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임신했지만, 약해진 건 아니다
- 강다해는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 얇은 실크 잠옷 사이로 새벽 바람이 파고들었다. 살을 에는 찬 기운이 온몸을 감쌌지만,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 등 뒤에는 자신이 평생을 살아온 집이 있었다.
- 높은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검은 대문은 아침 햇살 아래서도 차갑게 빛났다. 마치 처음부터 그녀를 받아들인 적 없었다는 듯 선을 긋고 있었다.
- 강다해는 한동안 그 문을 바라봤다.
- 다시 들어가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 정말 끝났다는 걸, 이게 협박도 아니고 겁주기 위한 연극도 아니라는 걸 스스로 확인하고 싶었다.
- 그녀는 집에서 쫓겨났다.
- 맨발에, 아이를 가진 몸으로, 잠옷 한 벌만 걸친 채 쓰레기처럼 내쫓겼다.
- 하지만 부모는 한 가지를 몰랐다.
- 강다해에게는 아직 갈 곳이 있었다.
- 그녀는 잠옷 안쪽에 숨겨 둔 작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 손끝에 익숙한 감촉이 닿았다.
- 암호화된 전용 휴대전화였다.
- 레이싱 일정과 사업, 그리고 어머니가 절대 손댈 수 없는 일들을 처리할 때만 사용하는 휴대전화.
- 망설임 없이 번호 하나를 눌렀다.
- 신호음이 두 번 울리자 곧바로 연결됐다.
- “다해야.”
- 김수진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강다해는 잠시 입을 열지 못했다.
-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수진아.”
- 한참 만에 겨우 목소리가 나왔다.
- “나 좀 데리러 와.”
- 김수진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 “어디야?”
- “집 앞.”
- 강다해는 씁쓸하게 웃었다.
- “나랑 잠옷, 그리고 얼마 안 남은 자존심만 있어.”
- 김수진은 끝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 무슨 일이 있었는지.
- 왜 그런 목소리를 하고 있는지.
-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 그래서 그녀는 아직도 강다해의 가장 믿을 수 있는 비서였다.
- 해야 할 일만 하고, 쓸데없는 질문은 하지 않는 사람.
- “15분.”
- 짧게 말한 김수진은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 강다해는 두 팔로 몸을 감싸 안았다.
-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고, 아랫배는 묵직하게 당겨 왔다.
- 두 다리 사이에 남아 있는 불편한 통증이 그날 밤의 흔적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 하지만 떠오르는 기억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 제대로 기억나는 게 거의 없었다.
- 심호흡을 해 보려 했지만 숨은 자꾸 목에서 걸렸다.
- 등 뒤의 대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 창문 하나, 커튼 한 장도 움직이지 않았다.
- 그들은 강다해를 집 밖으로 내쫓은 것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 아예 그녀가 세상에서 사라지길 바라는 것 같았다.
- 14분쯤 지났을까.
- 무광 블랙 롤스로이스 팬텀이 조용히 집 앞으로 들어왔다.
- 자기 집 마당을 드나들 듯 여유로운 움직임이었다.
- 운전석에서 내린 김수진은 늘 그렇듯 온통 검은 차림이었다.
- 단정하게 넘긴 짧은 머리, 눈을 가린 선글라스, 흔들림 없는 표정.
- 사설 정보기관 요원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냉정한 분위기였다.
-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
- 강다해는 말없이 차에 올라탔다.
- 얇은 잠옷을 조금 더 여미자 부드러운 가죽 향이 몸을 감쌌다.
- 이상하게도 그 냄새가 조금 전까지 있던 집보다 훨씬 편안하게 느껴졌다.
- 차가 천천히 도로로 들어선 뒤에야 김수진이 룸미러 너머로 그녀를 한 번 바라봤다.
- “무슨 일이야?”
- “쫓겨났어.”
- 강다해는 담담하게 말했다.
- “임신이 이 집에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나 봐.”
- 김수진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 “그럴 줄 알았어.”
-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녀가 물었다.
- “반지는?”
- 강다해는 왼손을 들어 반지를 가볍게 보여 준 뒤 다시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 “그대로야.”
- 김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 “갑자기 지낼 곳을 구하기는 어려워.”
- 잠시 생각하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 “대신 파라다이스 호텔 최상층 스위트룸을 준비해 뒀어. 전용 출입구가 있고, 전담 버틀러도 붙어. 외부 사람은 물론 기자들도 쉽게 접근하지 못해.”
- 강다해는 창밖을 바라본 채 물었다.
- “얼마나 있을 수 있는데?”
- “원하는 만큼.”
- 김수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 “6개월 선결제해 놨어.”
- 강다해가 천천히 그녀를 돌아봤다.
- “내가?”
- 김수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것 같았거든.”
- 강다해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 “넌 정말 틀리는 법이 없네.”
- “안 틀릴 수 있는 일은 안 틀리는 편이지.”
- 차 안에는 다시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 창밖으로 도시 풍경이 천천히 뒤로 흘러갔다.
-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인생은 송두리째 뒤집혔다.
- 그런데 지금은 최고급 세단 뒷좌석에 앉아 그 모든 일을 남의 이야기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 집에서 멀어질수록 숨쉬기가 조금씩 편해졌다.
- 떨리던 손도 어느새 멈췄다.
- 가슴을 짓누르던 답답함도 조금씩 옅어졌다.
- 하지만 아랫배의 묵직한 존재감만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 차는 곧 파라다이스 호텔 지하 전용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 김수진은 출입 카드를 태그한 뒤 강다해를 데리고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는 중간에 한 번도 멈추지 않고 곧장 최상층으로 향했다.
