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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 손등으로 얼굴을 훔치고 폰을 집어 들었다. 내 월급에 사인하는 건 조이권이었다. 이 일을 커리어 망치지 않고 빠져나가려면, 그를 먼저 상대해야 했다.
  • “여보세요.” 내 목소리는 놀라울 만큼 차분했다.
  • “차유나.” 조이권의 쉰 목소리가 쩌렁거렸다. “지금 대체 어디야? 한태윤 미쳐 돌아가. 네가 경기장에서 말도 없이 사라졌다더라.”
  • “몸이 안 좋았어요.” 나는 싸늘하게 말했다.
  • “잘 들어, 차유나. 네 이민 변호사한테서 전화 왔어. 혼인증명서 쪽에 ‘사소한 문제’가 있다더군. 접수가 안 됐다나?”
  • 소문 참 빠르네.
  • “사소한 문제가 아니에요. 가짜예요. 한태윤은 제출한 적 없었고 법적으로 아내는 김민서더라고요.”
  • 나는 충격을 기다렸다. 우리 팀의 스타 선수가 중혼자에 사기꾼이라는 사실에 조이권이 분노하길 기다렸다.
  • 하지만 돌아온 건 침묵, 그리고 성가신 듯한 한숨뿐이었다.
  • “있잖아, 차유나. 난 서류 따위 관심 없어.” 조이권은 툭 던지듯 말했다. “그건 개인사야. 내가 신경 쓰는 건 이미지지. 플레이오프 한창이야. 너랑 한태윤이 뿜어내는 ‘골든 커플’ 이미지 덕에 글레이셔스 주가가 지금 최고야. 팬들은 스타 선수랑 천재 의사 아내 조합에 열광한다고.”
  • 피가 싸늘해졌다. “당신… 놀랍지도 않아요?”
  • “난 사업가야. 한태윤이… 복잡한 놈이라는 거 알아. 김민서 얘기도 알고. 그런데 걔가 한태윤을 아주 잘 다뤄.”
  • 그는 알고 있었다. 팀의 구단주가, 한태윤이 매니저와 법적으로 결혼한 채 나와 가짜 부부 행세를 하고 있다는 걸.
  • “그래서, 이게 괜찮다는 거예요?” 나는 폰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사기 쳐도 괜찮고? 날 이용해도 괜찮고?”
  • “한태윤이 골만 넣어 준다면 뭐든 상관없어.” 조이권이 딱 잘라 말했다.
  • “자, 앞으로 이렇게 할 거다. 너는 이 비자 문제를 조용히 해결해. 변호사가 필요하면 비용은 내가 댄다. 그리고 시즌 끝날 때까지는 한태윤 옆을 지켜. 스캔들은 절대 안 돼. 이별도 안 돼. 지금 네가 떠나면 팀 사기가 무너져. 만약 정 그렇게 한다면, 차유나… 넌 다시는 스포츠의학계에서 발 붙일 곳 없게 될 거다. 네 평판, 내가 완전히 묻어버릴 테니까.”
  • 협박이 공기 중에 매달린 듯 무겁고 답답했다.
  • 다 한패였다. 스타인 한태윤. 조종하는 김민서. 그리고 그걸 비호하는 조이권.
  • 그들에게 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도구였다. 한태윤의 몸을 고쳐 주고, 대중 앞에서 이미지를 반짝이게 만드는 소품.
  • “알겠어요.” 나는 낮게 말했다.
  • “착하지.” 조이권의 말투가 부드러워졌는데, 깔보는 기색이 뚝뚝 떨어졌다. “집에 가서 한태윤이랑 얼른 화해해. 이번 주말에 네 서프라이즈 파티를 크게 준비한다더라. 카메라 앞에선 웃고.”
  • 뚝— 전화를 끊었다.
  • 나는 폰만 멍하니 바라봤다. 착하지.
  • 바닥에 떨어진 임신 테스트기를 다시 봤다. 두 줄.
