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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아닐지라도 괜찮아

사랑이 아닐지라도 괜찮아

예지

Last update: 2024-12-23

제1화 겸사겸사 결혼했다

  • “소율아, 큰 도시로 가면 너 스스로 잘 챙겨야 해.”
  • “소율아, 희망초등학교에 네 장학금을 보내 줄 필요 없어.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게 됐잖니. 서울은 여기 시골하고는 달라. 거기는 학비도 그렇고, 먹고 지내는 것들도 다 엄청 비싸다더라.”
  • 외진 산골 마을의 순박한 마을 사람들이 한 예쁜 소녀를 배웅해 주고 있었다.
  • 초라한 옷차림의 정석과도 같은 흰 티셔츠와 색 바랜 청바지를 입은 채 긴 머리를 높게 올려 묶은 소녀는 큰 눈에 오똑한 코,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조그맣고 정교한 얼굴에 귀엽고 예쁜 생김새였다.
  • 안소율은 커다란 가방을 등에 메고 짐들을 바리바리 짊어진 채 도시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 그녀는 창가 자리에 앉아 마을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며 찬란한 미소를 지었다.
  • “다들 어서 들어가 보세요. 교장선생님한테 조금만 더 버티시라고 말해주세요.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지 못하면 안 되잖아요. 제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게 되면 학교로 돈 보낼게요.”
  • 서울의 한 대학교에 붙게 된 안소율은 그녀가 자라온 산골을 떠날 참이었다.
  • 아직은 개학하기엔 이른 시기였지만 안소율이 이토록 급히 서울로 향하는 건 지난 몇 년간 그녀가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후원해 준 박호진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 겸사겸사 박호진의 한심한 손자와 결혼을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말이다…
  • ……
  • 돈을 아끼기 위해 시외버스를 타기로 한 안소율은 2박 3일에 걸쳐서야 서울에 도착했다.
  • 약속한 장소에서 만난 개량 한복 차림의 박호진은 그녀가 상상했던 대로 다정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 박호진이 얼굴 한가득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 “소율아, 정말로 내 그 한심한 손자 녀석과 결혼을 하겠다는 거니?”
  • 이에 안소율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자신의 가슴을 팡팡 두드리며 대답했다.
  • “정말로요!”
  • 안소율은 진지하게 생각을 해봤었다.
  • 작은 은혜에도 최대한 크게 보답해야 하는 법이다.
  • 박호진은 몇십 년간 산골 마을 아이들이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후원해 주고 있었고 그녀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 이토록 커다란 은혜를 입었으니 그녀는 꼭 이에 보답해야 했다.
  • 박호진은 자신의 손자가 얼마나 한심하고 쓸모없는 녀석인지에 대해 자주 이야기 하곤 했었고, 28살이 되도록 아직도 결혼을 하지 못한 그 손자에 대해 그녀는 꽤나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 그렇기에 그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박호진을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어차피 많은 마을 사람들 역시 누군가의 소개를 통해 몇 번 정도 만나보고 결혼한 경우가 허다했기에 안소율이 보기에는 서로에 대해 잘 모르는 두 사람이 결혼을 하는 것도 꽤나 정상적인 상황이었다.
  • 박호진은 그런 그녀가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 지난 시간 동안 산골 마을의 아이들을 후원해 오면서 그 역시 그녀가 자라온 모든 과정을 지켜봐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착하고 성실한 데다 예쁘고 공부까지 잘하는 그녀였기에 그는 이 기회에 끝까지 밀어붙일 생각이었다.
  • “이왕 소율이 네가 승낙했으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 바로 혼인신고부터 하자꾸나!”
  • “네? 오늘이요?”
  • “그래, 바로 오늘.”
  • ‘겨우 손자 녀석을 협박해 결혼에 대한 승낙을 받아냈는데 더 미룰 것 없이 지금 당장 혼인신고를 해버려야겠어!’
  • 30분 뒤, 시청 앞.
  • 안소율은 드디어 박호진에게 쓰레기라고 불리는 그의 손자 박강현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안소율은 순간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었다.
  • 쓰레기라면 마땅히 마을의 그 밭일도 못하고 닭도 제대로 키워내지 못하는 팔푼이들을 칭하는 말이어야 했지만, 그는… 뭐랄까, 굉장히 잘생겼던 것이다.
  • 그녀는 온 마을을 통틀어 이렇게 잘생긴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다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 다만 그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 안소율은 박강현을 향해 예의 바른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박강현은 온몸으로 쉽게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 게다가 안소율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혐오가 담겨있었다.
  • ‘날 협박해 결혼을 승낙하게 만들도록 할아버지를 구슬리다니, 재주도 좋군.’
  • 박호진의 다그침 아래, 두 사람은 구청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박강현에게서 짜증을 느낀 구청 직원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 “두 분 혼인신고 하러 오신 거 맞으시죠?”
  • 이에 박강현이 차가운 시선을 던지자, 그 시선에 놀란 직원이 얼른 서류를 접수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