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낡은 코트를 입은 남자
-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사무실 안은 무거운 정적에 잠겨 있었다. 공간을 채우는 건 시계 초침 소리뿐이었다.
- 한예준은 묵직한 참나무 책상 앞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 “들어오세요.”
- 그는 최대한 침착하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 문이 천천히 열리며 이승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늘 그렇듯 완벽하게 단정한 차림이었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약간 긴장한 기색이 역력였다.
- 그의 옆에는 중년의 남자가 서 있었다.
- 낡은 코트를 걸친 그 남자는 오래된 서류가방을 들고 있었다. 자세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맴돌았지만, 눈빛만큼은 날카롭고 꼼꼼했다. 작은 부분도 놓치지 않는 그런 예리한 시선이었다.
- 한예준은 단번에 알아챘다.
- 그 전설적인 화가, 도민석.
- 순간 그의 심장은 조여들었다. 정말… 자신이 이 미친 짓을 실행에 옮긴 걸까.
- “대표님.”
- 송하림이 약간 엄숙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한예준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겉으로는 여전히 냉정하고 절제된 모습을 유지하며, 손을 내밀었다.
- “처음 뵙겠습니다, 도민석 씨.”
- 그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긴장감이 섞여 있었다.
- “반갑습니다, 대표님.”
- 화가는 차분하게 말했다. 낮고 안정적인 목소리였다. 불필요한 아첨도, 과장된 공손함도 없었다.
- 그 순간 한예준은 다시금 거대한 의심에 짓눌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이 일...
- 꿈에서만 본 여자를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 생각할수록 모든 게 우스꽝스럽고 굴욕적으로 느껴졌다. 한씨 그룹 대표가 환상의 여인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화가를 고용하다니.
- 한예준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짜증과 당혹감을 억지로 삼켰다.
- 하지만 이제 와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이미 너무 멀리까지 와 버렸으니까.
- “앉으십시오.”
- 마침내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겉은 태연했지만, 속은 여전히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가겠습니다.”
- 송하림이 한예준에게 짧게 격려의 눈빛을 보낸 뒤,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방을 나가며 문을 부드럽게 닫았다.
- 사무실에는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 은은한 커피 향과 오래된 나무 냄새가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 도민석은 천천히 한예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움직임은 차분했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 그의 시선은 예리했지만 불쾌할 정도로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마치 보통 사람들보다 더 깊은 곳을 들여다볼 줄 아는 듯했다.
- “자, 대표님.”
- 그가 부드럽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잔잔한 말투 속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힘이 숨겨져 있었다.
- “대표님 얘기는 들었습니다. 솔직히 꽤… 독특한 의뢰더군요.”
-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이며, 눈빛은 한층 더 진지했다.
- “그 여자를 가능한 한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 낮고 안정적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 “얼굴 생김새, 눈빛, 분위기… 그리고 그녀 곁에서 느꼈던 감정까지 전부요.”
- 한예준은 자신을 짓누르던 긴장이 조금씩 풀리는 걸 느꼈다. 마치 무거운 쇠사슬이 서서히 느슨해지는 것 같았다.
- 굳어 있던 어깨가 살짝 내려가고, 숨결도 조금은 편안해졌다.
- 이 남자… 이상하게도 마음에 들었다.
- 도민석은 가식이 전혀 없었다. 한씨 그룹 대표 앞에서 알랑거리거나 비위를 맞추려 하지 않았다. 돈과 권력에도 흔들리지 않는, 그저 일에만 완전히 집중하는 사람이었다.
- 그러한 태도가 묘하게 한예준의 마음을 움직였다.
- 그 후 두 시간 동안 사무실에는 두 사람의 대화 소리와 연필로 종이를 스치는 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 도민석은 놀라울 정도로 집중하며 작업에 몰두했다. 그는 끊임없이 질문했다.
- 정확하면서도 섬세했고, 때로는 한예준도 예상하지 못 한 질문들이었다.
- 덕분에 한예준은 점점 더 깊게 꿈속 여자를 떠올렸다.
- 그는 눈을 감았다.
- 바람에 흔들리던 그녀의 머리칼, 따뜻한 미소, 빛과 신비가 함께 담긴 눈동자.
- 그 모든 기억은 너무 선명하면서도, 동시에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희미했다.
- 이 과정은 이상할 만큼 몰입도 깊었지만 지독하게 피곤했다.
- 한예준은 피로가 몸 구석구석까지 스며드는 걸 느꼈고 마음 한켠에서는 여전히 믿기 어려운 생각이 지리했다.
- 꿈과 환상만으로 어찌 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 하지만 도민석은 달랐다.
- 처음부터 끝까지 침착했고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연필을 움직이는 손은 빠르고 정확했다. 마치 이미 그 여자의 얼굴을 직접 본 사람처럼.
- 마침내—
- 도민석은 연필을 내려놓고 천천히 종이를 돌려 한예준에게 내밀었다.
- “보시죠.”
- 도민석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 그리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심장은 미친 듯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생생했다. 당장이라도 말을 걸어올 듯 선명했다.
- 매일 밤 꿈속에 그를 찾아왔다가 새벽이 되면 사라지던 바로 그 여자였다.
- “세상에…”
- 도민석이 거의 들리지 않을 듯 작게 숨을 내뱉었다.
- 등줄기를 타고 차가운 전율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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