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 오민준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떠나자마자, 한은하는 몸을 일으켜 환자복을 갈아입었다.
- 병원 뒷문에는 검은색 에쿠스 리무진 한 대가 조용히 대기하고 있었다.
- 경호원이 다가와 차 문을 열어 주자, 한은하는 몸을 숙여 차에 올랐고, 수행 비서는 곧바로 태블릿을 건넸다.
- “아가씨, 요청하신 실시간 모니터링 화면 준비됐습니다. 이 프라이빗 실내 웨딩홀은 그룹 소유 시설이라 모든 CCTV를 실시간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화면이 천천히 밝아지자, 그 안에는 오민준이 늘 어울려 다니던 친구들이 이미 전부 모여 있었고, 그들은 휴게 공간에 모여 담배를 피우며 거리낌 없이 떠들어대고 있었다.
- “민준이 형이 진짜 사랑하는 건 수아지. 한은하 따위가 뭔데. 맨날 죽상이나 하고 다니는데 우리 수아처럼 살갑고 센스 있는 애가 어디 있어.”
- “그러게 말이야. 민준이 형도 대단하지. 수아가 어릴 때부터 꿈꾸던 실내 결혼식 해주겠다고 이 웨딩홀을 통째로 빌렸다잖아. 여기 하루 대관료만 해도 몇천만 원은 나온대.”
- “그게 진짜 사랑이지. 민준이 형 마음속엔 애초에 수아밖에 없었어.”
- 한은하는 말없이 화면을 응시했다.
- 손톱 끝이 가죽 팔걸이를 파고들며 깊은 자국을 남겼다.
- 그녀가 지난 몇 년 동안 쏟아부은 진심은 저 사람들 눈에는 비웃음거리조차 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 삼십 분 뒤, 에쿠스 리무진은 웨딩홀 측면의 한적한 출입구 앞에 멈춰 섰고, 비서의 안내를 받은 한은하는 곧장 이층 VIP 관람실로 향했다.
- 그곳에는 단방향 유리가 설치돼 있어 일층의 거대한 웨딩홀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 아이보리와 샴페인 골드를 주조색으로 꾸민 웨딩홀은 기둥 하나 없는 높은 돔 천장이 압도적인 웅장함을 자아냈고, 항공편으로 공수한 최고급 백장미가 입구의 레드카펫부터 메인 무대 앞까지 빈틈없이 채우고 있었다.
- 천장에서는 수천 개의 맞춤형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쏟아지듯 늘어져 있었고, 따뜻한 조명이 공간 전체를 은은하게 감싸며 화려하면서도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 바로 이런 결혼식이었다.
- 한은하가 한때 가슴 깊이 꿈꾸던 결혼식.
- 하지만 그녀가 오민준과 결혼할 당시, 그는 회사 사정이 어렵다며 모든 예식을 최대한 간소하게 치르자고 했고, 그녀는 그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 돈을 아끼겠다며 웨딩드레스조차 빌려 입었던 그녀는 이제야 깨달았다.
- 돈이 없었던 게 아니다.
- 그 돈을 그녀에게 쓰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 그것뿐이었다.
- 한은하는 비서에게 신호를 보냈고, 곧 대형 화면은 신부 대기실 CCTV로 전환됐다.
- 화면 속 이수아는 고급 맞춤 제작 머메이드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거울 앞에서 화장을 고치고 있었고, 그때 흰색 예복 차림의 오민준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 그가 이수아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다정함과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 한은하가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시선이었다.
- “수아야, 오늘 정말 예쁘다.”
- 오민준이 다가가 뒤에서 이수아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쌌다.
- “우리가 혼인신고는 못 해도, 내 마음속에서 이게 진짜 결혼식이야. 내가 꿈꾸던 결혼식도 바로 이런 거고.”
- 그 순간 친구 장창태가 대기실 안으로 성큼 들어왔고,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근데 너희 둘은 서로 좋아했으면서 왜 이어지지 않은 거야? 괜히 다들 보는 앞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놀이만 한 거냐?”
- 이수아는 손에 들고 있던 립스틱을 내려놓자마자 눈가를 붉혔다.
