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도망
- 장대같이 퍼붓기 시작한 비에, 강서희는 이제 가야 한다는 걸 알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젖었다. 몇 시간이나 모른 척 해온 사실을 드디어 인정했다.
- 그는 오지 않을 것이다.
- 강서희는 벤치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손가락이 벤치 끝을 더듬는데 미세하게 떨렸다. 다리는 어떻게 걷는지 잊은 것처럼 이미 굳어 버렸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더 거세진 비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머리통부터 사정없이 들이부었다. 그녀는 바보처럼 꼬박 네 시간을 기다린 그 자리에서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며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