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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나는 마도사다

  • 내 확답을 들은 에반은 잠깐 놀라는 듯 했으나 금세 다시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그 뒤로, 에반의 손에 이끌려 연구실을 빠져나왔고 길고 긴 복도를 지나 알아보기도 힘든 문양들이 바닥에 새겨져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 "이건 워프포인트라고 해. 이제 우리는 지하로 갈 거야."
  • "아, 뭔지 알겠다. 포탈이라고 생각하면 되나?"
  • "음, 이동하는 부분은 같은데 포탈의 경우는 문이라고 생각하면 되고 워프포인트는 우리가 직접 이동할 수 있는 경로를 개척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편할거야. 눈이 부실 수 있으니까 조금만 참아."
  • "어?"
  • 대답을 하기도 전에 바닥에 있는 문양에서 빛이 기둥을 이루며 솓아올랐고 그 빛은 역시나 내가 있던 세계에서 이 곳으로 이동했을 때, 그리고 사막에서 이 건물로 이동했을 때 나타났던 빛과 동일했다.
  • 엄청난 빛을 발산하는 섬광이 잦아들고 다시 눈을 떴을 땐, 감탄사를 뱉지 않을 수 없었다.
  • 연구실과 복도만 봤을 땐 정말 웹툰이나 만화영화에서 보던 흔한 배경과 구조였다면 지하실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딴 판이었기 때문이었다.
  • 아주 잘 세공된 조각상이 가운데 있는가 하면, 한 쪽 벽면에는 웨이트 트레이닝을 위한 운동기구들도 꽤 존재했고 반대쪽 벽면에는 아까 워프포인트와 마찬가지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문양이 바닥에 새겨져 있었다.
  • "근데, 저 운동기구들은 내가 살던 곳에서 보던 것들인 것 같은데…"
  • "우리라고 저런 것들이 없지는 않아. 다만 좀 다르긴 하지. 나야 뭐, 네가 사는 세계를 유심히 들여다 봤으니까."
  • 나를 빤히 바라보며 대답하는 에반을 보자 문득 과거의 좋지 않았던 기억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 한 때, 왜소한 내 몸에 대해서 자격지심을 크게 느꼈고 운동을 하자고 결심하고 헬스장을 한 달 등록한 적이 있었다.
  • 물론 첫 날 운동하고 알이 베겨서 3일을 쉬었지만…
  • 아무튼, 그 후로도 몇 번씩 나갔으나 헬스장 내에 존재하는 우락부락한 체격의 사람들 덕분에 되려 자존감만 하락한 채 발길을 끊게 된 것이었다.
  • "그럼 그걸 참고하고 만들었다는 얘기네. 그럼 저건 뭐야?"
  • 꽤 슬픈 과거는 다시 내 머리 속 깊은 곳에 박아두고 멋쩍게 웃으며 다른 질문을 던지자 에반이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며 앞서나갔다.
  • "저 쪽이 근력과 체력을 단련하기 위한 시설이라고 한다면 이 쪽은 마법과 마나를 단련하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돼."
  • "아무것도 없는데?"
  • "너도 보고 물어본 것 아니야?"
  • 문양 앞에 선 에반은 손은 바닥을 가리켰고 시선은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 잠시 후, 아까처럼 강렬한 빛은 발산되지 않았지만 빛 입자가 뭉치기 시작하더니 어떠한 형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 그리고…
  • "어? 어?! 어억?!"
  • "아는 눈치네?"
  • "고, 고블린!!"
  • "키에에에에엑!!"
  • "정답! 바닥에 있는 것들은 모두 소환진이야. 그리고 이 소환진으로 생성된 마물들은 모두 다 마법강화 버프가 걸려있는 상태로 소환되기 때문에 마법을 단련하기에는 최적화 되어있어. 어지간해선 죽지도 않아."
  • "키에에에에에엑!!"
  • 짙은 갈색 피부에 검붉은 눈.
  • 그리고 구부정한 자세와 생각보다 탄탄해 보이는 육체.
  • 소름끼치는 소리를 질러대는 고블린이 눈 앞에 있었다.
  • 소설로만, 만화로만, 게임으로만 접했던 고블린이.
  • 다행인 것은 소환진 밖으로는 이동할 수 없는 듯 했다.
