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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레이서와 첫날밤

  • 전용기에서 발을 내딛자 뜨거운 공기가 훅 끼쳐 왔다.
  • 한낮의 햇볕에 달궈진 활주로에서는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강다해는 선글라스 너머로 주변을 훑으며 레이스 전용 휴대전화에 뜨는 알림을 확인했다.
  • 경기 시작까지는 여섯 시간.
  •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 하지만 긴장해서가 아니었다.
  • 오랜만에 찾아온 짜릿한 흥분 때문이었다.
  • 공항 한쪽에는 검은 롤스로이스 팬텀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번 일정은 애초부터 사람들 눈을 피할 생각이 없었기에 그 정도 시선은 신경 쓸 이유도 없었다.
  • 팀원들은 이미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 모두 허리를 곧게 편 채 말없이 서 있었다. 마치 출전을 앞둔 지휘관을 맞이하듯 엄숙한 분위기였다.
  • 강다해도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 그녀가 왜 이곳까지 왔는지 모두 알고 있었으니까.
  • 오늘 열리는 경기는 길거리에서 벌어지는 불법 레이스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 최정상 드라이버들만 초청받는 비공개 경기.
  • 암호화된 경로를 통과한 사람만 입장할 수 있었고, 경기장에 늘어선 슈퍼카만 봐도 웬만한 국제 모터쇼가 초라해 보일 정도였다.
  • 경기장은 도심에서 한참 떨어진 폐공항 활주로에 마련돼 있었다.
  • 멀리서 보면 버려진 공항에 불과했지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 화려한 네온사인이 밤을 밝히고, 사방에서는 엔진 굉음과 음악이 뒤섞여 울려 퍼졌다. 뜨거운 열기와 사람들의 함성, 거액의 돈이 오가는 긴장감까지 한데 뒤엉켜 경기장 전체를 들끓게 만들었다.
  • 강다해의 차도 이미 출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 미드나이트 블루 컬러의 애스턴 마틴 AMR Pro.
  • 안팎을 모두 손본 특별 제작 차량이었다.
  • 시동이 걸린 엔진은 낮게 으르렁거렸다.
  • 마치 사냥감을 기다리는 맹수같았다.
  • 강다해는 보닛 위에 손을 올렸다.
  • 손끝으로 전해지는 미세한 진동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번졌다.
  • 이 차는 태어날 때부터 승리만을 위해 만들어졌다.
  • 그리고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 강다해는 차 뒤편에서 레이싱 슈트로 갈아입었다.
  • 몸에 빈틈없이 밀착되는 무광 블랙 슈트는 원단 값만 해도 웬만한 집 한 채보다 비쌌다. 검은 헬멧에는 핏빛처럼 붉은 바이저만 길게 나 있었고, 그녀는 얼굴을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
  • 그럴 이유도 없었다.
  • 레이스는 얼굴이 아니라 실력으로 증명하는 것이니까.
  • 강다해가 모습을 드러내자 경기장이 술렁였다.
  • 펜스 주변은 사람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 영화 속 레이서를 동경하는 재벌가 자제들도 있었고, 전 재산을 걸고 승부를 보러 온 베테랑 드라이버들도 있었다. 여기저기서 플래시가 번쩍였고, 대형 스피커에서는 심장을 울리는 비트가 경기장 전체를 뒤흔들었다.
  • 드론들이 머리 위를 맴돌며 현장을 촬영하던 그때였다.
  •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쏠렸다.
  • 강다해는 직감했다.
  • ‘사신.’
  • 은빛 맥라렌이 천천히 멈춰 섰다.
  • 검은 리어윙과 크롬 장식이 묘한 위압감을 풍겼고, 낮게 울리는 엔진음만으로도 주변 공기가 묵직하게 가라앉는 것 같았다.
  • 차에서 내린 남자는 마치 정체를 감춘 유령 같았다.
  • 그가 쓴 헬멧도 강다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 얼굴도 알 수 없었고, 신분을 짐작할 만한 단서도 없었다.
  • 그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 보이지 않는 시선이 피부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 사신.
  • 레이스판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름이었다.
  • 하지만 그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얼굴도.
  • 이름도.
  • 심지어 나이조차.
  • 그는 지난 3년 동안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는 건 단순히 빠르기 때문이 아니었다.
  • 그가 달리기 시작하면 다른 드라이버들이 모두 제자리에 멈춰 선 것처럼 보일 만큼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 하지만 그 기록도 오늘로 끝이었다.
  • 강다해는 라스베이거스에 바람이나 쐬러 온 게 아니었다.
  • 사신의 연승을 끝내기 위해 이곳에 왔다.