- 문이 열리자 강다해는 저도 모르게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 은은한 나무 향이 감도는 실내와 널찍한 원목 바닥, 천장부터 바닥까지 이어진 통유리 너머로 도시 전경이 한눈에 펼쳐졌다.
- 집보다 더 넓은 주방.
- 그리고 무엇보다, 복도에서 어머니의 고함 소리를 들을 일 없이 마음 놓고 쓰러질 수 있는 커다란 침대.
- 강다해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비로소 눈앞의 현실을 천천히 받아들이는 시간이었다.
- “내일 아침까지 옷이랑 필요한 물건은 전부 가져다놓을게.”
- 김수진은 휴대전화를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
- “레이싱 팀도 전원 복귀시킬까?”
- 강다해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담담하게 말했다.
- “응. 다 불러.”
- 김수진이 고개를 들었다.
- “나 다시 경기 뛸 거야.”
- 잠시 침묵이 흘렀다.
- “뭐?”
- “다시 레이스에 나갈 거라고.”
- 김수진은 천천히 팔짱을 꼈다.
- “다해야. 넌 지금 임신했어. 그래도 뛸 거야.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고는 있는 거지?”
- 강다해는 김수진을 똑바로 바라봤다.
- “내 생각은 변하지 않아.”
- 잠시 입술을 깨문 그녀가 낮게 말을 이었다.
- “레이싱은 내가 버티는 방식이야. 그게 아니면 난 무너져. 가만히 앉아서 시간이 해결해 주기만 기다릴 순 없어.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아.”
- 그녀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 “난 계속 움직여야 해.”
- 김수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다해야.”
-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넌 다칠 수도 있어. 돈은 충분히 있잖아. 당분간 경기 안 뛰어도 생활하는 데 아무 문제 없고, 팀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어. 하지만 계속 레이스를 뛰면...”
- 그녀는 강다해의 배를 바라봤다.
- “너도 다칠 수 있고, 아이도 위험해질 수 있어.”
- 강다해는 씁쓸하게 웃었다.
- “길을 걷다가도 다칠 수 있어.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다칠 수 있고.”
- 그녀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 “세상은 다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 혼자 멈춰 서 있는 게, 나한테는 더 견디기 힘든 일이야.”
- 잠시 말을 멈춘 그녀는 천천히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 “난 약하지 않아.”
- 고개를 숙인 채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 “무력한 사람도 아니고.”
- 그녀는 두 손을 모아 쥔 채 나지막이 말했다.
- “난 그냥...”
- 숨을 길게 내쉰 뒤 겨우 말을 이었다.
- “뭐라도 해야 해.”
- 김수진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 오랜 침묵 끝에 천천히 의자를 끌어와 강다해 맞은편에 앉았다.
- “알겠어.”
- 그녀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 “대표님이 결정한 일이니까. 레이스를 원하면 내가 준비할게.”
- 잠시 휴대전화를 확인한 그녀가 덧붙였다.
- “다음 주까지 세 경기까지는 일정 잡을 수 있어. 대신 계획은 알아야겠어.”
- 강다해는 창밖을 바라본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계획은 간단해. 난 계속 경기에 나갈 거야. 필요하면 매일이라도.”
- 그녀는 김수진을 바라봤다.
- “그동안 넌 3개월 안에 모든 걸 정리해. 새로 지낼 곳도 마련하고, 신분 관련 서류도 정비하고, 내 자산도 보호하고, 언론도 막아.”
- 잠시 숨을 고른 그녀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 “난 하정우 쪽 사람들에게도, 우리 부모에게도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아.”
- 김수진은 곧바로 메모를 시작했다.
- “알겠어.”
-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 “그럼 임신은?”
- 강다해는 자신의 배를 내려다봤다.
- “당분간은 숨길 거야. 더는 숨길 수 없을 때까지.”
- 그녀는 옅게 배를 쓸어내렸다.
- “배가 나오기 시작하면 넉넉한 레이싱 슈트를 입으면 되고, 헬멧도 벗지 않으면 돼. 그 이후는 그때 가서 생각할게.”
- 김수진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 “경기 중 몸이 안 좋아지면?”
- “안 그럴 거야.”
- “만약 그렇다면?”
- 강다해는 잠시 생각하다 조용히 답했다.
- “그땐 바로 경기를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찾으면 돼.”
- 김수진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지막 질문 하나만큼은 끝내 삼키지 못했다.
- “아이 아빠가 누군지는 정말 말 안 해 줄 거야?”
- 강다해는 통유리 너머로 반짝이는 도시를 바라봤다.
-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별들처럼 수많은 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 “나도 모르는데.”
- 쓴웃음과 함께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어떻게 말해.”
- 김수진은 더 묻지 않았다.
- 말없이 휴대전화를 들어 몇 가지를 입력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 “첫 경기는 이틀 뒤야. 용인스피드웨이. 비공개 경기라 참가자도 제한되고, 우승 상금도 커. 나머지 일정은 메일로 보내 둘게.”
- 강다해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 두 팔을 가슴 앞에 감은 채 도시를 내려다보던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 “고마워, 수진아.”
- 문 앞에 선 김수진이 걸음을 멈췄다.
- 뒤돌아보지 않은 채 담담하게 말했다.
- “다해야. 남들이 뭐라고 하든 난 상관없어.”
- 잠시 숨을 고른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 “넌 혼자가 아니야.”
- 문이 조용히 닫혔다.
- 방 안에는 적막이 내려앉았다.
- 하지만 그 적막은 낯설 뿐, 외롭지는 않았다.
- 오롯이 자신만을 위한 고요였다.
- 강다해는 왼손의 반지를 천천히 내려다봤다.
- 아이도 그대로였다.
- 반지도 그대로였다.
- 하지만 처음으로 두렵지 않았다.
- 그녀는 이제야 비로소,
- 자유를 되찾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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