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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그걸 믿으라고?

  • 멀리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코앞에 와있었다.
  • 나와 똑닮은 남자가.
  • 아, 나보다는 나은 것 같기도 하다.
  • 잔근육이 붙어있는 것이 운동도 좀 한 것 같고, 특이한 것이 머리가 백발이다.
  • 얼굴은… 내가 좀 더 잘생긴 것 같다.
  •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을 때 놈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 "김강윤, 그 곳에서의 네 이름이지?"
  • "너, 너는 도.. 도대체 뭐야? 여긴 어디고?"
  • "놀랄 것 없어.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 "아,아.. 안 놀라게 생겼냐?! 그리고 아무 일도 없을 거라니? 이미 일이 벌어지고 난 뒤에 얘기를 하면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는 거야?"
  • "당연히 너는 믿을 수 밖에 없지. 너를 불러내는 방법은 알아도…"
  • 싸늘했다.
  • 제발, 내가 생각한 말이 아니기를…
  • "서..설마."
  •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나도 몰라!"
  • "…."
  • 불행은 본래 겹겹이 쌓이고 한번에 터진다고 했던가.
  •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다.
  • 그저, 멍했고 어이없는 상황에 욕지꺼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 "욕하고 싶어."
  • "으음, 안 돼."
  • "왜?"
  • "내가 상처받을 것 같아."
  • "그렇구나."
  • "마음의 준비는 다 한 거야? 생각보다 강인하네 또 다른 나."
  • "그러게…"
  • 사실 강인한 것이 아니라 포기한 것이 맞겠지만.
  • 20년 인생을 살며 고등학생 때,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홀로 남게 되었던 그 때 이후로 최악의 상황인 것은 다름없는 사실인 듯 했다.
  • "꽉 잡아."
  • 그는 내 손을 자신의 허리에 얹으며 말했고 나는 그의 말을 그저 따를 수 밖에 없었다.
  •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뭘 해야 할 지도 이 세상이 무슨 세상인지도 알 수 없었으니까.
  • 잠시 후, 편의점 건물 문을 열었을 때와 같은 강렬한 빛이 몸을 휘감았고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땐 주변이 또다시 바뀌어 있었다.
  • 한약 냄새가 진동을 했다.
  • 주변을 둘러보니 온갖 플라스크 병이 책상 위에 일자로 쭉 나열되어 있었고 어떤 것은 플라스크에서 다른 유리 병으로 액체가 자동으로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 "이게 도대체?"
  • "아, 여기는 내 연구실이야. 정확히는 약재만 골라다 실험하는 약재 연구실."
  • "이제 설명좀 해줄래? 도대체 여기는 뭐하는 곳이고 왜 나를 이 곳으로 불렀는지."
  • "응, 알겠어. 근데 생각보다 침착해서 놀랐어. 몇 년을 봐왔지만 내가 봐 온 너는 상당히 소심하고.. 약하고."
  •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히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 의도적으로 한 말일까? 아니다, 저건 의도가 아니야.
  • 저렇게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악담을 퍼부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 "윽, 꽤 아픈 소리네. 그리고?"
  • "약하고, 보잘 것 없었는데 지금 보니 또 아닌 것 같아."
  • "마지막이 치명타네."
  • "그래, 이 곳은 오웬대륙이야. 아, 일단 여기가 뭐 다른 행성 이런 건 아니고 똑같이 지구야."
  • "오웬대륙이라는 건 들어본 적도 없고 지구상에 없는 대륙인데?"
  • "그건 너희 세계에서나 그런거고."
  • "혹시 뭐 이세계? 그런거..는 아니라고 해줄래?"
  • "푸하하하! 이세계? 아, 의미상으로만 보면 이세계가 맞긴 하지. 더 정확히는 평행세계야."
  • "평행세계?"
  • 내 되물음에 그는 용액이 모두 떨어진 플라스크를 다른 곳으로 옮겨가며 말했다.