  • 이 아기를 낳으면, 나는 평생 한태윤에게 묶인다. 그는 이 아이를 이용할 거다. 김민서의 아이를 이용하려 했듯이, 나도 그 아이로 옭아맬 거다. 옆방에서 김민서랑 잠을 자면서, 우릴 행복한 가족인 척 들먹이며 온 세상에 보여줄 거다.
  • 그리고 조이권은 그걸 도울 거고.
  • 이 늪에 아이를 끌어들일 순 없어. 그들의 비틀린 게임에서 무고한 생명을 말뚝처럼 박아 둘 순 없어.
  • 나는 아이를 사랑한다. 누구보다 엄마가 되고 싶었다.
  • 하지만 이렇게는 안 돼. 그 남자와는 더더욱.
  • 심장이 으스러지듯 깨진 파편들이 가슴 한가운데 뾰족하게 꽂혔다. 나는 테스트기를 집어 들고 휴지통으로 갔다. 두툼하게 휴지로 감싸,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기적의 증거를 숨겼다.
  • 다시 폰을 들었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평생 누르고 싶지 않던 번호를 찾았다.
  • 여성클리닉 - 예약.
  • 전화를 걸었다.
  • “이스트사이드 여성클리닉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상냥한 여자 목소리가 받았다.
  •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붙잡았다.
  • “예약하려고요.” 내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 “어떤 예약이신가요?”
  • 나는 눈을 감았다.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내렸다.
  • “임신 중절이요.” 나는 속삭였다. “가능한 빨리요.”
  • “내일 오후 두 시에 빈자리가 있어요. 괜찮으실까요?”
  • “네.” 내가 말했다. “괜찮아요.”
  • 전화를 끊고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거울 속 여자는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유령 같았다. 하지만 눈은 말랐다. 슬픔 대신 다른 게 자리잡고 있었다.
  • 차갑고 단단한 결심.
  • 날더러 남으라고? 카메라 앞에서 모범적인 아내 행세를 하라고?
  • 좋아. 남을게. 딱 내가 다른 방법으로 비자 정리할 때까지만. 그들의 사기 행각 증거를 낱낱이 모을 때까지만. 그들의 제국이 산산조각 나는 걸 끝까지 지켜볼 때까지만...
  • 한태윤이 서프라이즈를 원해? 내가 제대로 보여주지.
  • 하지만 먼저, 내 안에서 자라고 있는 그의 흔적부터 도려내야 했다.
  • 나는 게스트룸, 한태윤이 절대 들어오지 않는 그 방에 누워, 커튼 사이로 새벽빛이 스며들 때까지 천장을 바라봤다. 손이 본능처럼 아랫배로 갔다.
  • 평평했다. 아직 아무 표시도 없었다. 그래도 나는 알고 있었다. 거기 있었다. 지금쯤 ‘매니저’와 호화 호텔에서 자고 있을 그 남자와 같은 DNA를 가진, 아주 작은 세포 덩어리.
  • 해야 돼, 백 번도 넘게 스스로에게 말했다.
  • 이 아이를 지키겠다고 버티면, 조이권은 그 아이를 지렛대로 쓸 거다. 한태윤은 그저 소품 취급할 테고, 김민서는 해하려 달려들겠지. 이 전쟁터에 아이를 데려오는 건 사랑이 아니다. 잔인함이다.
  • 그런데도 내일 오후 두 시, 그 클리닉 문을 들어서는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죄어 와 숨이 막혔다.
  •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살아남는 게 먼저야, 차유나. 감정은 그다음.
  • 몸을 일으켜 노트북을 집어 들었다. 시계는 오전 6시를 가리켰다.
  • 서른 날.
  • 내 비자가 만료되기까지 서른 날. 한태윤과 유효한 결혼이 없으면, 나는 그저 외국인일 뿐. 그것도… 글레이셔스에 묶인 취업비자.
  • 젠장.
  • 조이권은 내 평판을 묻어버리겠다 협박했다. 내가 그만두면 스폰서십은 즉시 끊길 거다. 일주일 안에 추방당하겠지. 새 스폰서가 필요했다. 조이권을 누를 수 있을 만큼 힘 있는 새 고용주가.
  • 리그에서 그런 돈과 영향력 가진 팀은 딱 하나였다.
  • 보스턴 타이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