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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오늘 밤 안 돌아갈 거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주방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 “할아버지, 제가 들어가 볼게요.”
  • 안율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미소를 지으며 노인의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 “재환 씨는 분명 한 번도 설거지를 해본 적 없을 거예요. 그러니 제가 가르쳐 줘야죠.”
  • 말을 마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들어갔다. 윤재환은 싱크대 앞에 서서 마침 세제를 짜고 있었다.
  • “할 수 있겠어요? 도와줄까요?”
  • 안율은 그의 집에 살면서 그의 심기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 “할아버지가 계시는데 내가 어떻게 감히 윤씨 가문의 사모님께 그런 수고를 시키겠어?”
  • 비꼬는 듯한 그 말에 안율은 조금 난처했다. 이에 그의 옆에 잠시 서 있던 소녀는 입술을 삐죽이며 눈치껏 돌아서서 주방을 나갔다.
  • 윤재환은 밖에 있는 노인이 대체 누구의 할아버지인지 모를 심정이었다.
  • 이내 밖에서 윤창범의 잔뜩 기분 좋은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율아, 이 할애비 오늘 밤 안 돌아가련다! 여기 남아서 너희 둘이 신혼 첫날밤을 보내는 걸 지켜볼 거야!”
  • 그 말에 한창 설거지를 하고 있던 남자는 흠칫 손을 떨었다. 이에 자칫하면 들고 있던 그릇을 떨어뜨릴 뻔했다.
  • 윤재환의 눈빛이 끝도 없이 짙어졌다. 그는 깜짝 놀라 뒷목이라도 잡고 쓰러질 지경이었다.
  • 하지만 오늘 밤 이곳에서 머무르겠다는 할아버지의 말을 안율은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집도 너르니 지낼 곳은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 “율아.”
  • 윤창범이 갑자기 정색하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 “기회가 될 때 양가 어른들도 한번 만나야 하지 않겠니? 비록 너랑 재환이는 이미 혼인신고까지 했다지만, 예물이라든지 결혼식이라든지 이런 것들도 절차대로 진행해야지.”
  • 이는 안율이 내내 걱정하고 있던 문제였다. 그런데 윤창범이 결국에는 이를 언급한 것이었다.
  • “할아버지, 저는 예물 필요 없어요. 결혼식도 안 해도 돼요.”
  • 안율은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 “저희 친정집이 조금 엉망이라서요. 양아버지가 도박에 빠져계셔서 이미 빚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상황이고, 양어머니는 지금 막 고3이 된 남동생을 챙기느라 제 일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으세요. 제가 결혼을 한 건… 그저 남은 시간을 함께할 벗을 찾고 싶었던 것뿐이고, 그 집에서 나와서 지낼 만한 곳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에서였을 뿐이에요. 그래도 할아버지께서 저를 아껴주시는 건 감사하게 생각해요.”
  • 그녀의 설명을 듣고도 윤창범은 딱히 놀란 기색이 없었다. 더욱이 그녀를 얕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녀가 진솔하다고 생각했다.
  • 사실 그녀의 집안 상황에 대해서 그는 이미 자세하게 조사해 본 상태였다.
  • “율아, 상황이 어떻든 예절 면에서는 남자 집안의 어른 된 도리로서 우리 쪽에서 제대로 진행을 해야지. 그렇다고 평생을 서로 얼굴도 한번 안 보고 살 수는 없잖니?”
  • 윤창범 역시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었다.
  • “……”
  • 안율은 조금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 이에 노인은 조급해하지 않고 자상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강요하지는 않으마. 그래도 이 일에 대해 생각해 보겠다고 약속해 주렴. 그래 주겠니?”
  • “알겠어요.”
  • 소녀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설거지를 마친 윤재환이 주방에서 나왔다.
  • “전 회답해야 할 이메일이 있어서 실례할게요.”
  • 말을 마친 그는 곧장 서재로 들어갔다.
  • 윤창범은 거실 소파에 앉아 안율의 손을 잡고 그녀에게 윤재환의 어릴 적 이야기를 잔뜩 해주었다.
  •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그 남자에 대해 여전히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알게 된 것이라고는 그가 다른 아이들보다 똑똑했고, 공부도 열심히 했으며, 꽤 잘했다는 것뿐이었다.
  • 저녁 아홉 시쯤 윤창범이 직접 주방에서 우유를 데워 숙면에 도움을 준다면서 안율에게 한 잔 건넸다.
  • “율아, 따듯할 때 마셔. 그럼 푹 잘 수 있을 게다.”
  •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 소녀는 달콤하게 미소 지었다.
  • 자신이 결혼한 남자가 어떤지는 막론하고, 적어도 할아버지 한 분은 잘 만난 것 같았다.
  • 노인이 다른 한 잔의 우유를 들고 서재 문을 두드리려던 그때, 문이 열리며 손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 “재환아, 일은 이제 그만하거라. 신혼 첫날밤이라는 개념이 있긴 한 거냐?”
  • 노인은 손자의 손에 우유 잔을 쥐여주며 말을 이어갔다.
  • “따듯할 때 마시고 푹 자거라.”
  •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 두 사람이 아무런 경계심 없이 우유를 마시고 나자, 윤창범은 소파에 다시 앉으며 두 사람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 “너희는 이만 들어가서 자거라.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난 오늘 소파에서 자련다.”
  • “할아버지, 게스트룸에서 주무세요.”
  • 안율은 그가 감기에라도 걸릴까 걱정스러웠다.
  • “괜찮다. 난 소파에서 자는 게 좋아.”
  • 말을 마친 노인은 지팡이를 내려놓고 그대로 몸을 돌려 소파에 눕더니 안방 문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너희는 어서 들어가.”
  • “……”
  • 윤재환은 기가 막혔다. 그의 할아버지는 지금 그가 이 번갯불에 콩 볶듯 결혼을 한 신부와 침실에 들어가도록 압박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 그 옆에 서 있던 안율도 그 뜻을 눈치챈 듯 순간 굉장히 난처해하는 기색을 보였다.
  • 그렇게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르고, 윤재환이 몸을 돌려 안방으로 들어갔다. 문은 닫지 않은 채였다.
  • 그러자 윤창범이 눈살을 찌푸리며 안율을 향해 말했다.
  • “율이 너 아직도 멍하니 서서 뭐 하고 있는 거냐? 일찍 들어가서 쉬어야지! 얼른 들어가거라. 시간은 금이라고 했어. 낭비하면 안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