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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그 형

  • 강서희는 한태언을 잘 몰랐다.
  • 둘은 가족 만찬이나 짧은 인사 자리에서 몇 번 스쳐 본 게 전부였다.
  • 그는 한 집안의 명실상부한 후계자이자, 회장님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었다.
  • 동시에, 한진우가 세상에서 제일 증오하는 남자이기도 했다.
  • 한태언은 한진우가 그토록 원했지만 끝내 손에 넣지 못한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다.
  • 똑똑한 머리에 뛰어난 능력과 빈틈없는 일 처리, 억지로 꾸민 잡지 모델 같은 미남은 아닌데, 오히려 유명 잡지들이 먼저 그를 표지 모델로 세우려 할 정도였다.
  • 지금 가장 핫한 싱글남.
  • 안내 데스크 직원 역시 그의 등장에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 자세를 바로 세우더니,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부드러움이 묻어났다.
  • “서희 씨.”
  • 한태연이 차분하게 인사했다.
  • 그가 자신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부르는 순간, 강서희는 입술을 살짝 다물었다.
  • 이상했다.
  • 평가도, 놀라움도 없이 그냥 불러서 더.
  • “이걸 돌려주러 왔어요.”
  • 서희가 살짝 손을 들어 목걸이를 보여줬다.
  • “근데 이 직원분이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셔서요.”
  • 한태언은 직원을 바라보지도 않았지만, 직원이 순간 얼어붙은 게 서희에게도 느껴졌다.
  • 한태언은 그쪽으로 시선을 가볍게 흘리기만 했다.
  • “저를 따라오시죠.”
  • 그러더니 이미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 서희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이고 뒤를 따랐다.
  • 그의 구두 소리가 또각또각 리듬을 타며 바닥을 찍었다.
  • 뒤쪽에서 안내 데스크 직원이 그대로 얼어붙어 있는 기척이 남았다.
  • 엘리베이터 문이 살며시 닫혔다.
  •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올라가는 시간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 불편한 침묵은 아니었다.
  • 한태언은 그녀의 옆에 선 채 두 손을 자연스럽게 내린 모습 그대로 조용히 서 있었다.
  • 한태언의 집무실은 한진우의 사무실과 정반대였다.
  • 과시하려는 흔적도, 허세도 없었다.
  • 문턱을 넘는 순간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향이었다.
  • 새 종이 냄새와 잘 손질된 원목 향이 은은하게 섞여 있고, 그 위로 아주 옅은 베르가못 향이 감돌았다.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 그에게서 나는 향이었다.
  • 한태언은 책상 뒤에 앉으며 맞은편 자리를 가볍게 가리켰다.
  • 하지만 강서희는 앉지 않았다.
  • 반짝거리는 책상 위에 목걸이를 내려놓았다.
  • 빛을 받은 다이아가 은은하게 반짝였다.
  • 그의 시선이 목걸이에 머물렀다가 천천히 움직였다.
  • “이 목걸이, 한진우가 준 겁니까?”
  • “네.”
  •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낮게 말했다.
  • “재밌네요.”
  • “왜 그렇게 말씀하시죠?”
  • 서희가 되물었다.
  • 그는 목걸이를 한 번 더 훑어보고 나서야 눈을 들어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 “한진우가 이걸 나한테 사달라고 부탁했었거든요.”
  • 그 말이 귓가를 세게 울렸다.
  • 서희는 목걸이를 노려보다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 창피해서가 아니라 분해서.
  • 입술을 세게 깨물다가 결국 낮게 내뱉었다.
  • “구질구질한 놈.”
  • 한태언의 입꼬리가 살짝 움직였다.
  • “그런데 이걸 도로 달라고 하더라고.”
  • 그녀가 건조하게 덧붙였다.
  • “되게 ‘비싼 물건’이라면서요.”
  • 한태언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 “근데 애초에 이 물건, 그의 것도 아니라니.”
  • 서희는 무게중심을 살짝 옮기며 피곤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 “그 사람… 여기 있나요?”
  • 한태연이 고개를 저었다.
  • “없습니다.”
  • “김세린 씨와 함께 있습니다.”
  • 그는 담담히 말했다.
  • “우리 회사 사업 파트너죠.”
  • 서희는 다시 입술을 꾹 깨물었다.
  • “둘이 어딨는지 알고 싶습니까?”
