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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 나는 문을 박차고 들어가지 않았다.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내가 부서지는 꼴을 보여주는 쾌감은 절대 주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 대신 돌아서서 걸어 나왔다. 아레나 터널의 고무 매트 위로 내 하이힐 소리만 조용히 미끄러졌다.
  • 한 걸음 걷는 게 몇 리나 되는 것처럼 무겁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날카로운 얼음 조각을 삼키는 기분이 들었다. 두꺼운 철문 너머로 터져 나오던 웃음소리, 그 잔인하게 잘 맞는 합창이 머릿속에 메아리로 울렸다. 한태윤이 내 귓가에 속삭였던 모든 “사랑해”를 비웃는 소리였다.
  • 어떻게 주차장까지 왔는지 기억도 안 난다. 시동을 어떻게 걸었는지도 모르겠다.
  • 정신을 차렸을 땐, 아우디 핸들을 하얗게 쥐어짜고 있었다. 백미러엔 글레이셔스 아레나의 거대한 덩치가 버티고 서 있었다. 한때 내 제2의 집이라 불렀던 곳. 이제는 1년짜리 거짓말의 기념비일 뿐인 곳.
  • 조수석에 둔 휴대폰이 진동했다. 김민서에게서 온 문자였다.
  • [영주권 나오면 바로 알려줘. 한태윤이 네가 여기 못 남을까 봐 엄청 걱정하잖아!]
  • 위선이 진짜 주먹처럼 날아왔다. 폐가 찢어질 때까지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한태윤은 내 비자 문제를 걱정한 게 아니었다. 공짜 베이비시터를 잃을까 봐 걱정한 거였지. “미친 팬들”한테서 날 지킨다는 것도 거짓말. 지켜온 건 자기 진짜 결혼 생활이었다.
  • 나는 “똑똑한 애”였다. 리그 최고의 외과의. 괴사 조직을 보는 눈이 있었고, 어떤 팔다리는 도저히 살릴 수 없다는 것도 판단할 줄 알았다.
  • 그리고 한태윤은, 암덩어리였다.
  • “게임을 하고 싶다 이거지?”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좋아, 같이 놀아줄게.”
  • 의사가 없으면 팀은 수술대에서 죽는 거다.
  • 그런데 운명은 그 위에 자기 농담을 얹었다. 참 잔인하게도.
  • 욕실 바닥이 차가웠다.
  • 안방 욕실 바닥에 앉아, 손에 든 작은 플라스틱 막대를 멍하니 내려다봤다.
  • 집 안의 정적이 귀를 때렸다. 존재한 적도 없는 결혼의 유령들로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 집, 내 저축으로 산 집. “세금 문제 때문”이라며 그의 이름으로 등기했던 집. 또 하나의 거짓말. 모든 게 다 거짓말이었다.
  • 상자엔 5분을 기다리라고 적혀 있었다.
  • 차에서 올라온 메스꺼움이 단순한 슬픔 때문만은 아니었다. 의사인 나는 내 몸을 안다. 가슴이 은근히 불어오르는 느낌, 플레이오프 탓이라며 넘겼던 피로감. 다 알아챘다.
  • 한태윤은 몇 달을 우려먹듯 말했다. 내가 “고장 났다”고.
  • “괜찮아, 유나야,” 매번 테스트가 음성일 때마다, 가짜 연민으로 촉촉해진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아마 네 스트레스 때문에 내 아기를 못 품는 것 같네.”
  • 그는 나를 결함 있는 여자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내 몸에 대해, 내 생물학을 두고 가스라이팅했다. 그 여자의 아이를 위해 길을 터주려고.
  • 나는 막대를 내려다봤다.
  • 분홍 선 두 줄이 진하게 그려져 있었다.
  • 틀릴 리 없다. 임신이다.
  • 히스테릭한 웃음이 목구멍에서 부풀어 올랐다가, 날카롭게 부서진 울음으로 뒤바뀌었다. 입을 막았다. 눈물이 뺨을 뜨겁게 태웠다. 나는 불임이 아니었다. 고장 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내 뱃속엔, 나를 말 그대로 말판으로 써서 자기 사생아를 키우게 할 계획을 세우고 있을 그 남자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 잔혹함이 완벽했다. 그는 아마도 내가 임신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겠지. 다만, 내 아이는 원치 않았던 거야.
  • “개자식,” 나는 비싸기만 한, 텅 빈 방에 대고 속삭였다.
  • 손이 배로 올라갔다. 생명. 내 일부. 동시에, 나를 무너뜨린 괴물의 일부.
  • 욕조 매트 위에 둔 폰이 또 진동했다. 타일에 부딪쳐 부르르 떨렸다. 지난 20분 동안 멈추질 않았다. 한태윤에게서 부재중 7통. 김민서에게서 3통.
  • 그리고, 새 이름이 화면에 떴다.
  • 조이권.
  • 글레이셔스 구단주. 내 커리어와 내 미래를 손바닥에 쥔 남자.
  • 진동 소리가 카운트다운처럼 들렸다. 나는 단 1초만 눈을 감았다. 가슴 터질 듯 울던 여자는 그 자리에서 보내고, 외과의가 다시 자리를 잡았다. 이제, 썩은 살을 도려낼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