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넌 다시 돌아올 거야
- 그녀의 짐은 이미 강서희가 모두 챙겨 놓았다.
- 차근차근 세어보면 사실 별로 없다.
- 전부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 아내가 되려고 산 옷뿐이었다.
- 캐리어 두 개면 충분했다.
- 마치 처음부터 잠시 머물다 갈 사람이었던 것만 같았다.
- 한진우가 팔짱을 끼고 문가에 서서, 그녀가 마지막 캐리어 지퍼를 올리는 걸 보고 있었다.
- 얼굴에 당황한 기색은 없고, 오히려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 심지어 웃음을 참는 것처럼 보였다.
- "됐어? 너 진짜 갈 거야?"
- "응."
- 강서희가 대답했다.
- 스스로도 놀랄 만큼 목소리가 싸늘했다.
- 한진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 이렇게 단호하게 대답할 줄은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다.
- 강서희는 캐리어 손잡이를 잡은 채 몸을 돌려 그를 마주봤다.
- 가까이서 보니 그의 미간에는 얇은 세로 주름이 자리 잡고 있었다.
- 일이 제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마다 생기는 그 주름이었다.
- "너도 알잖아. 이건 다 보여주기 위한 쇼일 뿐이야. 김가 쪽은 중요한 주주고, 김세린네 집안이 영향력을 쥐고 있어. 내가 걔 비위를 맞춰야 한다고."
- 강서희는 피식 웃었다.
- 웃음이 의식보다 먼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 "그럼 계속 비위나 맞춰. 난 이제 너한테 쓸모없잖아, 안 그래?"
- 한진우의 턱선이 딱딱하게 굳었다.
- 그는 혀를 차며 짜증 섞인 숨을 내쉬더니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 손아귀에 힘이 꽉 들어갔다.
- 소유욕이 묻어나는 힘이었다.
- "그러지 마."
- 강서희는 붙잡힌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봤다.
- "넌 날 사랑해."
- 한진우는 사실을 읊듯 담담하게 말했다.
- "우린 부부야."
- 그녀는 그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 "넌 날 사랑하지 않아."
- "너 지금 오버하는 거야, 강서희."
- "아니. 난 그냥 사실을 말하는 거야."
- 한진우의 손에 힘이 조금 풀렸지만 놓지는 않았다.
- "넌 집을 원하잖아, 그렇지?"
- 그는 말을 바꿨다.
- "네가 계속 바라던 그거, 내가 그 대기업 계약만 따오면 우리 집 가질 수 있어."
- 그 말이 강서희의 가슴을 세게 후벼 팠다.
- 수없이 많은 밤들이 떠올랐다.
- 그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들어와 형에 대한 불만을 고래고래 쏟아냈고, 자신만 두 배로 노력해야 하는 건 불공평하다고 울분을 토했다.
- 강서희는 늘 그의 곁에 앉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 분노를 받아냈다.
- 그가 편히 잠들 수 있도록.
- 그는 스스로도 믿지 못하던 꿈을 그녀만은 끝까지 믿어줬다.
- "서희야, 나한테 시간을 조금만 더 줘. 김가에서 그 회사랑 벌써 합의까지 끝냈어. 이것만 성사되면 모든 게 바뀔 거야. 아버지가 그랬어. 이 계약 따오는 사람한테 지분을 주겠다고."
- 짙은 피로가 강서희를 짓눌렀다.
- "손 놔."
- 한진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 "정말 날 떠날 거야?"
- "그래."
- 한진우는 그녀의 얼굴에서 망설임 한 줄을 찾으려 집요하게 바라봤다.
- 하지만 그녀는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았다.
- "넌 큰 실수하고 있어."
- 강서희는 마침내 팔을 빼냈다.
- "아니,"
- 그녀가 답했다.
- "내 실수는 계속 여기에 남아 있었던 거야."
- 한진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 강서희는 캐리어를 끌고 그의 곁을 지나 현관으로 향했다.
-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 두려워서가 아니라,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심이 온몸을 휘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오랫동안 움츠러들어 있던 자신을 하나씩 벗겨 내는 기분이었다.
- "나 없으면 넌 아무것도 아니야."
- 한진우가 다시 말했다.
- 이번엔 목소리가 한층 높아져 있었다.
- 강서희는 멈추지 않았다.
- "지금은 흥분해서 그래. 곧 진정될 거야."
- 강서희는 현관문을 열었다.
- "넌 금방 다시 돌아올 거야."
- 한진우의 외침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 ***
- 카페 안은 캐러멜과 갓 볶은 원두 향으로 가득했다.
- 강서희는 눈앞의 도자기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따뜻한 온기가 손끝으로 스며들도록 가만히 두었다. 맞은편의 강화윤은 몸을 한껏 앞으로 숙인 채 금방이라도 대신 폭발할 기세였다.
- "일단 네 집에서 좀 지내고 싶어. 그러다… 일도 정리되고 마음도 정리되면 그 다음을 생각해 볼게."
- 강화윤은 1초도 망설이지 않았다.
- "당연히 오케이."
- 아버지가 남긴 그 회사에서, 아직 입 밖으로도 자연스럽게 못 꺼내는 그 회사에서 이미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 고인의 뜻에 따라 그녀를 위한 거처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 아직 직접 가 본 적은 없다.
