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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들어와서 함께 지내

  • 노인은 또 자신의 손자를 향해 당부했다.
  • “재환아, 네가 율이를 보듬어 줘야 해. 돈을 벌어 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책임을 짊어지고 있으니, 밖에 나가 한눈팔지 말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면 안사람은 더 다정하고 조신해지고, 너는 점점 더 사랑받는 남편이 될 게다. 너도 언젠가는 네가 보석 같은 아이와 결혼을 했다는 걸 알게 될 게야.”
  • “네.”
  • 윤재환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런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노인이 조금 엄숙해진 얼굴로 물었다.
  • “그건 무슨 태도냐?”
  • “걱정 마세요, 할아버지. 명심할게요.”
  • 할아버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윤재환은 얼른 말투를 바로 하며 얼굴에 미소까지 띤 채 말했다.
  • “제가 알아서 잘할게요.”
  • 그제야 노인은 손자의 대답에 만족한 듯 다시 미소 지었다.
  • 그는 손자가 잘하지 못하면 자신이 감독을 해가면서라도 잘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 그리고는 손자며느리를 향해 시선을 돌린 노인의 얼굴에는 자상한 미소가 한가득 떠올라 있었다.
  • 그는 그녀가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 “율아, 만약 재환이가 잘 못 해주면 할아버지한테 말해. 그럼 할아버지가 혼내줄 테니!”
  • 이에 소녀는 차마 답하지 못하고 그저 작게 미소 지었다. 윤창범이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 “재환이 이 녀석이 어려서부터 똑똑했으니, 일도 열심히 할 거고, 지금에야 그렇게 잘하진 못하더라도, 앞으로 분명 더 가족을 챙기고, 너도 더 많이 사랑해 줄 거야.”
  • “네, 할아버지.”
  • 소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저는 재환 씨를 믿어요.”
  • 윤재환의 담담하기만 한 얼굴에는 결혼에 대한 기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정정하신 할아버지의 모습에 그도 마음이 놓였다.
  • 오히려 윤창범이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 “산다는 것도 다 한때야. 체력과 정신력을 잃으면 바람 앞의 등불과 같지.”
  • 노인은 그들의 손을 놓아주고는 침대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굉장히 안심이 된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 “너희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니 이 할애비는 기분이 좋구나. 한 20년은 더 살 수 있겠어! 운이 좋으면 너희들의 아이가 결혼을 하는 것까지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니 얼른 증손주를 안겨주려무나! 이제는 그게 이 할애비의 가장 큰 소망이다.”
  • 이에 윤재환은 속으로는 거부감이 한가득 들었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얼버무렸다.
  • 그 옆에 서 있는 안율 역시 적당히 선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윤창범을 안심시켜야 했을 뿐만 아니라 윤재환을 기분 나쁘게 만들 수도 없었다. 그가 자신의 어머니를 구해주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아참, 율아, 이 녀석 집으로 들어간 거니?”
  • 윤창범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는 그것을 아주 중요한 문제로 여기는 듯했다. 이에 윤재환이 얼른 답했다.
  • “들어왔어요.”
  • “그래그래, 아주 잘 됐구나.”
  • 노인의 얼굴 위에 미소가 한가득 떠올랐다.
  • 의사가 찾아와 윤창범의 병세가 호전되었으니 내일이면 퇴원해도 된다고 알려주었다.
  • 윤재환은 계속 병원에 남아 할아버지의 곁을 지키려 했지만 노인은 곧바로 그런 그를 향해 호통쳤다.
  • “신혼 첫날밤을 병원에서 보내겠다는 거냐? 누구와 함께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거야?”
  • 그렇게 안율을 데리고 병원 로비를 빠져나온 윤재환은 계단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입을 열었다.
  • “너희 어머니는 네가 사는 셋집 앞에 모셔다드릴 테니 너는 거기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돼. 그리고 최대한 빨리 내 집으로 들어와서 함께 지내도록 해. 할아버지가 불시로 찾아오실 수도 있어.”
  • 말을 마친 그는 자신의 람보르기니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은 아예 하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 안율이 미처 무언가 반응도 하기 전에 그의 차는 그대로 그곳을 떠나갔다.
  • 택시를 타고 셋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녀는 다시 한번 확신했다. 윤재환은 이미 그녀에 대해 낱낱이 조사를 마친 상태라는 것을 말이다.
  • 그는 그녀가 어디에서 지내고 있는지까지 알고 있었다.
  • 어쩌면 다행인 것도 같았다. 자신의 복잡한 집안 사정에 대해 그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기 위해 용기를 낼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그의 앞에 발가벗고 선 듯한 기분이 들었다.
  • 그런 자신과는 달리 그는 그토록 헤아리기 어려운 상대였다. 그녀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오직 그의 이름과 그를 굉장히 아끼는 할아버지가 한 분 계신다는 것뿐이었다.
  • 하지만 그가 그저 간단하게 집 있고, 차 있고, 직업까지 있는, 그런 인물이 아닌 것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 ‘설마 어느 조직의 보스 같은 건 아니겠지?’
  • 택시가 목적지에 도착하고, 차에서 내린 그녀는 캐리어를 끌고 자신의 셋집 앞에 서 있는 고성희를 발견했다.
  • 그녀는 잔뜩 헝클어진 머리에 이마에는 상처가 난 채 굉장히 초라한 모습이었다.
  • “엄마!”
  • 안율은 급히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 “엄마, 괜찮아?”
  • 두 모녀는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 고성희를 자신의 셋집으로 데리고 들어온 안율은 얼른 구급상자를 꺼내 그녀의 이마에 난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 그녀의 말투에서는 또래와는 다른 침착함이 느껴졌다.
  • “엄마, 오늘부터 여기서 지내. 어차피 안승호 그 사람은 여기 위치도 모르니까, 일단은 마음 놓고 명훈이도 여기서 학교 다니라고 하고. 고3 한 해는 굉장히 중요한 시기잖아.”
  • “그럼 너는? 우리가 여기서 지내면 넌 어디서 지내려고?”
  • 고성희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너희 아빠가 그 사람한테서 4천만 원을 받았어. 그러니 이 일은 이대로는 안 끝날 거야.”
  • 하지만 안율은 그 일이 이미 끝났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그녀는 혼인관계증명서를 꺼냈다.
  • “난 지낼 곳이 있어. 그 사람이 어젯밤 통화하는 거 우연히 들었거든. 그래서 나 결혼했어.”
  • “뭐?!”
  • 고성희는 깜짝 놀라며 얼른 그녀의 손에 들린 종이를 가져다 확인하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 “오늘 혼인신고를 한 거니? 누구랑? 윤재환이 누구야? 믿을만한 사람인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마음대로 혼인신고를 해버리면 어떡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