  • 그가 미묘하게 눈썹을 올렸다.
  • “아뇨.”
  • 그녀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 잠시 그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 서희는 턱을 살짝 들고 덧붙였다.
  • “저희, 지금 이혼 절차를 밟고 있거든요.”
  • 서희의 말에 그의 관심이 확 붙잡혔다.
  • 자세가 미묘하게 달라졌고, 눈빛이 예리하게 바뀌면서 전과는 다른 초점으로 그녀에게 꽂혔다.
  • “그렇군요.”
  • 그가 낮게 대답했다.
  • “그가 한태언 씨한테, 아니면 회장님께는 말씀 안 드렸나 봐요?”
  • 서희가 잠시 뜸을 들였다.
  • “아직은요.”
  • 한태언 고개를 저었다.
  • 그리고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 “걔는 저를 싫어합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요.”
  • 서희는 피식 웃고 말았다.
  • “네, 너무 티가 나더라고요.”
  • 잠시 대화가 끊기자, 사무실이 얼마나 조용한지 새삼 느껴졌다.
  •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렸다.
  • 한태언은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손가락을 느슨하게 깍지 끼고 그녀를 바라봤다.
  •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 “그 얘긴 그만하고, 한잔하실래요?”
  • “네?”
  • 강서희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 “지금… 무슨 말씀이세요?”
  • 한태언은 눈을 한 번 깜빡이더니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 “요즘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거든요.”
  • 서희가 눈살을 모았다.
  • “스트레스요?”
  • “네.”
  • “뭐 때문에요?”
  • 진짜로 궁금했다.
  • “한진우.”
  • 그는 주춤도 안 했다.
  • “한진우의 무능 때문에 회사 전체가 흔들리고 있는데도 아버지는 계속 우리를 경쟁시키려고 하시죠. 경쟁이 사람을 성장시킨다나. 올해 주가가 떨어진 뒤 저는 몇몇 핵심 의사결정에서 배제됐습니다.”
  • 서희는 떠올렸다.
  • 그 무렵 한진우는 유난히 들떠 있었다.
  • 형이 힘이 약해졌다며 의기양양하게 떠들어 댔었다.
  • 그때는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한 줄 알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끝없는 하소연과 고자질이 전부였을지도 몰랐다.
  • “게다가,”
  • 한태언이 담담하게 덧붙였다.
  • “제가 있으면 직원들이 사기가 떨어진다고 하더군요”
  • 서희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 “정말 그 정도예요?”
  • 그가 그녀를 보았다.
  • “그보다 더합니다.”
  • 사무실에는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 이번에는 조금 더 짙었다.
  • 그녀는 자신이 그의 책상에 얼마나 가까이 서 있는지, 그리고 이 사무실 특유의 그의 향이 공기 속에 어떻게 맴도는지 또렷이 의식했다.
  • “그럼.”
  • 한태언이 몸을 아주 조금 앞으로 기울이며 그녀를 불렀다.
  • “서희 씨.”
  • 그가 다시 한 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가 가슴 깊이 내려앉았다.
  •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 그 순간에서야 강서희는 그를 제대로 바라보았다.
  • 한진우의 형도 아니고, 유시 그룹의 후계자도 아니며, 이사회와 경제 기사에 늘 이름이 오르내리는 그 사람도 아니었다.
  • 그저 한 남자였다.
  • 그리고…
  • 젠장, 정말 섹시했다.
  •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녀는 스스로도 당황했다.
  • 지금껏 그녀는 그를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 그럴 이유도 없었고, 그럴 처지도 아니었다.
  • 하지만 이제 그녀를 묶어둘 건 아무것도 없었다.
  • 시선을 피할 이유도.
  • 그래서인지 그의 모든 모습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왔다.
  • 강서희는 마른침을 삼켰다.
  • “가실래요?”
  • 그가 한 번 더 물었다.
  • 이번에는 아까보다 조금 더 낮은 목소리였다.
  • 그 순간만큼은 한진우라는 이름도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 그의 제안을 고민해서도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 그는 그 집 사람이고, 곧 이혼할 남편의 친형이니까.
  •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일까.
  • 지금 그녀에게는 정말 술 한 잔이 필요했고, 그 섹시한 남자가 방금 그녀를 초대했다.
  • 강서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좋아요, 한잔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