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마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들어갔다. 윤재환은 싱크대 앞에 서서 마침 세제를 짜고 있었다.
“할 수 있겠어요? 도와줄까요?”
안율은 그의 집에 살면서 그의 심기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계시는데 내가 어떻게 감히 윤씨 가문의 사모님께 그런 수고를 시키겠어?”
비꼬는 듯한 그 말에 안율은 조금 난처했다. 이에 그의 옆에 잠시 서 있던 소녀는 입술을 삐죽이며 눈치껏 돌아서서 주방을 나갔다.
윤재환은 밖에 있는 노인이 대체 누구의 할아버지인지 모를 심정이었다.
이내 밖에서 윤창범의 잔뜩 기분 좋은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율아, 이 할애비 오늘 밤 안 돌아가련다! 여기 남아서 너희 둘이 신혼 첫날밤을 보내는 걸 지켜볼 거야!”
그 말에 한창 설거지를 하고 있던 남자는 흠칫 손을 떨었다. 이에 자칫하면 들고 있던 그릇을 떨어뜨릴 뻔했다.
윤재환의 눈빛이 끝도 없이 짙어졌다. 그는 깜짝 놀라 뒷목이라도 잡고 쓰러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오늘 밤 이곳에서 머무르겠다는 할아버지의 말을 안율은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집도 너르니 지낼 곳은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율아.”
윤창범이 갑자기 정색하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기회가 될 때 양가 어른들도 한번 만나야 하지 않겠니? 비록 너랑 재환이는 이미 혼인신고까지 했다지만, 예물이라든지 결혼식이라든지 이런 것들도 절차대로 진행해야지.”
이는 안율이 내내 걱정하고 있던 문제였다. 그런데 윤창범이 결국에는 이를 언급한 것이었다.
“할아버지, 저는 예물 필요 없어요. 결혼식도 안 해도 돼요.”
안율은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저희 친정집이 조금 엉망이라서요. 양아버지가 도박에 빠져계셔서 이미 빚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상황이고, 양어머니는 지금 막 고3이 된 남동생을 챙기느라 제 일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으세요. 제가 결혼을 한 건… 그저 남은 시간을 함께할 벗을 찾고 싶었던 것뿐이고, 그 집에서 나와서 지낼 만한 곳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에서였을 뿐이에요. 그래도 할아버지께서 저를 아껴주시는 건 감사하게 생각해요.”
그녀의 설명을 듣고도 윤창범은 딱히 놀란 기색이 없었다. 더욱이 그녀를 얕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녀가 진솔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녀의 집안 상황에 대해서 그는 이미 자세하게 조사해 본 상태였다.
“율아, 상황이 어떻든 예절 면에서는 남자 집안의 어른 된 도리로서 우리 쪽에서 제대로 진행을 해야지. 그렇다고 평생을 서로 얼굴도 한번 안 보고 살 수는 없잖니?”
윤창범 역시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었다.
“……”
안율은 조금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이에 노인은 조급해하지 않고 자상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강요하지는 않으마. 그래도 이 일에 대해 생각해 보겠다고 약속해 주렴. 그래 주겠니?”
“알겠어요.”
소녀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설거지를 마친 윤재환이 주방에서 나왔다.
“전 회답해야 할 이메일이 있어서 실례할게요.”
말을 마친 그는 곧장 서재로 들어갔다.
윤창범은 거실 소파에 앉아 안율의 손을 잡고 그녀에게 윤재환의 어릴 적 이야기를 잔뜩 해주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그 남자에 대해 여전히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알게 된 것이라고는 그가 다른 아이들보다 똑똑했고, 공부도 열심히 했으며, 꽤 잘했다는 것뿐이었다.
저녁 아홉 시쯤 윤창범이 직접 주방에서 우유를 데워 숙면에 도움을 준다면서 안율에게 한 잔 건넸다.
“율아, 따듯할 때 마셔. 그럼 푹 잘 수 있을 게다.”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소녀는 달콤하게 미소 지었다.
자신이 결혼한 남자가 어떤지는 막론하고, 적어도 할아버지 한 분은 잘 만난 것 같았다.
노인이 다른 한 잔의 우유를 들고 서재 문을 두드리려던 그때, 문이 열리며 손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재환아, 일은 이제 그만하거라. 신혼 첫날밤이라는 개념이 있긴 한 거냐?”
노인은 손자의 손에 우유 잔을 쥐여주며 말을 이어갔다.
“따듯할 때 마시고 푹 자거라.”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두 사람이 아무런 경계심 없이 우유를 마시고 나자, 윤창범은 소파에 다시 앉으며 두 사람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너희는 이만 들어가서 자거라.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난 오늘 소파에서 자련다.”
“할아버지, 게스트룸에서 주무세요.”
안율은 그가 감기에라도 걸릴까 걱정스러웠다.
“괜찮다. 난 소파에서 자는 게 좋아.”
말을 마친 노인은 지팡이를 내려놓고 그대로 몸을 돌려 소파에 눕더니 안방 문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희는 어서 들어가.”
“……”
윤재환은 기가 막혔다. 그의 할아버지는 지금 그가 이 번갯불에 콩 볶듯 결혼을 한 신부와 침실에 들어가도록 압박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옆에 서 있던 안율도 그 뜻을 눈치챈 듯 순간 굉장히 난처해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렇게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르고, 윤재환이 몸을 돌려 안방으로 들어갔다. 문은 닫지 않은 채였다.
그러자 윤창범이 눈살을 찌푸리며 안율을 향해 말했다.
“율이 너 아직도 멍하니 서서 뭐 하고 있는 거냐? 일찍 들어가서 쉬어야지! 얼른 들어가거라. 시간은 금이라고 했어. 낭비하면 안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