에서 나가.”
  • “미숙아...”
  • 강명수가 말리려 했지만 최미숙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 “안 돼. 자기가 선택한 일이잖아.”
  • 그녀는 싸늘한 눈으로 강다해를 내려다봤다.
  • “그러니까 그 결과도 이제 네가 직접 감당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