  • 잠시 후 경기장에 중계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신사 숙녀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늘 밤 최고의 승부가 시작됩니다! 야묘 대 사신! 승자는 단 한 명입니다!”
  • 관중석이 떠나갈 듯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 카메라는 두 사람을 번갈아 비추며 경기장의 열기를 한껏 끌어올렸다.
  • 강다해는 운전석에 올라 안전벨트를 단단히 조였다.
  • 문이 닫히자 바깥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 그녀는 천천히 핸들을 감싸 쥐었다.
  • 수없이 함께 달려 온 가장 믿음직한 파트너였다.
  •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건 트랙과 엔진, 그리고 결승선뿐이었다.
  • 신호등이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 곧 노란색으로 바뀌더니, 초록색이 켜지는 순간 애스턴 마틴이 총알처럼 튀어나갔다.
  • 강한 G포스가 온몸을 짓눌렀다.
  • 첫 코너에 진입하자 타이어가 노면을 긁으며 날카로운 마찰음을 쏟아냈고, 사신은 바로 뒤를 놓치지 않고 따라붙었다.
  • 코너를 돌 때마다 따라붙었고, 그녀가 속도를 끌어올릴 때마다 똑같이 받아쳤다.
  • 하지만 강다해는 이미 그의 주행 습관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꿰고 있었다.
  • 그가 어떤 식으로 코너를 공략하는지, 또 어느 순간 아주 잠깐 주저하는지까지 모두 파악해 둔 상태였다.
  • 오늘 그녀는 단순히 경주를 하러 온 게 아니었다.
  • 사신을 무너뜨리러 왔다.
  • 첫 바퀴가 순식간에 끝났다.
  • 두 번째 바퀴에 접어들자 활주로 가장자리에서 치솟는 불길과 타이어 타는 냄새, 관중들의 함성이 한데 뒤섞였다. 어느새 그녀의 심장도 엔진 소리와 같은 박자로 뛰고 있었다.
  • 세 번째 바퀴.
  • 강다해는 승부를 걸었다.
  • 사신이 왼쪽으로 붙는 순간 그녀는 주저 없이 코너 안쪽을 파고들었다.
  • 차체는 가드레일을 스칠 듯 아슬아슬하게 코너를 돌아 나갔고, 몇 센티미터만 빗나갔어도 그대로 들이받을 상황이었다.
  • 차가 크게 흔들리며 충격이 전해졌지만 그녀는 끝내 앞자리를 빼앗았다.
  • 그 순간 경기장이 떠나갈 듯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 마지막 직선 구간에 들어서자 경기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사람들은 목청껏 환호성을 질렀고, 배팅 결과를 외쳐 대는 사이 떨리는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어 결승 장면을 찍기에 바빴다.
  • 강다해는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았다.
  • 결승선이 눈앞으로 빠르게 다가왔고, 그녀의 차가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다.
  • 기록 차이는 0.7초.
  • 강다해는 브레이크를 있는 힘껏 밟았다. 차는 반 바퀴 가까이 미끄러진 끝에 겨우 멈춰 섰고, 그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한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 조금씩 숨이 가라앉자 비로소 승리의 실감이 온몸을 파고들었다.
  • 그녀가 사신을 이겼다.
  • 단 한 번도 패한 적 없던 전설을, 그것도 그의 무대에서 꺾은 것이다.
  • 잠시 뒤 차에서 내리자 카메라가 일제히 그녀를 향해 몰려들었고, 관중들의 환호도 더욱 거세졌다.
  • 하지만 강다해는 끝내 헬멧을 벗지 않았다.
  • 그저 장갑 낀 손을 한 번 들어 보인 뒤 등을 돌렸을 뿐이었다.
  • 사신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 두 손가락을 헬멧 옆에 가볍게 갖다 댄 채 천천히 예를 표했다.
  • 조롱인지, 존중인지 알 수 없는 묘한 인사였다.
  • 이내 그는 그대로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 강다해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 악수도 없었고, 따로 말을 주고받지도 않았다.
  • 과연 사신다운 방식이었다.
  • 하지만 강다해는 개의치 않았다.
  • 아무도 해내지 못한 일을 자신이 해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 이제 그녀에게 필요한 건 술 한잔이었다.
  • 그녀가 찾은 바는 최고급 호텔 안에 숨어 있었다. 대리석 바닥과 유리 엘리베이터, 칵테일 한 잔 값이 웬만한 명품 구두보다 비싼 곳으로, 대대로 부를 이어온 상류층이 즐겨 찾는 공간이었다.
  • 강다해는 구석 부스에 자리를 잡았다.
  • 레이싱복과 헬멧은 차에 두고 온 뒤 검은 미니드레스로 갈아입었고, 선글라스만 그대로 쓴 채 독한 술을 주문했다.
