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꿈과 현실
- 한서윤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무심코 냅킨 끝자락을 만지작거리던 손끝은 멈추지 않았지만, 시선은 이미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 크루즈 갑판에서 바라보던 수평선, 바다와 하늘이 하나로 이어지던 그 풍경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 “이건... 내 최고의 작품이 될 거야.”
- 한서윤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 “... 크루즈 여행에서 떠올린 컬렉션이야.”
- 강민우는 말을 끊지 않았다.
- 지금 한서윤은 단순히 졸업 작품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었다. 오랫동안 마음속에서 품어 온 무언가를 처음 꺼내 보이고 있었다.
- “그날 밤이 아직도 기억나.”
- 한서윤은 어느새 강민우가 아니라 자신의 기억을 더듬듯 말을 이어 갔다.
- “폭풍이 정말 심했어. 파도는 배를 계속 때리고 바람은 모든 걸 뒤집어 놓을 것처럼 몰아쳤지.”
- 잠시 말을 멈춘 그녀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 “그런데 갑자기 고요가 찾아왔어. 너무 깊고 조용해서... 마치 세상 전체가 숨을 멈춘 것 같았어.”
- 그 기억은 지금도 생생했다.
- “바람이 멎고 바다는 거울처럼 잔잔해졌어. 구름 뒤에 숨어 있던 달이 모습을 드러내자 바다가 전부 금빛으로 물든 것처럼 보였고.”
- 한서윤은 눈을 감았다.
- 그 순간만큼은 정말 다시 그 배 위에 서 있는 사람 같았다.
- “그때 난 혼자 갑판에 있었어. 숨도 제대로 못 쉴 만큼 아름다웠어.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알았지. 내가 어떤 컬렉션을 만들고 싶은지.”
- 다시 눈을 뜬 한서윤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 “이건 내면의 폭풍에 대한 이야기야.”
- 처음보다 훨씬 힘 있는 목소리였다.
- “한 여자가 있어. 폭풍 속에서 산산조각 난 여자지. 고통과 두려움, 외로움이 그녀를 끝없이 흔들어 놓아.”
- 한서윤은 자신의 이야기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 “하지만 결국 고요가 찾아와. 모든 게 끝나서가 아니라, 그 여자가 그 모든 걸 견뎌 내고 더 강해졌기 때문이야.”
- 이야기를 이어 갈수록 그녀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 손끝도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 마치 이미 머릿속에서 수십 장의 스케치를 그리고 있는 것처럼.
- “컬렉션 전반부는 어두울 거야. 거칠고 드라마틱하게.”
- 한서윤은 손짓으로 형태를 그리며 설명했다.
- “마감되지 않은 원단, 날카로운 실루엣, 비에 젖은 듯한 텍스처. 색감도 회색이나 차콜, 푸른빛이 감도는 스틸 컬러를 쓸 생각이야. 폭풍이 오기 직전의 하늘 같은 느낌으로.”
- 강민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숨소리조차 죽였다.
- 한서윤은 이미 자신만의 세계 속에 들어가 있었다.
- “그리고 후반부는 완전히 달라.”
-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 “빛이 찾아오는 거야.”
- 한서윤의 눈빛도 함께 밝아졌다.
- “모든 게 가벼워지고 부드러워져. 투명한 원단과 은은하게 흐르는 빛, 공기처럼 가벼운 움직임들.”
- 손끝이 천천히 허공에 곡선을 그렸다.
- “드레스는 물처럼 흘러야 해. 색감은 새벽을 닮았으면 좋겠고. 진주빛이랑 라벤더, 그리고 잿빛이 섞인 연분홍 같은 색들.”
- 깊게 숨을 들이마신 한서윤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 “이건 단순한 패션이 아니야.”
- 그녀의 눈빛이 은은하게 빛났다.
- “사람이 상처를 견디고 앞으로 걸어가는 이야기야.”
- 잠시 침묵이 흘렀다.
- 강민우는 한서윤을 바라보며 말을 잊었다.
-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 늘 밝고 다정한 친구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의 한서윤은 그보다 훨씬 깊고 단단해 보였다.
- “서윤아...”
- 강민우가 낮게 불렀다.
- “정말 놀랍다.”
- 그는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 “네가 재능 있는 디자이너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어. 그런데 지금 네가 말한 건 단순한 졸업 작품이 아니야.”
- 강민우는 천천히 웃었다.
- “그건 예술이야.”
- 잠시 말을 고른 그가 덧붙였다.
-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진짜 예술.”
- 한서윤은 부끄러운 듯 웃었다.
- 하지만 그 순간 마음 한구석이 따뜻하게 데워지는 걸 느꼈다.
- 강민우는 언제나 자신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 주었다.
- 그리고 누구보다 잘 이해해 주었다.
- 그 사실이 오늘은 유난히 크게 다가왔다.
- “그럼 넌?”
- 한서윤이 컵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쓸며 물었다.
- “졸업 작품 아이디어는 정했어?”
- 강민우는 머쓱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 “안 믿겠지만 아직 아무것도 없어.”
- “뭐?”
- 한서윤이 눈을 크게 떴다.
- “민우야, 넌 항상 아이디어가 넘쳤잖아. 난 당연히 스케치까지 다 끝냈을 줄 알았는데.”
- 강민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 “아마 여름에 영감을 다 써 버렸나 봐.”
- 그 말에 한서윤이 피식 웃었다.
-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 “그럼 내가 도와줄까?”
- 강민우는 천천히 그녀를 바라봤다.
- 그 눈빛에는 고마움과 애정, 그리고 차마 말로 꺼낼 수 없는 감정까지 함께 담겨 있었다.
- “진심이야?”
- “그럼.”
- 한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 “영감이란 게 원할 때마다 찾아오는 건 아니잖아. 가끔은 누군가가 옆에서 문을 두드려 줘야 나타나기도 하고.”
- 강민우는 조심스럽게 한서윤의 손을 잡았다.
- 스치듯 가벼운 움직임이었지만 그에게는 큰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었다.
- 한서윤도 손을 빼지 않았다.
- 두 사람 사이에 따뜻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 하지만 그 평온한 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 옆 홀에서 갑자기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 맑고 요란한 웃음이었다.
- 그리고 한서윤에게는 너무 익숙하게 들리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 한서윤의 몸이 미세하게 굳었다.
- 순간 크루즈의 바다와 달빛,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컬렉션의 이미지들이 현실 속으로 밀려나듯 사라졌다.
- “교수님들 분위기 꽤 올라가셨나 보네...”
- 애써 웃으며 말했지만 마음은 전혀 편하지 않았다.
- 한지원이 강민혁에게 몸을 기울이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 자연스럽게 어깨를 만지던 손길도, 다정한 척 웃으며 속삭이던 얼굴도.
- 자꾸만 머릿속에 남아 지워지지 않았다.
- 한서윤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 “미안.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 강민우가 대답할 틈도 없이 자리를 떠난 그녀는 곧 여자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 조용한 공간에 들어서자 비로소 숨이 조금 트이는 것 같았다.
- 거울 앞에 선 한서윤은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
- 생각보다 훨씬 창백했다.
- 눈빛도 흔들리고 있었다.
- 마치 단단하다고 믿었던 무언가에 금이 가기 시작한 사람 같았다.
- 한서윤은 세면대 양쪽을 손으로 짚었고 차가운 감촉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 그리고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 “대체... 당신은 나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거예요, 강민혁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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