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등으로 얼굴을 훔치고 폰을 집어 들었다. 내 월급에 사인하는 건 조이권이었다. 이 일을 커리어 망치지 않고 빠져나가려면, 그를 먼저 상대해야 했다.
“여보세요.” 내 목소리는 놀라울 만큼 차분했다.
“차유나.” 조이권의 쉰 목소리가 쩌렁거렸다. “지금 대체 어디야? 한태윤 미쳐 돌아가. 네가 경기장에서 말도 없이 사라졌다더라.”
“몸이 안 좋았어요.” 나는 싸늘하게 말했다.
“잘 들어, 차유나. 네 이민 변호사한테서 전화 왔어. 혼인증명서 쪽에 ‘사소한 문제’가 있다더군. 접수가 안 됐다나?”
소문 참 빠르네.
“사소한 문제가 아니에요. 가짜예요. 한태윤은 제출한 적 없었고 법적으로 아내는 김민서더라고요.”
나는 충격을 기다렸다. 우리 팀의 스타 선수가 중혼자에 사기꾼이라는 사실에 조이권이 분노하길 기다렸다.
하지만 돌아온 건 침묵, 그리고 성가신 듯한 한숨뿐이었다.
“있잖아, 차유나. 난 서류 따위 관심 없어.” 조이권은 툭 던지듯 말했다. “그건 개인사야. 내가 신경 쓰는 건 이미지지. 플레이오프 한창이야. 너랑 한태윤이 뿜어내는 ‘골든 커플’ 이미지 덕에 글레이셔스 주가가 지금 최고야. 팬들은 스타 선수랑 천재 의사 아내 조합에 열광한다고.”
피가 싸늘해졌다. “당신… 놀랍지도 않아요?”
“난 사업가야. 한태윤이… 복잡한 놈이라는 거 알아. 김민서 얘기도 알고. 그런데 걔가 한태윤을 아주 잘 다뤄.”
그는 알고 있었다. 팀의 구단주가, 한태윤이 매니저와 법적으로 결혼한 채 나와 가짜 부부 행세를 하고 있다는 걸.
“그래서, 이게 괜찮다는 거예요?” 나는 폰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사기 쳐도 괜찮고? 날 이용해도 괜찮고?”
“한태윤이 골만 넣어 준다면 뭐든 상관없어.” 조이권이 딱 잘라 말했다.
“자, 앞으로 이렇게 할 거다. 너는 이 비자 문제를 조용히 해결해. 변호사가 필요하면 비용은 내가 댄다. 그리고 시즌 끝날 때까지는 한태윤 옆을 지켜. 스캔들은 절대 안 돼. 이별도 안 돼. 지금 네가 떠나면 팀 사기가 무너져. 만약 정 그렇게 한다면, 차유나… 넌 다시는 스포츠의학계에서 발 붙일 곳 없게 될 거다. 네 평판, 내가 완전히 묻어버릴 테니까.”
협박이 공기 중에 매달린 듯 무겁고 답답했다.
다 한패였다. 스타인 한태윤. 조종하는 김민서. 그리고 그걸 비호하는 조이권.
그들에게 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도구였다. 한태윤의 몸을 고쳐 주고, 대중 앞에서 이미지를 반짝이게 만드는 소품.
“알겠어요.” 나는 낮게 말했다.
“착하지.” 조이권의 말투가 부드러워졌는데, 깔보는 기색이 뚝뚝 떨어졌다. “집에 가서 한태윤이랑 얼른 화해해. 이번 주말에 네 서프라이즈 파티를 크게 준비한다더라. 카메라 앞에선 웃고.”
뚝— 전화를 끊었다.
나는 폰만 멍하니 바라봤다. 착하지.
바닥에 떨어진 임신 테스트기를 다시 봤다. 두 줄.
이 아기를 낳으면, 나는 평생 한태윤에게 묶인다. 그는 이 아이를 이용할 거다. 김민서의 아이를 이용하려 했듯이, 나도 그 아이로 옭아맬 거다. 옆방에서 김민서랑 잠을 자면서, 우릴 행복한 가족인 척 들먹이며 온 세상에 보여줄 거다.
그리고 조이권은 그걸 도울 거고.
이 늪에 아이를 끌어들일 순 없어. 그들의 비틀린 게임에서 무고한 생명을 말뚝처럼 박아 둘 순 없어.
나는 아이를 사랑한다. 누구보다 엄마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는 안 돼. 그 남자와는 더더욱.
심장이 으스러지듯 깨진 파편들이 가슴 한가운데 뾰족하게 꽂혔다. 나는 테스트기를 집어 들고 휴지통으로 갔다. 두툼하게 휴지로 감싸,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기적의 증거를 숨겼다.
다시 폰을 들었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평생 누르고 싶지 않던 번호를 찾았다.
여성클리닉 - 예약.
전화를 걸었다.
“이스트사이드 여성클리닉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상냥한 여자 목소리가 받았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붙잡았다.
“예약하려고요.” 내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어떤 예약이신가요?”
나는 눈을 감았다.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내렸다.
“임신 중절이요.” 나는 속삭였다. “가능한 빨리요.”
“내일 오후 두 시에 빈자리가 있어요. 괜찮으실까요?”
“네.” 내가 말했다. “괜찮아요.”
전화를 끊고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거울 속 여자는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유령 같았다. 하지만 눈은 말랐다. 슬픔 대신 다른 게 자리잡고 있었다.
차갑고 단단한 결심.
날더러 남으라고? 카메라 앞에서 모범적인 아내 행세를 하라고?
좋아. 남을게. 딱 내가 다른 방법으로 비자 정리할 때까지만. 그들의 사기 행각 증거를 낱낱이 모을 때까지만. 그들의 제국이 산산조각 나는 걸 끝까지 지켜볼 때까지만...
한태윤이 서프라이즈를 원해? 내가 제대로 보여주지.
하지만 먼저, 내 안에서 자라고 있는 그의 흔적부터 도려내야 했다.
나는 게스트룸, 한태윤이 절대 들어오지 않는 그 방에 누워, 커튼 사이로 새벽빛이 스며들 때까지 천장을 바라봤다. 손이 본능처럼 아랫배로 갔다.
평평했다. 아직 아무 표시도 없었다. 그래도 나는 알고 있었다. 거기 있었다. 지금쯤 ‘매니저’와 호화 호텔에서 자고 있을 그 남자와 같은 DNA를 가진, 아주 작은 세포 덩어리.
해야 돼, 백 번도 넘게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 아이를 지키겠다고 버티면, 조이권은 그 아이를 지렛대로 쓸 거다. 한태윤은 그저 소품 취급할 테고, 김민서는 해하려 달려들겠지. 이 전쟁터에 아이를 데려오는 건 사랑이 아니다. 잔인함이다.
그런데도 내일 오후 두 시, 그 클리닉 문을 들어서는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죄어 와 숨이 막혔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살아남는 게 먼저야, 차유나. 감정은 그다음.
몸을 일으켜 노트북을 집어 들었다. 시계는 오전 6시를 가리켰다.
서른 날.
내 비자가 만료되기까지 서른 날. 한태윤과 유효한 결혼이 없으면, 나는 그저 외국인일 뿐. 그것도… 글레이셔스에 묶인 취업비자.
젠장.
조이권은 내 평판을 묻어버리겠다 협박했다. 내가 그만두면 스폰서십은 즉시 끊길 거다. 일주일 안에 추방당하겠지. 새 스폰서가 필요했다. 조이권을 누를 수 있을 만큼 힘 있는 새 고용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