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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배 위의 그녀

  • 강민혁은 천천히 집무실 문을 닫은 뒤 차가운 나무 문에 등을 기댔다. 그렇게라도 해야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얼굴은 창백했고 관자놀이에서는 불안한 맥박이 쉼 없이 뛰고 있었다.
  • 그는 천천히 창가로 걸어가 셔츠 칼라를 느슨하게 푼 뒤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 “내가 환각이라도 본 건가...”
  • 낮게 중얼거린 목소리가 텅 빈 집무실에 흩어졌다.
  • “아니면... 정말 그녀였던 건가?”
  • 강민혁이 눈을 감자 곧바로 한 장면이 떠올랐다.
  • 따뜻하고 생생해서 가슴이 떨릴 만큼 선명한 기억이었다.
  • 크루즈 위에서 맞이했던 저녁, 부드러운 바람이 짙은 갈색 머리카락을 흔들고 있었고 한서윤은 난간에 기대어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몸은 그 자리에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저 멀리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의 시선이 처음으로 마주쳤다.
  • 예상하지 못한 순간이었지만 한서윤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 강민혁은 그 순간을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 그날 이후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계속 한서윤을 바라보게 됐다.
  • 한서윤은 아름다운 여자였다. 하지만 그를 사로잡은 건 외모만이 아니었다.
  • 쉽게 다가갈 수 없을 것 같은 차가움과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연약함, 그리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분위기가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 원래 강민혁에게 여자에게 다가가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가볍게 말을 걸고 웃음을 끌어내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 하지만 당시의 그는 전혀 다른 상태였다.
  • 강인하고 흔들림 없던 어머니는 어느 날 갑자기 짐을 싸 들고 집을 떠났고, 아버지는 스스로를 세상과 단절시켜 버렸다. 그 사이에 남겨진 강민혁은 길을 잃은 채 혼란 속에서 수많은 질문만 품고 있었지만 누구도 답을 주지 않았다.
  • 어머니도 그랬고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 결국 남은 건 침묵뿐이었다.
  • 그의 마음을 유일하게 이해해 주던 사람은 할머니였다.
  • 할머니는 강민혁을 어둠 속에서 끌어내기 위해 크루즈 여행 티켓을 건넸다. 잠시라도 숨을 돌리고 다시 살아갈 힘을 찾기를 바랐던 것이다.
  • 그리고 그렇게 감정의 폭풍 한가운데에 서 있던 순간, 강민혁은 한서윤을 만났다.
  • 거친 파도 위에 홀로 떠 있는 조용한 섬 같은 여자.
  • 강민혁은 몇 번이나 한서윤에게 다가가려 했다.
  • 실제로 발걸음을 옮긴 적도 있었다.
  • 하지만 매번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 그때의 자신이 한서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었을까.
  •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였고, 가슴속에는 상처와 공허함만 가득했다.
  • 그런 자신이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 배에서 내린 뒤에도 강민혁은 오랫동안 후회했다.
  • 짧게 마주쳤던 시선과 희미하게 떠오르던 한서윤의 미소, 그 안에 담겨 있었을지도 모를 기대와 어쩌면 실망까지 계속 떠올랐다.
  • 강민혁은 한서윤을 다시 찾고 싶었다.
  • 그러나 현실은 그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 어머니는 갑작스럽게 총장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했고 그 자리를 자신이 이어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 이사와 서류 정리, 끝없는 회의와 새로 떠안은 책임까지 모든 일이 한꺼번에 몰아쳤고, 결국 강민혁은 배 위의 그녀를 이루어질 수 없는 꿈처럼 가슴 한편에 묻어 두고 있었다.
  • 그런데 오늘, 한서윤이 학생들 사이에 있었다.
  • 실제로 그 모습 그대로.
  • 아니, 기억 속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 강민혁은 무겁게 의자에 몸을 기대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 그때 집무실의 정적을 깨뜨리며 노크 소리가 울렸다.
  • “들어오세요.”
  • 쉰 목소리로 대답한 강민혁은 현실로 돌아오는 데 잠시 시간이 필요했다.
  • 문이 열리고 한지원이 들어왔다.
  • 입가에는 완벽하게 계산된 미소가 걸려 있었고, 눈빛에는 넘치는 자신감이 담겨 있었다.
  • “강 총장님.”
  • 한지원이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 “수정 요청하셨던 학사 계획안 가져왔습니다. 확인해 보시고 괜찮으면 서명 부탁드릴게요.”
  • 강민혁은 말없이 서류를 받아 들고 빠르게 내용을 확인한 뒤 다시 한지원을 바라봤다.
  • “한 부총장님.”
  • 정중했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 “모든 서류를 직접 가져오실 필요는 없습니다. 비서를 두는 데는 이유가 있으니까요. 다음부터는 준성 씨를 통해 전달해 주세요.”
  • 한지원의 표정이 순간 미세하게 굳어졌다.
  •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지만 곧 미소를 되찾으며 말했다.
  • “전혀 어려운 일 아닌데요. 마침 지나가던 길이었어요.”
  •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상처 입은 자존심이 숨겨져 있다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 강민혁은 조용히 한지원을 바라봤다.
  • 그는 이전부터 한지원이 어떤 사람인지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 엄격하고 냉정하며 약함을 용납하지 않는 여자.
  • 그런데 자신이 부임한 뒤부터 한지원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 딱딱한 정장 대신 부드럽고 우아한 옷차림을 입기 시작했고, 머리 모양도 한결 자연스러워졌다. 화장도 전보다 진해졌고 말투 역시 거의 속삭이는 것처럼 부드러워졌다.
  •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 강민혁은 그녀의 의도를 이미 알고 있었다.
  • “아, 그리고 강 총장님.”
  • 한지원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 “오늘 교수님들끼리 개강 기념으로 레스토랑에 가기로 했는데 같이 가시겠어요?”
  • 강민혁은 서류를 내려놓으며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 정중하게 거절할 말을 찾으려던 순간 한지원이 먼저 말을 덧붙였다.
  • “거절하지 마세요. 사람은 편한 자리에서 진짜 모습을 드러내잖아요.”
  • 한지원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이제 총장님이 우리 팀의 선장이신데 서로 조금 더 가까워질 필요도 있지 않을까요?”
  • 강민혁은 습관처럼 머리를 쓸어넘겼다.
  • 깊이 고민할 때마다 나오는 버릇이었다.
  • 솔직히 한지원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 조직을 이끌려면 신뢰가 필요했고, 신뢰는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작은 대화에서 시작되는 법이었다.
  • “...좋습니다.”
  • 강민혁이 짧게 답했다.
  • “10분 뒤에 내려가죠.”
  • “정말요?”
  • 한지원은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 “좋아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 한지원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집무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 강민혁은 천천히 창가 쪽으로 몸을 돌렸다.
  • 멀리 보이는 나무들을 바라보며 그는 생각했다.
  • 혹시 저 어딘가에서 배 위의 그 소녀가 다시 나타나 주지 않을까 하고.
  • 오늘 단 한 번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그의 세상을 뒤흔들어 놓은 여자였다.
  • 강민혁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은 단 하나였다.
  • ‘대체 넌... 나한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