  • "쉽게 말해서 평행우주라는 말이지. 같은 우주에 있지만 평행선 상에 위치한 다른 세계라고 생각하면 돼. 그래서 지구는 한 개가 아니라는 거야. 이 곳도 엄연히 지구고."
  • "그.. 말을 믿으라는 거야?"
  • "믿지 않으면 어쩔거야? 이미 너는 이 곳에 와있고."
  • "그럼 너는 뭐하는 사람인데? 아니 그보다 네 이름은 뭐야?"
  • "나? 에반이라고 부르면 돼. 풀네임은 에반 바르켄 테헤드."
  • "에반.. 바르.. 뭐?"
  • "음, 너에 대한 내 인식이 다시 변할 것 같아. 쉿. 그냥 편하게 에반이라 불러."
  • 용액을 다시 채우며 원래 있던 자리로 플라스크를 옮겨놓은 그는 바퀴가 달린 의자 두 개를 꺼내며 앉으라는 제스쳐를 보냈다.
  • 의자에 앉자마자 나는 곧바로 다시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 "에반..?"
  • "왜?"
  • 오글거렸다.
  • 나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이름이 외국물을 잔뜩 먹은 것 같은 중이병스러운 이름이었으니까.
  • 그걸 부르기가 너무도 오글거렸지만
  • "그럼 왜 날 여기로 부른건데?"
  • 중요한 것을 알기 위해서는, 이 세계가 원래 이런 것이라면 이 곳에 맞추는 것이 필요할 터였다.
  • "그건…"
  • "그건?"
  • "내가 곧 죽어."
  • "뭐?"
  • 그의 표정은 보기에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 표정만 웃고있을 뿐, 울고있는 것 같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 그리고 내 머릿 속에서는 온갖 생각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 "네가 죽는데 나를 왜 부른건데?"
  • "자, 차근차근 설명해줄테니까 내 얘기좀 들어줄래?"
  • "솔직히 차근차근 설명 안 한다고 해도 지금 너 말고 얘기할 사람이 없는걸."
  • "푸흐흐, 그게 네 장점이구나. 생각보다 살가운 것. 그리고, 은근한 친화력. 언젠가 빛을 볼 거야."
  • "아니… 설명을 우선."
  • "그래, 우선 뭐가 좋을까. 아! 네가 살던 세계와는 이 곳이 좀 많이 다르니까 세계관부터 말해주도록 할게."
  • 그 후로 나는 그와 세 시간 가량을 대화한 것 같다.
  • 대화 도중 갈증이 났는지 그는 어디선가 나타난 음료를 들고 유리컵에 따라 내게 건넸고 우리는 음료를 마시며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 그리고 이 대화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요약해서 세가지 정도였다.
  • 첫 번째, 내가 살던 세계에서는 흔히 소설이나 웹툰에서 많이 나오던 '그것'이 존재한다. 바로 마법이었다. 그것을 토대로 얘기하자면 몬스터와 인간과는 다른 지적인 종족들도 존재한다는 이야기였다.
  • 두 번째, 나를 이 세계로 부른 에반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며 정확히 하루가 될 지 일주일이 될 지 알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해서 나를 부른 이유는 자신의 영혼을, 아니 정확히는 자신의 지식과 모든 것을 그릇이 같은 내게 옮기기 위해서라고.
  • 세 번째, 내가 이 세계를 탈출하기 위해서는 세계의 이상을 실현시켜야 한다고 한다. 이 부분이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재차 질문을 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같았다.
  • "일단 내가 죽고나면 바로 이해가 될 거야. 이상이라는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거든."
  • 가장 중요한 것은 세 번째임에 틀림없지만 에반이 살아있는 지금 내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없다는 것이다.
  • 그리고 이상이라는 것은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인가가 가장 중요하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정보로는 아마 매우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 "그럼.. 지금부터 내가 뭘 하면 되는데?"
  • "내 말을 전적으로 다 믿어야지."
  • "당연히 믿지!"
  • "그러면서 동공은 흔들리고, 다리 역시 떨고 있는데?"