  • 밖으로 나오지 않고 소환진 안에서 그저 소리만 질러대고 있을 뿐이었다.
  • "근데 고블린은 보통 초록피부에 키는 요정도, 머리카락이 있었나?"
  • "그건 너희 세계에서 만들어낸 고블린이고 실제 고블린은 여러 피부색이 존재해 마치 사람처럼. 물론 그 쪽 세계에서의 영향이 없지는 않지. 이 곳에서 마물들이 나타나게 된 것들은 결국 인간들의 상상력도 한 몫 하거든."
  • "인간의 상상력으로 몬스터가.. 만들어져?"
  • "만들어진다기 보다… 그래, 기본 데이터를 인간의 상상력으로 뼈대를 잡아두는 거야. 그걸 생성시키는 것은 결국 사념체나 혹은 신들이 만들어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자, 잘 봐. 이제부터 이게 마법사야."
  • "마법사?"
  • 에반의 입에서 나온 말은 마도사가 아니었다.
  • 마법사, 에반에게 여태 들었던 얘기에 의한다면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것만으로도 이미 엘리트에 속하는 것이었다.
  • 그리고 내 눈 앞에서 그 마법을 보여준다는 것이 특별한 것일 터였지만 마도사라는 것을 알고있어서 그런 것인지 그렇게 큰 기대감은 들지 않았다.
  • 그랬는데,
  • -둥실
  • '둥실?'
  • -화르륵
  • '화르륵?'
  • -파지직
  • '파지직?'
  • 순식간에 눈 앞에서 물과 불 그리고 전기로 이루어진 구체들이 에반의 머리 위로 떠올랐고 게임덕후인 나는 바로 알 수 있었다.
  • '속성계열 마법이다!'
  • 아주 잠깐 그 상태 그대로 떠있던 구체들은 에반이 손가락을 까딱하자 일제히 고블린을 향해 날아갔다.
  • -콰과광! 콰앙!
  • 파이어 볼이 먼저 닿으며 폭발을 일으켰고, 불이 붙은 고블린의 몸에 워터 볼이 씌워져 곧바로 엄청난 양의 수증기를 일으키며 동시에 고블린을 홀딱 젖게 만들었다.
  • 그리고 그 끝에는 라이트닝 볼이 터지며 물에 젖었던 고블린은 마치 전기의자에 앉아 고문을 당하듯 온 몸을 부르르 떨며 비명을 질러댔다.
  • -끼에에에엑!!!!
  • "헐."
  • "신기하지?"
  • "근데, 방금처럼 사용하면 속성의 합이 맞지 않아서 큰 타격을 못 줄 것 같은데. 차라리 물과 전기만 사용해도 됐지 않아?"
  • 아주 기본적인 것들이었으나 내 얘기를 들은 에반은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 "역시 또 다른 나야. 이건 너한테 보여주기 위해서 사용한 것이고 네 말대로 그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마나를 아끼기에도, 효과적으로 적을 공략하기에도 적절한 방법이야. 마법에 연금술의 조합식을 더하면 그게 바로 마도학이고. 네가 말한 것은 그 첫 번째야. 아주 기본이 되는 것이지."
  • "어? 어…"
  • 떨떠름했다.
  • 요즘은 어린 아이들도 물을 묻힌 손으로 전기가 흐르는 선을 만지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 세상이다.
  • 그럼에도 마치 내가 대단한 것처럼 말을 하는 에반이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 멍하니 서있는 나와는 달리 에반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이미 빈사상태가 된 고블린 쪽으로 몸을 돌렸다.
  • 이후, 손을 뻗자 쓰러진 고블린이 땅 밑으로 꺼지기라도 하듯 소환진 아래로 사라졌다.
  • 이 모든 것들이 그저 신기하기만 한 난 바보처럼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에반을 바라봤고 그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 "자, 이제 내가 죽기 전까지 네가 적응 할 수 있도록 훈련시켜줄게."
  • "네?"
  • "뭐, 하루가 될 수도 있고 한 달이 될 수도 있는데 아무튼! 열심히 해보자. 걱정마. 쓰러지기 전까지만 할 거니까."
  • "네?? 아니, 선생ㄴ.."
  •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에반에게서 기억과 경험을 이어받으면 되는 줄만 알았다.
