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환아, 네가 율이를 보듬어 줘야 해. 돈을 벌어 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책임을 짊어지고 있으니, 밖에 나가 한눈팔지 말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면 안사람은 더 다정하고 조신해지고, 너는 점점 더 사랑받는 남편이 될 게다. 너도 언젠가는 네가 보석 같은 아이와 결혼을 했다는 걸 알게 될 게야.”
“네.”
윤재환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런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노인이 조금 엄숙해진 얼굴로 물었다.
“그건 무슨 태도냐?”
“걱정 마세요, 할아버지. 명심할게요.”
할아버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윤재환은 얼른 말투를 바로 하며 얼굴에 미소까지 띤 채 말했다.
“제가 알아서 잘할게요.”
그제야 노인은 손자의 대답에 만족한 듯 다시 미소 지었다.
그는 손자가 잘하지 못하면 자신이 감독을 해가면서라도 잘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리고는 손자며느리를 향해 시선을 돌린 노인의 얼굴에는 자상한 미소가 한가득 떠올라 있었다.
그는 그녀가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율아, 만약 재환이가 잘 못 해주면 할아버지한테 말해. 그럼 할아버지가 혼내줄 테니!”
이에 소녀는 차마 답하지 못하고 그저 작게 미소 지었다. 윤창범이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재환이 이 녀석이 어려서부터 똑똑했으니, 일도 열심히 할 거고, 지금에야 그렇게 잘하진 못하더라도, 앞으로 분명 더 가족을 챙기고, 너도 더 많이 사랑해 줄 거야.”
“네, 할아버지.”
소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재환 씨를 믿어요.”
윤재환의 담담하기만 한 얼굴에는 결혼에 대한 기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정정하신 할아버지의 모습에 그도 마음이 놓였다.
오히려 윤창범이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산다는 것도 다 한때야. 체력과 정신력을 잃으면 바람 앞의 등불과 같지.”
노인은 그들의 손을 놓아주고는 침대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굉장히 안심이 된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너희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니 이 할애비는 기분이 좋구나. 한 20년은 더 살 수 있겠어! 운이 좋으면 너희들의 아이가 결혼을 하는 것까지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니 얼른 증손주를 안겨주려무나! 이제는 그게 이 할애비의 가장 큰 소망이다.”
이에 윤재환은 속으로는 거부감이 한가득 들었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얼버무렸다.
그 옆에 서 있는 안율 역시 적당히 선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윤창범을 안심시켜야 했을 뿐만 아니라 윤재환을 기분 나쁘게 만들 수도 없었다. 그가 자신의 어머니를 구해주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참, 율아, 이 녀석 집으로 들어간 거니?”
윤창범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는 그것을 아주 중요한 문제로 여기는 듯했다. 이에 윤재환이 얼른 답했다.
“들어왔어요.”
“그래그래, 아주 잘 됐구나.”
노인의 얼굴 위에 미소가 한가득 떠올랐다.
의사가 찾아와 윤창범의 병세가 호전되었으니 내일이면 퇴원해도 된다고 알려주었다.
윤재환은 계속 병원에 남아 할아버지의 곁을 지키려 했지만 노인은 곧바로 그런 그를 향해 호통쳤다.
“신혼 첫날밤을 병원에서 보내겠다는 거냐? 누구와 함께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거야?”
그렇게 안율을 데리고 병원 로비를 빠져나온 윤재환은 계단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입을 열었다.
“너희 어머니는 네가 사는 셋집 앞에 모셔다드릴 테니 너는 거기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돼. 그리고 최대한 빨리 내 집으로 들어와서 함께 지내도록 해. 할아버지가 불시로 찾아오실 수도 있어.”
말을 마친 그는 자신의 람보르기니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은 아예 하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안율이 미처 무언가 반응도 하기 전에 그의 차는 그대로 그곳을 떠나갔다.
택시를 타고 셋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녀는 다시 한번 확신했다. 윤재환은 이미 그녀에 대해 낱낱이 조사를 마친 상태라는 것을 말이다.
그는 그녀가 어디에서 지내고 있는지까지 알고 있었다.
어쩌면 다행인 것도 같았다. 자신의 복잡한 집안 사정에 대해 그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기 위해 용기를 낼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그의 앞에 발가벗고 선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자신과는 달리 그는 그토록 헤아리기 어려운 상대였다. 그녀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오직 그의 이름과 그를 굉장히 아끼는 할아버지가 한 분 계신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저 간단하게 집 있고, 차 있고, 직업까지 있는, 그런 인물이 아닌 것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설마 어느 조직의 보스 같은 건 아니겠지?’
택시가 목적지에 도착하고, 차에서 내린 그녀는 캐리어를 끌고 자신의 셋집 앞에 서 있는 고성희를 발견했다.
그녀는 잔뜩 헝클어진 머리에 이마에는 상처가 난 채 굉장히 초라한 모습이었다.
“엄마!”
안율은 급히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엄마, 괜찮아?”
두 모녀는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고성희를 자신의 셋집으로 데리고 들어온 안율은 얼른 구급상자를 꺼내 그녀의 이마에 난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그녀의 말투에서는 또래와는 다른 침착함이 느껴졌다.
“엄마, 오늘부터 여기서 지내. 어차피 안승호 그 사람은 여기 위치도 모르니까, 일단은 마음 놓고 명훈이도 여기서 학교 다니라고 하고. 고3 한 해는 굉장히 중요한 시기잖아.”
“그럼 너는? 우리가 여기서 지내면 넌 어디서 지내려고?”
고성희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희 아빠가 그 사람한테서 4천만 원을 받았어. 그러니 이 일은 이대로는 안 끝날 거야.”
하지만 안율은 그 일이 이미 끝났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그녀는 혼인관계증명서를 꺼냈다.
“난 지낼 곳이 있어. 그 사람이 어젯밤 통화하는 거 우연히 들었거든. 그래서 나 결혼했어.”
“뭐?!”
고성희는 깜짝 놀라며 얼른 그녀의 손에 들린 종이를 가져다 확인하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오늘 혼인신고를 한 거니? 누구랑? 윤재환이 누구야? 믿을만한 사람인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마음대로 혼인신고를 해버리면 어떡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