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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결심

  • 목소리의 떨림이 연구실을 울리는 듯 했다.
  • 그만큼 외면하고 싶었고, 부정하고 싶었다.
  • 에반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그윽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고 나는 그저 고개를 떨굴 수 밖에 없었다.
  • "해결할 수 있어."
  • 도대체 무얼 해결한다고?
  • 이미 벌어져버린 과거를 되돌릴 수 있다는 얘기인지 아니면 앞으로의 상황에 대해서, 내가 원래있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 아무런 대답도 하지않는 것을 보며 에반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 "네가 원하는 것들을 이룰 수도, 틀어져 버린 일들을 바로 잡을 수도 있어. 너라면 지금 내 말을 이해 했을거라 생각해."
  • "그게 무슨, 설마…"
  • 허황된 생각일 수도 있지만 에반이 말하는 의도를 추려보자면 결국 이 대화의 끝에는 내가 돌아갈 방법도, 내가 가족을 잃기 전으로 그러니까 사고가 일어나기 전으로 되돌릴 수 있다는 얘기인 것으로 들렸다.
  • "그래,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아까 말한 '이상'을 실현시켜야 해. 네가 이 차원의 지구로 불려오게 된 것. 엄연히 따지자면 내가 너를 불러들인거지만…"
  • "거지만?"
  • "하아, 내가 본 너는 그 세상에서 더 잃을 게 없는 사람이었어. 물론 내 생명과도 연관이 있는 것이고, 내가 말하는 그 '이상'이라는 것에 다가가기 위해 너가 필요한 것 역시 사실이야. 그러나 형제도 없고 소심한 성격과 더불어 왜소한 몸 그 자체만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서지도 못해서 친구조차 없던 네게 부모님까지 사라졌어. 넌 더 이상 그 세상에서 살아가고 싶어하지 않는게 내 눈엔 보였어."
  • 에반은 조심스레 말을 꺼내면서도 진지한 표정을 유지했고 내가 듣기 편하도록 아니, 이건 착각인가?
  • 아무튼 일정한 톤으로 천천히 얘기를 꺼냈다.
  • '뭘 얘기하는지 알겠는데…'
  • 선뜻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 내가 왜, 어째서 내가 이 세계에 왔는지 모두 이해가 되었다고.
  • '이해했어.' 라는 한 마디가 입에서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 사고 당일, 정신을 잃어가는 내게 보였었다.
  •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나를 어루만지려던 엄마의 손이.
  • 그리고 들렸었다.
  • 마지막으로 했던 엄마의 목소리가.
  • "강..윤아. 꼭, 꼭… 살아야.. 해.. 미안하다…"
  • 이 세계로 넘어오기 전까지 얼마나 지옥같은 하루하루를 견뎌냈는가.
  • 제 3자의 입장에서 나를 지켜봐온 에반이 저런 말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 실제로 자살시도도 했었다.
  • 그렇지만 그럴 때 마다 엄마의 마지막 모습이, 목소리가 떠올라 그만뒀으니까.
  • 과거를 회상하며 지금의 상황을 최대한 이해하려 노력하는 나를 기다려주기라도 하듯 에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자신의 앞에 고개를 떨구고 있는 똑같이 생긴 나를 묵묵히 바라봐줬다.
  • 나는 난잡하게 머리를 흐트리는 생각들을 정리하며, 심호흡을 한 뒤 겨우 입을 열었다.
  • "이해했어. 그래, 어떤 상황이었는지 알겠어. 근데 너를 노리는 사람들은 도대체 뭐고 사역마의 대리라는 건 뭔데?"
  • "그래, 하나씩 설명해줄게."
  • 다른 대답은 없었다.
  • 그저 내 질문에 내가 최대한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을 해줬고 점차 나는 그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 에반을 노리는 자들은 앞서 얘기했듯이 당연하게 다수였고 그들을 부르는 명칭은 '세례자들' 이었다.