  • 사실 안 믿었다.
  • 허구가 아닐까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 "이거 꿈이지?"
  • "아닌데?"
  • "아니야 꿈일걸?"
  • "꿈 아니야."
  • "꿈이라고 해주면 안 돼?"
  • "내가 신기한 거 보여줄까?"
  • 그는 내 바램을 산산히 짓밟으려 작정이라도 한 듯 검지를 펼치며 위를 가리켰고 내 시선은 그의 검지 끝으로 향했다.
  • 잠시 후, 그의 검지 위로 새빨간 불꽃 덩어리가 생겨났고 화르륵 하는 소리가 정말 불이라는 것을 실감나게 해주었다.
  • "허.."
  • "이제 믿어?"
  • 보면 볼수록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었다.
  • 그런데 어떻게 믿으라는 것인가.
  • "아직도 안 믿는 눈치네."
  • "…."
  • 불꽃이 꺼지기도 전에 불꽃 덩어리 옆에 또 다른 불꽃이 피어나기 시작했고 이내 불꽃 덩어리는 두 개가 되어 연구실을 환하게 비추었다.
  • 불이 두 개가 되니 온도가 후끈한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 "뜨겁진 않더라도 덥기는 할 텐데. 덥다는 것은 이 느낌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일테고. 그 말은 즉…"
  • "아니, 알았어. 알겠어. 믿을게."
  • "그래, 어차피 근데 너도 그 세상에 질려있던 참이었잖아?"
  • "누가 질려있었다고 그래?"
  • "너 이 곳으로 오기 직전에 했던 말 기억 안 나? 뭣같은 알바 때려치던가 해야지."
  • "알바를 때려친다는 말이었지 내가 원래있던 세상을 포기하겠다는 얘기가 아니잖아!"
  • "…미안한데, 사실 너를 지켜본 건 꽤 됐어. 너희 부모님이 돌아가시던 날, 일어났던 교통사고. 그 모든 것이 우연일까? 단순한 사고라고 생각해?"
  • 갑자기 진지한 분위기를 잡으며 어두운 표정으로 얘기하는 에반을 보며 나는 또 등신같이 쫄아버렸다.
  • 아, 긴장한 것이었나?
  • 한 편으로는 내 어두운 과거에 대해 단순한 사고가 아닐 것이라는 얘기로 들렸기에 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진 것 또한 사실이었다.
  • "그럼 사고가 아니면 누군가의 사주냐? 그 날, 그 트럭 운전기사는 음주운전인 것이 확인 되었었고 뒷자리에 안전벨트를 하고 있었던 나는 내가 뒷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운 좋게 살아남은거야."
  • "아니, 그 날 너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너를 살렸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 트럭 운전기사는 이 곳에서 너를 없애려고 보낸 사역마의 대리고."
  •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갑자기 대뜸 나를 왜 없애려고 사역마의 대리를 보내? 그럼 그 운전기사는 인간이 아니라고?"
  • "인간이 아니라고 한 적은 없어. 그리고 너를 제거하려는 이유는 나를 제거하려는 이유로 볼 수 있는거고."
  • "이 세계에서 너를 제거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왜 굳이 나를?"
  • "이 곳에서 그들은 나를 이길 수 없거든. 그리고 내 수명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 또한 그들이 알고 있고. 그래서 내 의식이 너에게 옮겨가는 것을 막기 위해 너를 죽이려 한 거지."
  • 온통 말도 안 되는 소리 뿐인데 어째서 에반의 말이 말이 된다는 생각이 드는지 정말 알 수 없었다.
  • 특별히 말에 어떠한 힘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가 말하는 것이 온통 거짓일거라 생각하면서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그의 말이 진실이라고 외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 온 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 믿을 수 없는 말이지만 믿겨지고 있는 이 상황이 웃겼다.
  • "그걸.. 믿으라고?"
  • 나는 실소를 흘리며 이 현실에, 그가 말하는 진실을 마지막으로 애써 외면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