- “그땐 어렸잖아. 친구로 남아야 오래 함께할 수 있다고 믿었거든. 그런데 민준 오빠가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는 걸 보고 나서야 알았어. 오빠는 내게 특별한 사람이었다는 걸.”
- 그녀는 몸을 돌려 오민준을 바라봤다.
- 목소리에는 울음이 묻어 있었다.
- “오빠, 결혼식 전날 기억나? 그날 나한테 물어봤잖아. 네가 내 신부가 되어 줄 수 있겠냐고. 그땐 은하 언니한테 너무 미안해서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어.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후회돼. 내가 그때 조금만 더 용기를 냈더라면 다른 사람이 끼어들 일도 없었겠지?”
- 그 순간 한은하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 기억은 순식간에 자신의 결혼식 전날로 되돌아갔다.
- 그날 오후, 오민준은 한 통의 전화를 받고 급히 밖으로 나갔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술 냄새를 풍기며 집으로 돌아왔다.
- 그는 소파에 앉아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고, 눈가 역시 붉게 충혈돼 있었다.
- 그때의 한은하는 그저 결혼을 앞두고 긴장하는 줄 알았다.
- 아니면 회사에 무슨 문제가 생긴 줄 알았다.
- 그래서 그런 줄도 모르고 밤새 그의 곁을 지키며 달래 줬고,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평생 그의 곁에 있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 그런데 진실은 달랐다.
- 그날 오민준은 이수아에게 청혼했다.
- 그리고 거절당했다.
- 결혼을 앞두고 불안했던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여자에게 거절당한 충격에 넋이 나가 있었던 것이다.
- 그리고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바보였다.
- 다른 여자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남자를 끌어안고 평생의 행복을 얻었다고 믿고 있었으니.
- 화면 속에서 오민준은 이수아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 주고 있었다.
- “바보야. 네 잘못이 아니야. 내가 그때 너한테 충분한 확신을 주지 못했던 거지.”
- 그는 두 손으로 이수아의 얼굴을 감쌌다.
- 그리고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 “이제는 내가 네 꿈을 이뤄 줄게. 세상에서 가장 성대한 실내 결혼식으로. 수아야, 꼭 기억해. 내가 다른 여자와 결혼했더라도 내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너 하나뿐이야.”
- 한은하는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 참 감동적인 사랑 고백이었다.
- 자신이 그 사랑의 희생양만 아니었다면 박수라도 쳐 줬을 것이다.
- 그 사이 아래층 웨딩홀에서는 결혼식이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초대받은 하객들이 모두 자리를 잡자 오민준은 스태프를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 그러자 천장 위에서 수많은 장미 꽃잎이 천천히 흩날리기 시작했고, 친구들의 환호 속에서 그는 이수아의 손을 잡고 메인 무대를 향해 걸어갔다.
- 사회자는 서약서를 펼쳐 들고 차분한 목소리로 결혼 서약을 낭독했다.
- 이수아의 의사를 묻는 차례가 되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서둘러 대답했다.
- “네, 그러겠습니다.”
- 사회자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곧바로 오민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 “오민준 씨. 이수아 양을 평생의 반려로 맞아 서로 의지하고 아끼며 평생 함께할 것을 약속하시겠습니까?”
- 바로 그 순간, 한은하는 천천히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서와 이미 준비를 마친 취재진을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 “가죠. 이제 우리 차례예요.”
- 오민준의 입에서 막 “저...”라는 말이 나오려던 순간.
- 쾅!
- 두꺼운 원목 문이 거칠게 밀려 열렸다.
- 굉음이 웨딩홀의 엄숙한 분위기를 단숨에 갈라놓았고, 모든 하객의 시선이 일제히 입구를 향했다.
- 한은하는 수십 명의 취재진과 함께 당당한 걸음으로 웨딩홀 안으로 들어섰다.
- 카메라 플래시가 연달아 터지며 웨딩홀 전체를 대낮처럼 밝게 비췄다.
- 오민준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가 순식간에 굳어 버렸고, 옆에 서 있던 이수아 역시 입을 틀어막은 채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 한은하는 레드카펫 끝에 멈춰 섰다.
- 그리고 산산조각 나기 직전의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오민준을 똑바로 응시하며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 하지만 고요한 웨딩홀 전체에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 “이 결혼, 난 동의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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