  • 이 세계에는 신이 여럿 존재했고 대표적인 신들을 나타내자면 '악신' , '마신' , '천신' 등이 있었고 애초에 게임과 웹툰을 즐겨하던 내게 이런 엄청난 얘기들을 듣자마자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 악신 - 살아있는 지성체들의 모든 악이 모여 만들어진 신
  • 마신 - 인간계,천계를 제한 마계를 관장하는 신
  • 천신 - 하늘의 기운들이 뭉쳐 하늘 그 자체가 인격화된 신
  •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이었고,
  • '세례자들'은 위 신들을 섬기지 않으며 악인 1,000명과 역사적 영웅 10명의 사념이 뭉쳐져 생겨난 '흉괴'(凶怪)를 섬기는 단체였다.
  • 사념이 뭉쳐져 생겨난 흉괴는 인간에게 직접적인 해를 끼치진 않았으나, 그 외의 다른 모든 종족들을 닥치는대로 잡아먹을 정도로 흉포했고 이는 신들조차 막아낼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존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곳 사람들은 그것을 파괴신이라 부른다.
  • 인간을 공격하지 않는데 뭐가 문제냐고?
  • 예외가 있었다.
  • 바로, 마법을 사용하는 자들이었다.
  • 마법에 강한 반응을 보이는 흉괴는 마법을 부리는 자들과 그 무리들을 모조리 잡아먹는데다 잡아 먹을수록 힘이 강해지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 더불어 세례자들은 흉괴를 섬긴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권능을 부여받았고 그 권능은 마법을 사용하는 자들을 척살하는 것에 맞춰져 있는 권능이었다.
  • 그러나 신도 아닌 자들이 가진 권능, 신이 부여한 것이 아닌 권능 그것은 매우 불완전했고 불안정했다.
  • 하물며, 이 쪽 세상에서 마법의 극의를 깨우친 자 혹은 한 분야의 극의를 깨우친 자 역시 권능을 부여할 수 있다지만 그 수준에 도달하는 인간이 나오는 것 역시 100년에 1명이 나올까 말까한 사례라고 한다.
  • 때문에 종종 폭주하는 세례자들도 있었으나 현재는 세례자들이 이념이 같은 자들을 끌어모아 세례를 함으로써 그 권능의 불완전한 힘을 나누어 사용하고 있는 듯 했다.
  • 세례자들에 대한 정의는 이 정도로 나타낼 수 있고, 이들이 에반을 노리는 이유는 하나였다.
  • 그건 바로…
  • "그러니까, 네가 세상에 몇 없는 직업이다?"
  • "응, 그런 셈이지."
  • "마법사는 그럼 약한가?"
  • "아니. 소국이라도 군대에 마법부대는 무조건적으로 있을 정도로 영향력이 엄청나지."
  • "그럼 마법사들을 양산해서 흉괴라는 것과 세례자들을 잡아내면 되는 거 아니야?"
  • "그렇지 않아. 애초에 마법사라는 직업을 가지기 위해서, 또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마나라는 것이 필요하고 마나라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그 수치가 정해져 있으니까."
  • "다른 방법은 없는거야?"
  • "있어. 이 쪽 세상에는 총 네 명의 대현자가 있어. 대현자가 뭐냐면…"
  • "아, 그건 알아."
  • "그럼 다행이네. 마법의 끝에 다다른 대현자 1명이 마나가 전혀 보이지 않는 일반인에게 마나를 부여할 수 있어. 그렇게 마법사를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지. 그런데…"
  • 잘 말하다가 말을 흐리는 에반을 보며 이미 이야기 속에 빨려들어간 나는 그 뒷내용이 궁금해서 미칠것 같았다.
  • 똥 마려운 개마냥 발을 동동 구르고 있자니, 자리에서 일어난 에반이 손가락을 튕겼고 그가 서있던 오른쪽의 벽에 마치 프레젠테이션을 켠 것처럼 화면이 나타났다.
  • 화면에는 그림동화같이 그림과 설명이 적혀있었고 나는 에반의 이야기와 더불어 벽에 나타난 그림에 집중했다.
  • "결국 마나가 1이라도 존재하면 그것을 할 수 없어. 대현자가 마나를 부여하기 위해선 마나가 전혀 없는 일반인이어야 한다는 것이야. 물론 네 말대로 마법사를 우후죽순 늘리면 되지않냐 하는데 이것도 그럴 수 없어. 마나를 개통한다는 것은 자신의 마나를 깎아내며 나눠주는 것과 같은 이치거든."
