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오빠, 너무 써
- 박강현은 더 이상 그녀의 모습을 보지 않으려는 듯 차갑게 커튼을 닫았다.
- ‘그 늙은이를 구슬려 결혼하도록 날 협박하게 만든 여자인데, 분명 우는 것도 연기겠지.’
- 하지만 안소율은 누군가가 2층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 한참을 울던 그녀는 눈물을 닦고 마음을 추슬렀다. 잘못은 이미 저질러버렸고, 울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 최대한 힘닿는 데까지 틀어진 일을 바로잡는 수 박에 없었다.
- 오후에 금방 뽑아낸 난초들이기에 지금 다시 심으면 아마 일부분은 다시 살아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안소율은 달빛 아래 절대 꺾이지 않는 풀처럼 작은 몸으로 마당 여기저기를 바쁘게 누비고 다녔다.
- 새벽 3시, 갑자기 눈을 뜬 박강현의 눈빛에는 짜증과 살기가 가득했다. 낮 동안 보여줬던 느긋함과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 그는 마치 깊은 악몽에서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 너무 조용했다. 잠에 들기만 하면 사방이 너무 고요했다. 고요하다 못해 마치 온통 어둠뿐인 하수구 속에 있는 것만 같았고, 그는 마치 그 어두운 하수구에 갇힌 괴물 같았다.
- 그러던 그때, 박강현의 귓가에 낮은 소리가 들려왔다. 나직이 바스락 거리는 소리였다. 그 나지막한 소리가 그를 가두고 있던 어둠을 깨버렸다.
- 자신을 잠식해가고 있던 감정에서 벗어난 그는 몸을 일으켜 창가로 걸어갔다.
- 커튼을 걷어내자 소리의 근원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아래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자그마한 인영이 보였다.
- 이미 뽑혀 있던 난초들이 하나하나 다시 심어지고 있었다. 안소율은 조심스럽게 난초들을 심어내려 갔다.
- 그녀는 현재 돈이 그리 많지 않았고, 일단 이렇게라도 어느 정도 다시 살려낼 수 있을지 시도해 본 뒤, 그럼에도 살려내지 못한 부분은 앞으로 돈을 벌어 천천히 갚아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 머리가 어질거렸다. 아마도 어제 찬물로 샤워를 한 탓에 열이 나고 있는 것 같았다.
- 하지만 그녀는 멈출 수가 없었다. 뽑아낸 난초들은 오래 놓아둘수록 다시 심었을 때 살 가능성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것들도 다 돈이었다. 아이들의 책 값이었고, 학용품 값이었다.
- 그런 것들에 비하면 자신이 아픈 것은 그저 약을 먹으면 나을 사소한 일에 불과했다.
- 2층에 있는 박강현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저 그렇게 조용히 그녀를 지켜보았다. 놀랍게도 마음속의 분노가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다.
- 안소율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하늘가에 어슴푸레 한줄기 빛이 스며들 때가 되어서야 뽑아낸 난초들을 전부 다시 심어놓은 그녀는 물을 한번 주고는 그 난초들이 살아날 수 있기를 기도했다.
- 그리고 다음 순간, 안소율이 들고 있던 주전자가 바닥에 떨어지더니 그녀가 그대로 화단 옆에 쓰러졌다.
- 더 타운에 도착한 뒤로 이제껏 계속 바쁘게 돌아치느라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한 데다, 어제 찬물로 샤워를 한 탓에 원래부터 감기기운이 조금 있었던 상태였다.
- 오늘 오후 내내 뜨거운 태양아래 마당의 흙을 고르고, 잡초를 뽑고, 저녁에는 속상한 마음에 온 밤을 꼬박 새웠으니, 아무리 건강한 그녀라도 버텨낼 수 없었던 것이다.
- 2층에서 지켜보던 박강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 그는 아래층으로 내려와 안소율의 앞으로 다가갔다.
- 고열로 인해 작은 얼굴이 온통 붉게 달아 오른 지저분한 상태의 안소율을 발견한 박강현은 짜증스러운 듯 그녀를 안아 들고는 몸을 돌려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 박강현은 자신이 그다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 꼬맹이가 자신의 집에서 고열로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나중에 박호진에게 뭐라 설명하기가 곤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 이에 그는 해열제를 찾아와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 “얼른 일어나서 약 먹어.”
- 하지만 기절해 버린 사람이 그렇게 명령한다고 일어날 리가 없었고, 당연하게도 안소율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 이에 인내심이 바닥나버린 박강현은 아예 그녀를 부축해 세우고는 해열제를 안소율의 입안에 억지로 밀어 넣었다.
- 그러자 약이 너무 썼던 탓인지 안소율이 어렴풋이 눈을 떴다. 그 맑고 초롱초롱한 두 눈이 지금 이 순간 물기를 머금어 마치 갓 태어난 아기고양이처럼 가련해 보였다.
- 정신없는 와중에 가끔 자신을 보살펴주던 옆집 오빠를 본 그녀는 실수로 박강현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 이어 그녀는 조금 억울한 듯 나직이 옹알거렸다.
- “오빠, 너무 써.”
- 박강현은 순간 동작을 멈추더니 그녀의 입에서 손가락을 꺼낸 뒤, 물 한잔을 가져와 명령했다.
- “뱉지 말고 삼켜.”
- 안소율은 뱉어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녀는 얌전히 약을 삼킨 뒤 박강현의 품에 기대 작은 머리를 부비적거리더니 이내 몽롱하게 잠에 빠져들었다.
- 박강현은 자신의 품에 기대 있는 그녀를 들어 올려 다시 침대 위로 던져놓았다.
- 하지만 무슨 목적인지는 몰라도 그는 곧바로 그곳을 떠나가지 않았다. 아마도 안소율의 그 눈빛이 하수구아래의 그 작은 고양이와 너무 닮아있어서인지도 모른다.
- 그의 뼛속 깊은 곳에서 흐르는 차가운 피까지도 약간의 온기를 머금어가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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