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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그녀가 앞으로 지내게 될 집

  • “엄마, 그 사람 좋은 사람이야. 그 사람이 사람을 시켜서 엄마를 여기로 모시고 온 거야.”
  • 안율은 침착하게 혼인관계증명서를 다시 집어넣었다.
  • “일단 나 신경 쓰지 말고 명훈이나 잘 돌봐 줘. 난 이제 성인이잖아.”
  • “율아…”
  • 고성희는 마음이 복잡했다. 그녀는 눈물을 머금은 채 안율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 “미안해. 널 데려와서 고생만 시키네.”
  • “다 인연인 거야. 그리고 지나간 일은 그냥 지나간 일인 거고.”
  • 착한 소녀는 자신의 어머니를 향해 장담했다.
  • “엄마는 아무 걱정하지 마. 엄마의 노후는 내가 책임질게. 나 안율이 굶지 않는다면, 엄마랑 명훈이도 절대 굶을 일 없을 거야!”
  • 그 말에 고성희는 마음의 위안을 얻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마음이 쓰라렸다. 이에 그녀는 몸을 돌려 자신의 양녀를 꼭 끌어안았다.
  • 한참 뒤, 고성희를 진정시킨 안율은 커다란 캐리어를 하나 꺼내 자신의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 “정말 그 윤 대표라는 사람 집으로 들어가서 지낼 거니?”
  • “응.”
  • 소녀의 동작은 신속했고, 말투는 담담했다.
  • “결혼을 했으면 함께 지내야 하는 거잖아? 그 사람 정말 나한테 잘해줘. 그 사람 할아버지도 날 엄청 좋아하시고.”
  • “율아!”
  • 고성희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 “그 남자 정말 믿을 만한 거 맞아? 조건은 어떤데? 나쁜 취미 같은 건 없고? 뭐가 됐든 하나쯤은 있겠지? 뭐라도 아는 게 있어야 할 거 아니야?”
  • “오늘 나를 구해주고 엄마를 구해줬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지할 만한 사람이야.”
  • 안율은 자신의 옷을 전부 욱여넣은 뒤 힘껏 지퍼를 당기며 윤재환에게 자신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 고성희가 걱정하지 않도록 그녀의 말투는 내내 홀가분하고 유쾌했고, 심지어 얼굴에는 행복에 겨운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 그런 그녀의 모습에 고성희는 자신의 딸이 그 윤 대표라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안씨 집안에 남아있는 것보다는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다.
  • “엄마, 절대 안승호 그 사람한테 휘둘리면 안 돼. 명훈이 잘 챙겨줘. 1년 치 월세는 미리 다 냈고, 매달 때맞춰 생활비도 보내줄게.”
  • “율아, 꼭 행복해야 해.”
  • 이는 고성희의 가장 큰 소망이었다.
  • “응, 엄마. 난 그럼 이만 갈게!”
  • 안율은 캐리어를 끌고 떠나가려 했다.
  • 그러던 그때, 덜컥하는 소리와 함께 바퀴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이를 본 고성희가 얼른 말을 꺼냈다.
  • “캐리어 다른 걸로 바꿔서 가져가지 그래? 그건 다 망가졌잖아.”
  • “괜찮아. 들고 갈 수 있어. 그 좋은 캐리어는 엄마랑 명훈이가 써!”
  • 그녀는 행여라도 늦을까 캐리어를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가며 고개를 돌려 미소 띤 얼굴로 고성희에게 당부했다.
  • “몸 잘 챙겨! 나 갈게!”
  • 고성희는 문 가에 서서 떠나가는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자신의 노후를 책임지겠다던 안율의 말을 떠올리자, 그녀는 코끝이 시큰거리며 엄청난 죄책감이 밀려왔다.
  • 가족과 떨어져 길을 잃고 헤매던 율이를 데려온 뒤,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반년 정도는 평화로운 생활을 했었다.
  • 하지만 멋도 모르고 안승호와 결혼을 한 뒤로 덩달아 갖은 고생을 하며 자라온 아이였다.
  • 차 창밖을 지나가는 차들 사이로 순간순간 스치는 풍경들을 바라보는 안율의 손에는 윤재환이 준 열쇠와 키카드가 들려있었다.
  • 그녀 역시 자신의 미래에 대해 조금은 막연함을 느끼고 있었다.
  • 차갑고 날카로운 분위기의 그 남자는 우아함과 냉정함 그 자체 같은 느낌이었다.
  • 아무리 이제부터 함께 살아가야 할 동반자라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에게 그는 어딘가 범접하기 어려운 느낌이었고, 감히 눈조차도 똑바로 마주하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 고급 아파트 단지 내에는 택시가 들어갈 수 없었던 터라 그녀는 아파트 문 앞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 게다가 캐리어가 고장 나 끌지도 못해 안율은 하는 수 없이 캐리어를 든 채로 안으로 향했다.
  • 그녀의 소박하고 초라한 모습은 이곳의 고급스러운 환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기죽지 않았다. 그녀는 마음이 꽤나 단단한 사람이었다.
  • 겨우 캐리어를 들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그녀는 지친 듯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꽤 강한 자제력을 갖고 있었다.
  • 28층에서 내린 그녀는 2801호 앞에 멈춰 서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 ‘틀림없이 여기야.’
  • 그곳은 널찍한 복층 아파트였다. 위아래층을 합하면 대략 100평 정도 되는 것 같았고, 그 가치도 아마 100억은 넘을 것 같은 집이었다.
  • 전체적인 인테리어는 블랙 앤 화이트로 된 깔끔하고 모던한 느낌으로, 요즘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 안율은 집 전체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왜인지 생활의 흔적이 그다지 많이 느껴지지는 않는 조용하고 썰렁한 곳이었다.
  • 그녀는 그 어디에서도 그가 여기서 지냈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 주방에는 양념 통조차 없었고, 그 어떤 식재료도 없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그곳 또한 텅 비어있었다.
  • 이에 안율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 자신이 직접 이 집의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아마 자신이 어느 모델하우스에 온 것은 아닌지 의심했을 터였다.
  • 하지만 이곳은 그녀가 앞으로 지내게 될 집이었고, 그녀는 이왕 이렇게 된 이상 그래도 사람 사는 집처럼은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이에 안율은 냉장고 문을 닫고는 열쇠를 챙겨 집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