  • "그럼 어떻게… 의미가 없잖아."
  • "간혹, 마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선선한 바람을 일으키기도 하고 마치 부싯돌을 튕겨 불을 내듯 아주 조그마한 불씨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있어. 재능이지. 대현자들은 그런 자들을 찾아내 그들에게 마나를 부여해. 엘리트만을 추려낸다는 것이지."
  • "아… 근데 너는 뭐라고 했지? 너도 마법사야?"
  • "내가 말 안 했나?"
  • 고개만 돌려 나를 바라보는 그의 입가엔 아주 작게 옅은 미소가 번졌다.
  • "난 마도사야."
  • "마도..사?"
  • "응, 마도사는 연금술도 할 줄 알아야 하며 마법에 조합식을 더할 줄 알아야 해. 일반적인 마법도 역시 다룰 줄 알아야 하고."
  • "그럼 엄청난 거 아니야? 너 혼자서도 다 쓸어버린다거나."
  • 순전히 힘의 크기에만 집중하던 내 말에 에반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 "그러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흉괴는 애초에 누구도 없애지 못했고 없애는 방법또한 아무도 몰라. 지금 상태는 '봉인' 상태라고 봐야겠지. 네 명의 대현자가 모여 간신히 흉괴를 제압했고, 흉괴가 기운을 되찾기 전에 바로 봉인을 해버렸어. 마법의 끝에 다다른 자들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 흉괴야. 나라고 그 방법을 아는 것도 아니고. 지금 내 상태 역시 최악이고."
  • "그렇구나…"
  • "물었지? 그들이 왜 나를 죽이려 하는지. 앞서 얘기한 것들을 종합하면 마법 자체가 큰 위협이 되는거야. 마법사는 그래도 몇 십, 몇 백만 명은 될 텐데 마도사는… 두 명 뿐이야."
  • "뭐?!"
  • "그리고 그 한 명 마저 영면에 빠졌어. 그는 나처럼 의지를 이을 자를 찾아내지 못했고 그 탓에 마력과 생명력이 급속도로 바닥을 보였어. 그 때, 그가 한 선택은 영면이야. 아주 깊은 영면. 언제 깰 지 모르는 그 영면이 끝나고 자연스레 눈이 떠질 쯤엔 어느정도의 마력이 회복되었다는 얘기거든. 해서! 지금은 나 뿐이야. 세례자들이 나를 죽이려는 이유도 그 때문이고. 마도사는 그들에게 있어서 대현자들보다 더 위협적인 존재이거든."
  • 여기까지 듣고나니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 결국 그들은 에반, 이 한 사람이 무서워서 얼마나 오랫동안 혼자였을지 모르는 이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움직인 것이다.
  • "왜그래? 갑자기 몸을 왜이리 떨어?"
  • "어, 어? 아, 아니야. 아무것도…"
  • 슬펐나?
  • 그건 아닌 것 같다.
  • 나는 분노한 것이었다.
  • 나 역시 혼자였고, 혼자라는 그 감정을 매우 잘 알았고 에반과 마찬가지로 내가 죽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저쪽 세상에서 존재했으니까.
  • 너무 잘 알았다.
  • 너무 공감이 되었다.
  • 그래서 나는 결정했다.
  • "에반."
  •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부르자 에반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 "의식얘기를 했다가, 지식과 모든 것이라고 얘기했다가 의지라고 얘기했던 그것이 정확히 뭐야?"
  • "너무 횡설수설했나. 사실 전부 다야. 그렇다고 내가 니 몸에서 기생하는 건 아니야. 그저 내 기억들과 경험들이 네게 넘겨지는 것 뿐이야. 지금의 마도사들은 그렇게 대를 이어가고있어.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싶지만… 이것도 역시 내가 죽게되면 자연스레 알게 될 내용이야."
  • "혹시 내가 죽을 수도 있어?"
  • "아니, 절대. 네가 죽는다면 굳이 내가 너를 부를 이유가 없지."
  • "…그럼 하자. 네가 말한대로."
  • 에반은 아까보다 더 커진 눈을 하고 가만히 서있었다.
  • 아깐 없었던 것 같은 창문이 언제부턴가 열려있었고 거기서 불어온 산들바람은 에반의 하얀 머리칼을 휘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