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이 빙판에서 날아온 삐딱한 퍽보다 더 세게 가슴팍을 때렸다. 책상 너머 남자를 멍하니 봤다. 밀러 담당관. 우리가 앉은 이 관공서만큼이나 얼굴이 말끔하고 차가웠다.
“네?”
간신히 입이 떨어졌다. 목소리는 물속에서 떠오르는 공기방울 같았다.
“그건 정식 혼인증명서예요. 1년 내내 액자에 넣어서 침대 머리맡에….”
“등록번호는 무효입니다. 도장은 장식이고.”
밀러가 한 톤 낮은 목소리로, 전혀 동정 없는 어조로 바로잡았다.
그는 금박 무늬로 번쩍이는 종이를 굵은 손가락으로 ‘툭’ 찔렀다.
“이런 건 기념품 가게에서 주말 동안 결혼놀이하려고 사는 거죠. 미국 정부 눈에는, 당신 미혼입니다.”
방이 빙글 돌았다. 머리 위 형광등의 윙윙거림이 갑자기 두개골을 뚫는 드릴 소리로 변했다. 손이 본능적으로 반지로 갔다. 손가락의 다이아 반지. 수수하고 우아했다. 그런데 지금은 달아오른 낙인처럼 수치심을 지져댔다.
‘플레이오프야, 유나야.’
한태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미끄러지듯 울렸다. 벨벳처럼 부드러운 그 목소리. 수백만의 팬을 홀리고, 한밤중 비밀식으로 나를 결혼하게 만든 그 목소리.
‘연습 빼먹으면 감독이 난리 나. 서류는 네가 처리해. 넌 똑똑하잖아.’
그 말은 맞았다.
나는 똑똑했고 뉴욕 글레이셔스의 의료팀 책임자이자 팀 주치의였다.
하여 커리어 내내 톱니처럼 갈라진 상처를 꿰매고, 빠진 어깨를 ‘탁’ 소리 나게 밀어 넣었다. 관중 2만 명이 피를 부르듯 소리치는 한가운데서도 칼같이 침착했다.
그런데, 나는 365일 내내 꾸며진 거짓 속에서 살고 있었다.
“틀림없이 착오가 있는 거예요.”
나는 더듬거렸다. 심장이 갈빗대 안에서 새장 새처럼 미친 듯이 퍼덕였다.
“제 남편, 한태윤… 그는 글레이셔스의 간판 공격수예요. 그의 매니지먼트 팀이 접수 다 했고요. 변호사들도—”
“한태윤 씨 변호사들이 당신을 위해 접수한 건 없습니다, 차유나 씨.”
밀러가 말을 끊었다.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안경을 벗었다.
“설령 시도했어도 소용없었을 겁니다. 한태윤 씨는 앞으로도 법적으로 당신과 결혼할 수 없어요.”
“왜죠?”
목에 유리 조각이 박힌 듯한 소리로 속삭였다.
“당신 남편… 그러니까 한태윤 씨는 이미 다른 사람과 혼인 관계에 있습니다.”
밀러가 모니터를 돌려 내 쪽으로 밀었다.
파란 빛이 눈을 하얗게 태웠다. 초점이 맞자 데이터베이스 기록이 보였다. 한태윤의 이름. 그리고 바로 옆, 배우자 항목에는 내 이름이 아니었다.
내 이름보다 더 익숙한 이름이 있었다.
김민서, 그의 매니저.
“법적으로,”
밀러가 단두대 날처럼 툭툭 떨어뜨리듯 말했다.
“한태윤 씨는 3년째 결혼 상태입니다.”
김민서.
그 이름이 명치에 날아든 슬랩샷처럼 꽂혔다. 숨이 턱 막혀 플라스틱 의자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한태윤의 스케줄과 광고, 이미지 관리를 전부 쥔 여자.
팀 회식 자리에서 내 맞은편에 앉아 비싼 와인을 홀짝이며 “얘, 귀엽다” 하고 날 평가하던 여자.
‘비밀’ 결혼식을 위해 드레스를 고를 때, 그 손으로 직접 거들어 준 여자.
‘오, 천사 같아. 한태윤이 널 보면 기절하겠다.’
그녀는 내 웨딩드레스를 골라준 게 아니었다. 바보가 분장하고 나갈 ‘비밀 아내’의 코스튬을 골라준 거였다.
“햄프턴스에 있는 부동산에 공동 모기지가 있네요.”
밀러가 계속 말했다. 그의 눈에 잠깐, 정말 잠깐 연민 같은 게 스쳤다.
“작년에 부부 공동으로 세금 신고도 했고요. 법이 인정하는 모든 의미에서 그 둘은 부부입니다. 당신은, 그러니까 차유나 씨는 그냥 미국에 잠시 머무는 손님일 뿐이고, 그 시간도 거의 다 됐습니다.”
“프로 일정 때문이라고….”
말이 꺽꺽 막혔다. 가슴속에서 히스테릭한 웃음이 거품처럼 치밀어 올랐다.
“그가, 한태윤이 지금 못 오는 건 프로 일정 때문이라고 했어요.”
“음, ‘일정’에는 아주 충실하네요.”
밀러가 내 ‘기념품’ 증서를 책상 위로 밀어 돌려보냈다.
“한태윤 씨와 즉시 해결하시길 권합니다. 당신의 취업 비자는 그의 배우자 신분에 연동돼 있는데, 실제로는 그 신분이 없어요. 30일 안에 바로잡지 않으면 강제 출국입니다.”
30일.
벌떡 일어섰다. 다리가 젤리처럼 흐물거렸다. 서류철을 집어 든 기억도, 사무실을 걸어나온 기억도 없다. 딱 하나 기억나는 건 뉴욕의 오후 공기가 칼날처럼 얼굴을 베어내며 현실로 나를 후려친 순간뿐이었다.
나는 아내가 아니었다. 커버 스토리였다. ‘얼음 왕자’가 진짜 아내와 이중생활을 하는 동안, 그를 가려주는 소품.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손이 덜덜 떨려 핸들을 제대로 잡기도 힘들었다. 집으로 가지 않았다. 그가 있을 유일한 곳으로 갔다. 경기장.
팀 주치의라서 스태프 전용 출입구 키카드가 있었다. 콘크리트 터널을 유령처럼 지나갔다. 고무 매트 위로 구두 굽이 ‘탁, 탁’ 장송곡을 찍듯 울렸다. 락커룸에 도착했다. 머릿속은 배신과 분노로 소용돌이쳤다. 메디컬룸 문손잡이에 손이 닿으려던 그때, 발이 얼어붙게 만드는 소리가 들렸다.
낄낄거림.
“그만… 애들 금방 빙판에서 올라와.”
김민서였다. 숨이 짧아진, 높고 은밀한 목소리.
“보라지 뭐.”
한태윤의 낮고 걸걸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이제 널 숨기는 것도 지긋지긋해, 민서야. 차유나한테 아기 ‘입양’ 서류만 사인하게 하면, 드디어 우리도 사람들 앞에서 진짜 가족으로 살 수 있어.”
“그 ‘고아’ 스토리, 걔가 믿을까?”
“차유나 걔 실은 가족에 목말라 있잖아, 그리고 차유나가 똑똑하다고? 남들 고쳐주느라 바빠서 코앞의 것도 못 봐. 우리 애 키우면서 오히려 나한테 고맙다고 할걸.”
둘이 함께 웃었다. 잔혹하게 잘 맞는 화음. 가슴에 남아 있던 마지막 조각까지 산산이 부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