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청 혼인 신고 서류 접수 창구 앞에서 안율은 한창 펜을 들고 필요한 정보들을 적어 넣고 있었고, 그런 그녀의 옆에는 차가운 인상의 귀티가 흐르는 남자가 하나 서 있었다.
그 남자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남다른 분위기에 직원들은 저도 모르게 그를 힐끔거렸다.
“윤…”
소녀가 갑자기 펜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그에게 물었다.
“이름이 윤 뭐라고 했었죠?”
그 말에 직원은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두 분 서로 모르는 사이세요?”
남자는 주위의 놀란 듯한 반응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소녀가 들고 있던 펜을 가져가더니 허리를 숙여 빈칸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윤재환.
그렇게 두 사람은 사인을 하고 도장을 찍은 뒤 서류 발급까지 모든 과정을 마치고 구청을 나섰다.
윤재환이 짙은 눈썹을 찌푸린 채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나야 할아버지 때문에 결혼하는 거지만, 넌 무슨 의도로 나와 결혼을 하겠다고 한 거지?”
“늘그막에 벗이 필요해서요.”
안율은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우리 집 형편으로 봐서는 아무도 저랑 결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자칫하면 혼자 늙어 죽을지도 모른다고요.”
이같이 솔직한 대답은 남자의 예상을 훨씬 벗어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오후에 할아버지를 뵈러 가야 하니까 데리러 갈게.”
그러더니 그녀에게 열쇠와 키카드를 건넸다.
“더 플라워 라운지 88동 2801호. 최대한 빨리 짐 가지고 들어와.”
소녀는 가볍게 달싹이는 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그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말에는 그 어떤 온도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녀가 손을 뻗어 열쇠와 키카드를 건네받기가 무섭게 남자는 곧바로 몸을 돌려 떠나갔다.
안율은 그런 그의 훤칠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세워져 있는 차 한 대도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이 람보르기니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윤재환의 정체 역시 알지 못했다.
그녀는 오늘 그를 처음 만난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급히 그와 혼인 신고를 한 것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였다.
사실 안율은 윤재환의 할아버지와도 그다지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고작 두 번 만나본 것이 다였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의 할아버지는 그녀를 콕 집어 마음에 들어 했다.
람보르기니가 쏜살같이 떠나가고, 정신을 차린 안율은 손을 뻗어 택시를 한 대 잡았다.
택시 뒷좌석에 올라탄 그녀의 마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딴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안승호! 당신은 정말이지 어디까지 날 실망시킬 셈이야! 아들 수능이 코앞인데 당신은 도박으로 도대체 얼마를 날린 거야? 빚쟁이들이 학교까지 찾아갔다고! 명훈이가 공부하는 데 영향을 준 건 그렇다 치고, 잘못되면 학교에서 제적당할 수도 있단 말이야! 그럼 애 장래는 망하는 거라고!”
“너는 허구한 날 땍땍거리는 것밖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냐! 싫으면 이혼하던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애 양육권 줄 테니까, 네가 알아서 키우던지!”
“나라고 이혼 안 하고 싶은 줄 알아? 명훈이 때문에 계속 참고 있는 거야! 애 대학만 가면 당장 이혼할 거야! 어디 가서 구걸을 하고 다니더라도 당신한테는 한 푼도 안 바라! 아들한테 완전한 가정을 주려고 했는데 이 지경으로나 살게 하고… 흑흑…”
부모님은 오늘 아침에도 또 한 번 크게 다투었다.
어머니가 절망에 차 히스테리를 부리기 시작한 건 빚쟁이들이 집안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TV마저 가져간 뒤였다.
하지만 안율을 숨 막히게 만든 건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그녀를 진짜로 숨 막히게 만든 건 어젯밤 무심결에 듣게 된 그 통화였다.
도박에 빠진 아버지가 4천만 원을 위해 그녀를 팔아버리려 하고 있었다. 그것도 동네의 악질 졸부에게 억지로 시집을 보내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그녀는 오늘 급한 마음에 윤재환의 할아버지의 부탁을 수락해 윤재환과 결혼을 한 것이었다.
그의 할아버지가 자신의 손자는 집도 있고, 차도 있는 데다, 직업도 안정적이고, 나쁜 취미 같은 것도 없다면서 그녀더러 한번 생각해 보라고 했었던 것이다.
택시는 신림동으로 향하고 있었다.
안율은 정신을 차리고 휴대폰을 꺼내 자신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내가 지금 데리러 가고 있으니까 짐 챙겨. 오늘부터 나와서 지내.”
“율아, 오지 마…”
어머니의 말이 미처 끝나지도 않았는데, 다음 순간 수화기 너머에서는 규칙적인 신호음이 흘러나왔다. 누군가에게 휴대폰을 빼앗긴 것이 분명해 보였다.
“엄마! 여보세요? 엄마!”
안율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휴대폰을 꽉 움켜쥐며 택시 기사에게 빨리 가달라고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