  • 이 때는 이렇게 빡센 훈련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 에반은 제대로 운동 한 번 해본 적 없던 내게 웨이트 트레이닝을 알려줬고, 이어서 마법에 대한 이론과 실전 그리고 연금술과 조합식에 대한 것들.
  • 결국 에반이 죽기 직전까지 내 힘으로 해낸 것이라고는 작은 불씨 하나 만들어내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에반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얘기를 해줬었다.
  • 속성으로 진행된 두 달간의 교육, 그리고 에반은 시간이 다 된 듯 했다.
  • "생각보다.. 오래 버텼네."
  • "진짜.. 끝이야?"
  • "응, 이젠 더 버틸 힘이 없다. 마력,체력,기력 모두 바닥이야…"
  • 방 전체에 그려진 마법진과 그 안에 누워있는 에반, 그리고 그의 옆에 내가 앉아있었다.
  • 에반은 옅은 미소를 띄며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 "마도사는.. 의지를 이을 자를 찾지 못하면 소멸 돼. 육체도 영혼도. 그래도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 "그럼 너는 죽는거야?"
  • "으..음.. 여태 내가 살아온 시간은.. 300년이야. 그 시간동안... 온갖 것들을 공부하고, 연구하고, 실험했어. 그 안에는 마도사의 죽음도 포함되어 있었고. 완전한 답을 찾아낼 순 없었지만 내 생각엔.. 완전한 죽음은 아닐 거라고 생각ㅎ.. 쿨럭! 쿨럭!!"
  • 300년 동안 살아왔다는 얘기는 에반이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처음 들었던 사실이었다.
  • 그 긴 세월에 놀랐고, 그 시간동안 계속해서 공부하고, 연구하고, 실험을 했다는 것에 놀랐지만 기침을 하며 동시에 각혈을 하는 모습을 보며 제일 놀랐던 것 같다.
  • 피를 닦아줄 틈도 없이 그가 먼저 말했다.
  • "이제.. 시작하자."
  • "…그래."
  • 그는 마지막으로 정신을 집중했고, 방 전체를 두른 마법진에서는 푸른 빛이 흘러나왔다.
  • "관록. 경험. 기억."
  • 에반이 한 단어를 말 할때 마다 에반의 몸에서 금빛의 오라가 뿜어져 나왔고 이 오라는 푸른 빛과 반응을 하는 듯 했다.
  • 푸른 빛들은 곡선을 이루며 에반의 몸에서 나온 오라에 합쳐지고 있었다.
  • "이 모든 것들은 마도사 에반 바르켄 테헤드의 의지일지니…"
  • 에반이 죽기 일주일 전, 에반은 내게 이 세계에서 활동할 이름을 만들어줬었다.
  • 아무래도 자신이 죽고 난 뒤, 최후의 마도사로서 활동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러한 이름이 필요할 것이라며.
  • 그렇게 만들어진 이 쪽 세계에서의 내 이름은.
  • "마도사 에반 바르켄 테헤드의 의지는 곧 마도사 오센 바르켄 클리드의 의지이리."
  • 금빛의 오라는 순식간에 에반의 몸에서 완전히 빠져나왔고 푸른 기운들과 함께 내 몸으로 들어왔다.
  • 몸 안 쪽에서부터 가득 차오르는 마력이 느껴졌다.
  • 그의 300년간의 기억들이 속속이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 '정신이 아득해진다…'
  • 그의 기억에 덮여 천천히 그리고 오랫동안 내게 각인시켰다.
  • *
  • 언제 정신을 잃었는지도 모르고 있던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땐 방 전체에 둘러져있던 마법진도, 내 눈 앞에 누워있던 에반도 보이지 않았다.
  • 그리고 그의 마지막 기억에서 알 수 있었다.
  • '에반의 가문…'
  • 마도사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에반의 가문이 몰락한 이유를.
  • 나는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지 않고 에반이 누워있던 자리를 보며 묵례를 하며 마지막으로 그에게 인사를 했다.
  • 그리고 그가 말했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더 나아가 나를 위해 계획을 짜기로 했다.
  • 아주 큰 판을.
  • 자리에서 일어나 닫힌 창문을 바라봤을 때, 유리에 비친 남자의 모습은 백발의 오센이었다.
  • "나는.. 마도사 오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