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화가를 불러와
- 한예준이 무거운 문을 힘껏 밀어 열자, 넓은 사무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 은은한 어둠이 그를 감싸 안았다. 한예준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마치 이곳에 들어서야 비로소 세상으로부터 숨을 쉴 수 있는 듯했다.
- 끝없는 불면의 밤을 지나, 밝은 낮빛은 그에게 견디기 힘든 존재가 되어 있었다. 너무 선명했고, 차갑고도 무자비했다. 늘 그의 지시에 따라 사무실 창문에 내려진 블라인드가 바깥 도시의 분주한 풍경을 두꺼운 장막처럼 완전히 가려냈다.
- 책상 위에는 이미 오늘의 일정이 완벽하게 정리되어 놓여 있었다.
- 회의, 협상, 계약 서명...
- 빼곡히 적힌 일정표는 무거운 쇳덩이처럼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 한예준은 손으로 얼굴을 살며시 쓸어내리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일상 업무 속으로 뛰어들 힘도, 의욕도 남아 있지 않았다.
- 하지만 그는 무너져서는 안됐다.
-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의지하고 있었고, 그가 흔들리는 순간 모든 것이 산산조각날 수 있었다.
- 한예준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승호를 바라봤다. 피로에 지친 눈빛 속엔, 스스로의 광기와 끝없이 싸워온 자의 단단한 결의가 함께 빛나고 있었다.
- “네가 말한 그 화가를 불러와.”
-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묵직한 목소리가 마치 망치가 공간을 내리치는 듯 울려 퍼졌다.
- “이 악몽도 이제 끝내야 하니까.”
- ...
- “서아, 제발 애처럼 굴지 좀 마.”
- 박민재가 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카메라 렌즈를 그녀에게 맞춘 채 신중하게 각도를 조절하고 있었다.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정확하고 능숙했다. 단순히 사진을 찍는 게 아니라 작품을 만들어내는 사람 같았다.
- “박민재, 너 진짜 너무해…”
- 민서아가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투덜거렸다.
- “잠깐이라도 쉬면 안 돼? 나 너무 피곤해…”
- 그녀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떨렸고, 눈빛에는 애처로운 부탁이 가득 담겨 있었다.
- 백민재는 카메라를 살짝 내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짙은 눈동자에 엄격한 빛이 스쳤지만, 곧 부드럽게 풀어졌다.
- “야. 넌 최고의 모델이야.”
-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이어서 장난기 어린 미소도 지었다.
- “하지만 동시에 우리 스튜디오에서 제일 까다로운 모델인 것도 맞아.”
- 민서아는 입술을 삐죽이면서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 찰칵, 찰칵, 찰칵——
-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박민재는 재빠르게 셔터를 눌렀다. 그에게 셔터 소리는 음악처럼 아름다웠다.
- “바로 이거야!”
- 그가 감탄하며 외쳤다. 카메라를 내린 그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 “진짜 살아 있네. 너무 자연스럽고 리얼해… 넌 정말 대단해, 서아야.”
- 민서아는 얼굴이 살짝 붉어졌지만, 모른 척하며 시선을 돌렸다.
- “알았어.”
- 박민재가 과장되게 한숨을 쉬며 두 손을 들었다.
- “10분만 쉬어.”
- 민서아는 그 말을 듣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스튜디오 구석 푹신한 소파로 털썩 몸을 던졌다.
- “넌 세상에서 제일 좋은 친구야.”
- 그녀가 아래에서 올려다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 박민재는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내려다봤다. 비웃는 듯한 표정이 스치긴 했지만, 그 안에는 따뜻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 “넌 그걸 너무 뻔뻔하게 이용하고 있지.”
- 결국 박민재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피식 웃었다.
- 민서아는 맑고 경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스튜디오 안을 가득 채우며 긴장과 피로를 한순간에 날려버렸다. 작고 맑은 물방울이 부딪히는 소리 같았다.
- 그녀는 장난스럽게 고개를 갸웃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 “그보다 말해봐.”
- 능청스러운 목소리였다.
- “아진이랑 화해했어?”
- 박민재는 순간 굳어 버렸다.
- 방금 전까지 환했던 그의 얼굴이 마치 스위치가 꺼진 것처럼 금세 어두워졌다. 늘 따뜻하고 생기 있던 눈동자는 깊고 무거운 어둠 속에 잠겼다. 폭풍 전 바다처럼.
- “…아니.”
- 그가 고개를 돌리며 낮게 말했다. 마치 그 말 자체가 너무 힘겨운 것처럼.
- “이번엔… 정말 끝인 것 같아.”
- 민서아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농담이길 바라는 마음에 박민재를 살폈지만, 그의 얼굴엔 상처만뿐이었다.
- “말도 안 돼…”
- 그녀가 겨우 속삭였다.
- 박민재는 시선을 피한 채 카메라 스트랩을 손가락으로 꽉 움켜쥐었다. 그 순간 그의 얼굴 위를 짧게 스쳐 간 어두운 그림자. 너무 순간적이라 정확한 감정은 읽을 수 없었지만, 그 주제가 그를 얼마나 깊이 아프게 하는지는 충분히 느껴졌다.
- “내 얘긴 됐어.”
- 그가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더 이상 이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멀고 공허하게 들렸다.
- “그보다… 네 어머니는 좀 어떠셔?”
- 순간 민서아의 눈빛이 흐려졌다. 참으려 했던 눈물이 눈가에 금세 맺혔다.
-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며 감정을 애써 억누르려 했지만, 떨리는 목소리까지 숨기진 못했다.
- “상태가… 안 좋아.”
- 그 짧은 말 속에는 어떤 긴 문장보다도 더 깊은 절망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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