- 그 회사가 큰 기업이라는 건 알지만, 그녀는 한 번도 스스로 찾아본 적이 없었다.
- 이 일은 강화윤도 몰랐다.
-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 "넌 진작에 그 인간 떠났어야 했어."
- 강화윤은 단호하게 못을 박으며 음료를 휘저었다.
- "넌 이미 충분히 했어. 아니, 항상 너무 많이 해줬지."
- 강서희는 한숨을 내쉬며 커피 위에 떠 있는 하얀 거품을 바라봤다.
- "정말 그렇게 생각해?"
- 강화윤은 방금 자신이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그녀를 바라봤다.
-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 "네가 밥도 해주고."
- 강화윤은 손가락으로 하나씩 꼽았다.
- "청소하고, 그 인간 비서가 삽질하면 스케줄 대신 잡아주고. 접대 만찬 준비하고, 주주들이 오면 넌 숨었잖아. 걘 널 앞에 세우기 싫어했고, 넌 알아서 카메라 뒤로 물러났지. 게다가 밤마다 그 인간 형 욕, 회사 욕까지 끝도 없이 들어줬잖아."
- 강서희는 힘없이 웃으며 장난 섞인 말로 넘겼다.
- "그래도 그 사람이랑 안 잔 건 잘한 거겠지."
- 강화윤이 콧방귀를 뀌었다.
- "그게 정답! 그 인간 여기저기 놀아나는데 무슨 병을 옮길지 누가 알아."
- 강서희는 이번엔 진짜 웃음이 터졌다.
- 자신에게 이런 웃음이 얼마나 필요했는지 새삼 깨달았다.
- "고마워."
- 강화윤은 손을 휘저었다.
- "언제든. 내 특기는 멘탈 케어랑 말로 사람을 후벼파는 거잖아."
- 그때 휴대폰이 붕 하고 진동했다.
- 안 봐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 강화윤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 "그 인간?"
- 강서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 "열어봐."
- 강화윤이 재촉했다.
- "이번엔 또 무슨 헛소리를 했나 보자."
- 강서희는 반 박자 망설이다가 화면을 눌렀다.
- 사과는 아니었다.
- 그녀는 메시지를 소리 내어 읽었다.
- "계속 이럴 거면 내가 준 목걸이 돌려줘. 그거 비싸."
- 강화윤은 몸을 바짝 들이밀어 내용을 확인하더니 입을 떡 벌렸다.
- "거봐! 진짜 개쓰레기. 그냥 그 목걸이 쓰레기통에 던져 버려."
- 강서희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니."
- "아니?"
- 강화윤이 되물었다.
- "서희-"
- "돌려줄 거야."
- 강화윤은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
- "진심이야? 에이, 그거 그냥 팔아도 되잖아."
- "그 정도 돈은 이제 필요 없어."
- 강서희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 지금은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지만.
- "걘 지금 그걸 당장 되찾고 싶을 거야."
- 그 말에 강화윤이 잠시 멈칫했다.
- 그녀는 강서희의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 "서희야, 난 지금의 네가 좋아."
- 강서희는 커피를 모두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결심이 마음 깊이 자리 잡은 듯, 이상하리만치 모든 게 또렷했다.
- "회사에 가야겠어."
- 강화윤의 눈이 동그래졌다.
- "지금?"
- "응."
- 강화윤이 테이블 너머로 손을 뻗어 그녀 손을 꽉 잡았다.
- "필요하면 바로 톡 해. 아님 그 인간 차 긁으러 같이 가도 되고."
- 강서희는 옅게 웃었다.
- "기억해 둘게."
- ***
- 위시 그룹 본사는 늘 보던 그대로였다.
- 하지만 회전문을 밀고 들어서는 순간, 모든 것이 다르게 느껴졌다.
- 더 이상 자신이 속하지 않은 공간으로 들어서는 기분이었다.
- 안내 데스크 직원이 고개를 들었다.
- 그녀를 알아본 듯한 표정이 스쳤지만, 곧 우쭐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 "돌려줄 게 있어서 왔어요."
- 직원은 콧방귀를 뀌었다.
- "이제 그런 권한 없으시잖아요. 이혼 소동 벌이셨다면서요?"
- 차가운 기운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 "잠깐이면 돼요."
- 직원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즐겁다는 듯 웃었다.
- "규정은 규정이죠. 방문객은 출입증이나 사전 예약 없으면 일절 출입 불가입니다."
- 바로 그때, 직원이 굳어버리더니, 눈이 휘둥그레져 벌떡 허리를 세웠다.
- "회장님,"
- 그녀가 숨을 들이켰다.
- 허리 숙여 인사하는 각도가 넘어질 듯 컸다.
- "안녕하십니까."
- 강서희는 미간을 좁힌 채 뒤를 돌아봤다.
- 한 남자가 그녀의 등 뒤에 서 있었다.
- 훤칠한 키에 완벽하게 재단된 수트, 그리고 침착한 분위기와 부정할 수 없는 권위.
- 그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로비의 공기가 확 달라졌다.
- 수군대는 소리가 가라앉고, 시선이 한데 모였다.
- 강서희는 눈썹은 살짝 치켜올렸다.
- 한태언.
- 한진우의 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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