  • 무슨 술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 두 번째 잔을 반쯤 비웠을 때 남자 둘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 둘 다 스물다섯에서 스물여덟 정도로 보였고, 재킷 단추를 풀어 헤친 차림에 지나칠 만큼 자신감이 넘쳤다. 한눈에 봐도 돈 많은 사람들이었다.
  • 한 명은 능청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애써 꾸미지 않아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 “여기 같이 앉아도 될까요?”
  • 한 남자가 묻자 강다해는 어깨를 으쓱했다.
  • “여기, 원래 이런 곳 아닌가요.”
  •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맞은편에 앉아 대화를 이어 갔지만, 강다해는 무슨 말을 하는지 거의 듣지 않았다.
  • 그녀에게 필요한 건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을 잠재워 줄 소음뿐이었다.
  • 술은 계속 들어갔다.
  • 평소보다 훨씬 많은 양이었다.
  • 어느 순간부터였는지 모르겠다. 누군가가 그녀의 손을 가만히 감싸 쥐고 있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재촉도, 성급함도 없이 그저 조용히 손을 맞잡고 있을 뿐이었다.
  • 강다해는 손을 빼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손을 잡아끌며 무대로 향했다.
  • 두 사람은 음악에 몸을 맡긴 채 춤을 췄다. 자신도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춤을 추던 그녀는 자연스럽게 엉덩이를 그의 몸에 바짝 밀착했다.
  • ‘라스베이거스에서 벌어진 일은 라스베이거스에 남긴다.’
  • 아마 그런 기분이었을 것이다.
  • 그의 몸이 단단히 반응했다.
  • 강다해가 뒤돌아 그를 보며 웃었다.
  • “큰일 났네.”
  • 그가 낮게 중얼거리더니 그녀의 손을 잡고 밖으로 이끌었다.
  • 두 사람은 옥상으로 올라갔다.
  • 그곳에는 헬기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 그는 그녀를 태워 올라탔고, 조종사는 두 사람을 본 척도 하지 않았다.
  • 남자가 먼저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 강다해는 그의 셔츠부터 벗겨 냈고, 두 사람은 다시 깊게 입을 맞췄다.
  • 그는 어딘가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강다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키스하는 내내 그의 몸에 더욱 바짝 몸을 밀착했다.
  • “술에 약을 탄 것 같아. 지금은... 그것밖에 생각이 안 나.”
  • “그럼 나 가져.”
  • 그 말이 자기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강다해 자신도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말 그를 원하고 있었다.
  • 그는 그녀 위로 몸을 기울여 무릎으로 다리를 벌렸다. 손끝은 허벅지를 따라 천천히 미끄러져 종잇장처럼 얇은 검은 미니스커트 아래를 스쳐 올라갔다.
  • 손길에 강다해는 그의 아래에서 몸을 떨었다.
  • 그 반응에 그도 더욱 달아올랐다.
  • 그녀는 그의 단단한 열기가 아랫배를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를 타고 스쳐 지나갔다.
  • “다정하게 해 주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 약기운이 너무 강해.”
  • 그가 낮게 속삭였다.
  • “그냥... 들어와.”
  • 강다해가 애원하듯 말했다.
  • “안에 쌀 거야. 날 이렇게까지 만들었잖아.”
  • 그 순간 강다해는 다른 건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 그저 그가 자신 안으로 들어오기만을 바랐다.
  • 그의 부드러운 입술이 그녀의 가슴에 닿자 짧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 그의 손이 그녀의 허벅지 사이를 더듬어 올라가더니 젖은 틈새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 잠시 뒤 그는 자신의 끝을 그녀에게 갖다 댔다.
  • 강다해는 숨을 삼켰다.
  • 그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녀의 젖은 온기로 자신을 적셨다.
  • 하지만 곧 더는 참지 못하고 굳어 있는 그녀의 몸을 밀어내듯 깊숙이 들어갔다.
  • 강다해가 비명을 지르려는 순간,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입을 감쌌다.
  • 그리고 그녀를 바라본 채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호텔에 도착했다.
  • 그는 마치 전리품이라도 안은 듯 그녀를 번쩍 안고 객실로 향했다.
  • “결혼할래?”
  • 그가 묻자 강다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두 사람은 남성용 반지를 하나 샀다.
  • “내 반지는?”
  • 그녀가 묻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 “네 건 호텔 방에 있어. 특별히 준비해 놨거든.”
  • 잠시 뒤 한 남자가 서류를 들고 찾아왔고, 두 사람은 나란히 서명했다.
  • 강다해는 자신이 무슨 서류에 이름을 적는지도 모른 채 그대로 사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